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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May 31. 2019

병이 되어버린 불안, 건강염려증

건강 불안 -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한 몸 III

늙고 약해지는 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덕분에 본격적으로 늙기 시작하는 40대라고 해도 비슷한 또래에게서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열등감 따위를 느낄 필요는 없다. 몸의 모양새가 조금 다를 수는 있어도 마흔 줄에 들어서면 같이 늙어가는 처지로 일원화된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 줄곧 이어져온 공평한 자연의 섭리다. 또 하나 공평한 것이 있다면, ‘늙어가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한’ 40대 남자들 대부분이 불안하다는 사실이다. 신체와 건강에 대한 불안은 나이를 먹으면서 얻게 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무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40대에 접어든 남자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그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40대 남자들의 대부분은 그런 불안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40대 남자들은 아직 ‘강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내는 용감해야 하고, 울지 않아야 하고, 입이 무거워야 하고, 점잖아야 하고,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랐다. 지배층의 통치 수단으로 변질된 유교 사상과 그것을 등에 업은 가부장제, 권위주의에 휩쓸려 ‘남자’가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런 남성성을 예전처럼 떠받들거나 강요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의식에 박혀버린 관념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와는 달라졌다고 해도 40대 남자들의 의식에는 여전히 사내는 마땅히 강해야 한다는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強)의 책무가 들어앉아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환경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은 성향이나 행동 체계를 가리켜 아비투스(Habitus)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의 의식 속에 박혀 있는 ‘남자다움’도 남성이라는 계급이 갖는 일종의 아비투스다. 이 아비투스에 지배된 남자들은 나약해 보이는 행동은 최대한 꺼린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건강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는 것은 나약함을 인정하는 셈이고 남자답지 못함을 보이는 행동이다. 40대 남자들이 자신들의 신체가 노화되고 약해지는 것에 대해 불안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불안을 드러낸다고 해서 노화를 늦추거나 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의 한 줄기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라서’라는 관념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 덕분에 불안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조금씩 늙어가고 약해지는 것이 40대 남자다.


물론 모든 40대 남자가 건강에 대한 불안을 뭉개고 살지는 않는다. 불안은 불편한 감정이다. 사람은 불편한 감정이 생겼을 때 그 불편한 느낌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다. 건강에 대한 불안을 엄밀히 말하면 ‘건강하지 못한 신체 상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미래의 불편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다. 따라서 건강한 신체 상태를 유지하면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는 간단한 공식이 성립한다. 공식이 간단한 만큼 실천 방법도 명쾌하다. 건강 보조제나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거나, 몸이 좀 불편하거나 이상하면 곧바로 병원을 찾거나,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 정도로 어느 정도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정도에 따라 달성할 수 있는 건강의 수준이 다르지만 무언가를 실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을 가시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시험 전날 딱히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책상 앞에만 앉아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런 실천 방법은 실제로 몸에 이롭다. 설사 몸에 이롭지 않더라도 해롭지는 않은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러니 이런 방법들은 실제 건강의 개선이나 향상 여부를 떠나서, 건강에 대한 불안에 대처하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적당한 염려와 걱정은 불안으로 인한 마음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동기로 작동한다. 그런데 때로 이러한 불안이 적당한 수준을 넘어 심리장애로까지 발전하는 경우가 있다. 가벼운 증상이나 사소한 감각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큰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인데, 이를 건강염려증(Hypochondria)이라고 한다. 건강염려증을 가진 사람은 가벼운 감기에 걸렸는데도 폐렴에 걸렸다고 생각하며, 소화가 잘 안되면 위암을 의심하고, 변비가 심하면 대장암에 걸렸다고 믿게 식으로 자신의 신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들의 문제는 단순한 의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큰 병에 걸렸다고 확신한다는 점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건강에 대한 불안이 병적인 불안장애로 발전한 것이다.


좋게 보자면 건강에 대해 다소 예민하게 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건강염려증은 불안장애의 일종이다.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은 현실과 실제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로지 극대화된 두려움, 공포의 상황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불안을 쉽게 떨쳐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 건강염려증 환자도 이와 같다. 의사가 아무리 큰 병이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으며, 자신이 확신하는 병명을 듣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는, 일명 ‘병원 쇼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몸의 상태와 현실의 진료 결과 사이의 괴리는 극복할 수가 없다. 환상과 현실의 싸움에서는 늘 그렇듯이 환상의 승률이 높다. 결국 자신이 큰 병에 걸렸다는 확신만 남아 극도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병에 걸린 것은 맞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병이 아니라 정신질환에 걸리는 웃지 못할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주변에서 건강염려증에 걸렸다고 생각될 정도의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건강염려증은 무려 인구의 5%가 겪는다고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에 따르면 2016년에 건강염려증 진단을 받은 사람이 3,800명을 넘는다. 병원에는 가지 않지만 스스로 큰 병에 걸린 것이 확실하다고 믿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다. 건강염려증 환자는 나이가 많을수록 그 수도 많다. 나이가 들수록 노쇠함을 더 느끼게 되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앞서 말한 3,800명 중에 60대의 비중이 21%로 가장 높고 50대가 19%, 40대가 18%로 뒤를 잇는다. 눈여겨볼 것은 건강염려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연령이 40대라는 점이다. 30대에 비하면 40대의 건강염려증 환자 비율은 무려 두 배다. 40대에 시작한 건강염려증은 70대가 되어서 13.7%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80대가 되면 4%로 10대와 비슷한 비율이 된다.


전문가들은 건강염려증의 원인을 여러 갈래로 얘기한다. 낮은 자존감, 행복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원인이 된다는 의견도 있고 인지장애에 대한 방어기제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래도 마음의 병이기 때문에 개연성 있는 추론 정도로 원인을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건강염려증의 바탕에는 건강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음이 확실하다. 앞서 말했듯이 불안은 좋지 않은 일이 미래에 발생할 것을 두려워해서 생기는 감정이다. 다시 말해 건강염려증은 미래에 나의 건강이 나빠질 것을 극도로 두려워해서 생기는 마음의 병이다. 두려운 이유(불안한 이유)는 건강이 나빠진 후에 생길 일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건강이 나빠지거나 큰 병에 걸리면 생명을 지속할 확률이 낮아진다. 늙는 것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얘기다. 이는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능에 완전히 반하는 일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신체의 고통을 동반할 수도 있고 특정한 신체 기능이 저하되거나 아예 기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불편함과 더불어 심각한 열등감과 절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또, 그런 신체 조건은 생활에도 영향을 준다. 건강하지 못한 신체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것이고, 신체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거나 원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비용이 든다. 그런 상황에 대해 충분히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계획에 없던 지출이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건강염려증의 바탕에는 죽음에 대한 근원적 불안이 깔려 있고, 그 위에 현실의 삶이 무너지질 모른다는 불안이 쌓여 있는 셈이다.


정신건강 분야의 전문가들은 건강염려증이 자기애로부터 시작한다고도 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이 과해지고 왜곡되면 건강염려증 같은 질환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박할 생각도 없고 그만한 지식도 없다. 하지만 40대 남자의 건강염려증은 오로지 자기애에서 기인한다고만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40대 남자의 주변에는 자신이 짊어지지 않으면 삶의 균형이 깨져 버리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남자에게 40대는 삶을 떠받치기 위해서라도 건강함이 필요한 연령대다. 필요하다는 것은 결핍이 있다는 뜻이다. 마침 40대는 건강의 결핍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그래서 40대 남자들은 건강함을 강박처럼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말장난 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40대 남자의 건강에 대한 불안은 40대가 지나야 없어진다. 50대가 되고 60대가 되면 40대 시절과는 결이 다른 건강에 대한 불안이 생길 것이다. 그러다 70대가 되고 80대가 되어서, 책임질 일도 적어지고 삶을 짊어질 힘도 약해지면 강박과도 같았던 건강에 대한 불안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앞서 본 설문 조사 결과에서 80대 건강염려증 환자의 비율은 4%다. 이곳저곳 아픈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나이기도 하고 더 이상 예전처럼 건강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젊었을 때처럼 건강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불안이 잦아드는 이유일 것이다. 결국 그 정도 나이까지 가기 전인 40대에는 건강에 대한 불안을 마음에 둔 채로 지낼 수밖에 없다. 중년을 맞이한 이상 늙고 약해지는 일은 막을 길이 없다. 그런 신체의 변화로 인해 생기는 불안의 감정도 피하기는 어렵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만 늙어가는 몸과 그로 인해 생긴 불안의 감정에 적용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다. 


늙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40대에는 늙음을 자연스러운 변화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늙음은 살면서 나이를 먹다 보면 겪게 되는 몸의 변화다. 나이 먹는 것을 좋음과 나쁨으로 구분할 수 없듯이 늙음도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때가 되면 그렇게 변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늙음을 젊음보다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이라고 규정짓는다. “청춘은 아름다워.”라는 말을 “황혼은 추하다.”라는 말로 비약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열등한 상태인 늙음에 드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조바심을 낸다. 하지만 그런 안달은 불안한 마음만 더 키운다. 중년에 든 많은 사람들이 그 불안한 감정을 피하려 너무 애를 쓴 나머지 강박에 시달리기도 하고 늙어가는 자신을 보며 우울이나 절망 같은 나쁜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때로는 늙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며 호기를 부리다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늙음이라는 변화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늙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불안도 몸의 변화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거라고 여겨야 한다. 늙음을 맞이하는 40대에는 늙음을 불안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기대로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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