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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Jun 14. 2019

100세 시대의 그늘

노후 불안 - 준비되지 않은 노년은 재앙이다 I

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에도 영향을 가져왔다. 30년 전 평균 70세이던 기대수명은 근래에 들어 80세를 넘어섰다. 이제는 기대수명 100세가 당연시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일찌감치 ‘100세 시대’라는 말을 써왔다. 영어로는 ‘Homo Hundred(호모 헌드레드)'라고 하는 100세 인생은 살아있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의 입장에서는 무척 반가운 말이다. 하지만 '100세 시대' 그 자체는 삶의 질(quality)을 고려하지 않은 개념이다. 삶의 질이 보장된다면 오래 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을 없다. 무병장수(無病長壽)는 만인의 소망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느냐를 삶의 당사자에게 맡겨버린 100년의 인생이 무조건 반가울 수는 없는 일이다. 유병장수(有病長壽)는 결코 축복이 아니다. 


고만고만한 수입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40대 남자들은 100세 시대라는 말을 들으면 “50년이나 더 벌어야 돼?”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숨만 쉰다고 살아지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예순 나이는 청년 축에 든다며 환갑잔치도 꺼리는 분위기다. 하지만 환갑을 지난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척 드물다. 몸과 마음이 모두 쌩쌩하다고 해도 더 쌩쌩한 후배 세대들과 직업을 놓고 벌이는 전투에서 이기기는 쉽지 않다.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벌이를 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다. 이런 환경은 계층 하락을 불러온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의 2019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은퇴 후 생활 소비 수준이 현역 시절 대비해 절반 미만으로 떨어졌다고 답한 응답자가 48.6%였다. 30% 미만으로 주저앉았다는 응답자도 15.8%나 되었다. 은퇴를 한 노년층의 3분의 2가 현역 시절보다 생활수준이 낮아진다는 얘기다. 지금의 40대 남자들도 이런 현실을 비껴서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그저 평범하게 벌어먹고 사는 40대 남자들은 100세 시대라는 말을 들으면 멍해진다. 어느 모로 봐도 현재의 삶에서 노후는 먼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지금 현재를 살아내는 것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다. 덕분에 노후에 대한 대비는 그만큼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나라가 내어준다는 국민연금과, 다달이 넣고 있는 몇 개의 보험, 조금만 더 일하면 (물론 그 사이에 별 일이 없다면!) 대출금 상환이 끝나는 집 한 채 정도가 노후 대비의 전부다. 아무래도 그것들로는 은퇴 후 20~30년을 더 살아가기가 빠듯해 보인다. 하지만 그 정도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그마저도 없다면 미국 작가 필립 로스의 말처럼 ‘노년은 삶을 위한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Old age isn’t a battle, old age is a massacre.)’이 될지도 모른다.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계획하고 대비해서 변수가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긍정의 예측 확률을 높이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 대비나 계획 없이 부평초처럼 물결 따라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자위해 봤자 표류를 항해로 위장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노후 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노후 생활에 대한 계획과 준비가 부족할수록 긍정적인 예측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삶은 쉽게 미래에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노후 생활이 길어지고 있는 지금, 노후는 늙음을 앞둔 사람들이 결코 떨쳐낼 수 없는 불안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노후 불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 불안의 무게는 다른 불안보다 묵직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 불안요소 1위가 노후 준비(25.4%)였고 2위가 취업과 소득(18.4%)이었다. 그 뒤로 신체 건강(15%), 자녀교육과 가족부양(12.1%), 노화로 인한 신체와 정신의 문제(7.3%) 등이 불안의 원인으로 꼽혔다. 노후 준비에 불안해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돈 문제다. 한국리서치가 2019년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노후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경제적 여유’를 꼽았다. 그리고 건강, 여가생활, 사회활동이 뒤를 이었다. 현실이 그렇다. 100년을 살던 200년을 살던 돈이 넉넉하지 않으면 생활은 곤궁해진다. 늙고 쇠약한 몸을 이끌고 생활비에 쪼들리면서 20년 이상을 살아가는 일은 장수의 축복이 아니라 그저 고통일 뿐이다. 


건강이나 여가생활, 사회활동도 돈 없이 쉽지 않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돈이 들어가는 것은 젊으나 늙으나 같다. 하지만 늙은 몸은 더 자주 아프고 더 많이 아프다. 약이나 병원의 신세를 지는 일은 돈 없이 안된다. 든든하지 않은 경제력은 신체의 고통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상처를 준다. 여가생활, 사회활동 역시 돈이 없으면 마음껏 할 수가 없다. 부족한 재정은 삶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노후 불안은 노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비용’에 대한 불안인 것이다. 물론 돈이 노후 준비의 전부는 아니다. 건강한 몸과 맑은 정신, 나를 소중히 여기는 가족과 친근한 벗, 여가 시간을 채워줄 소일거리도 필요하다. 하지만 돈이 너무 없으면 이런 것들마저 의미가 옅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노후’라는 단어로 책 제목 검색을 해보면 많은 책들이 나온다. 대부분 노후 자금이 주제인 책들이다. “돈 걱정 없는 노후 30년“, “노후를 위해 집을 이용하라”, “적게 벌어도 잘 사는 노후 50년“, “당신의 노후는 당신의 부모와 다르다 “, “혼자 사는데 돈이라도 있어야지 “, “노후를 위해 오피스텔에 투자하라 “, “3억으로 돈 걱정 없는 노후 30년.” 트렌드는 때때로 현실을 증폭하고 과장한다. 하지만 전적으로 허구나 상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40대 남자들이 직면한 현실에서 노후불안은 확실하고 강력한 미래가 틀림없다.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알려진 유럽식의 복지나 사회안전망을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 우리가 많이 부러워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복지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같은 국가들에 비하면 우리 사회는 사적복지(私的福祉)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다. 물론 사회가 제공하는 복지가 약하더라도 ‘일할 수 있을 때’ 충분히 벌어 놓을 수 있다면 노후에 대한 불안이 좀 덜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공공복지의 빈 틈을 개인이 메울 만큼 넉넉하게 벌기가 쉽지 않다.


선대인경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선대인 소장은 우리나라에서 노후불안이 팽배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나라는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정규직 일자리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고 정년도 6~9년 이상 빠르다. 그래서 비정규직이나 자영업처럼 불안정한 돈벌이에 내몰리는 사람이 많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적고, 그나마 돈을 버는 기간도 짧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가진 것이 없으니 그만큼 노후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을 지낸 장하성 교수도 낮은 소득과 소득 격차를 지적한다. 장하성 교수는 현재 노동 시장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근로자나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임금 수준이 경제 규모에 비해 낮다고 말한다. 고용의 11%를 담당하는 대기업이 전체 이익의 60% 이상을 가져가고 고용의 8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고작 30%의 이익만을 가져가는 경제 구조에서는 임금 격차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장하성 교수는 빈부격차보다 소득 격차가 더 문제이며, 이대로 가면 지금 젊은 세대는 6.25 전쟁 이후 부모 세대보다 더 못 살게 되는 최초의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임금 격차는 우리나라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된 지 오래다. 통계청과 고용노동부의 자료에 따르면, 외환위기 직전인 1995년만 해도 중소기업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300인 이상 대기업 근로자의 79.4% 수준이었다. 이후 하락폭이 커지면서 2000년에 70.4%, 2010년에 63.7%로 내려앉았고 2017년 현재 64%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NH투자증권에서 낸 <2016 대한민국 직장인 보고서>를 보면, 직장인의 노후 부족액은 평균 2억 5천만 원, 자영업자의 경우 1억 9천만 원이다. 그나마 이 금액은 최소 생활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적은 편에 속한다. 실 예로 국민연금공단의 2018년 조사에서 노후 부족액은 평균 4억 원이 넘었다. 응답자들은 은퇴부터 사망까지 월평균 250만 원, 총 8억 2천만 원 정도의 생활비가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준비할 수 있는 노후자금은 평균 4억 1천만 원에 머물렀다. 욕심을 버려도 ‘수 억 원’의 돈이 부족한 채로 노후를 맞이해야 하는 것이 서민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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