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불안 -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한 몸 II
노화(老化)가 반드시 질병을 동반한다는 법은 없다. 노화가 시작되었다고 죽음이 코 앞에까지 성큼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렇게 보면 늙고 약해지는 것은 그렇게까지 두려워하거나 겁을 먹을 일이 아니다. 노화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삶의 단계다. 인간의 몸은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누구도 늙고 약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항노화, 안티에이징(Antiaging) 같은 말들이 자주 쓰이면서 노화에 대응하거나 노화를 정복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긴 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마케팅을 위한 과장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행성은 모르겠지만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대부분은 생명의 성숙기를 지나면 필연적으로 늙고 약해진다. 그런 진실을 앞서 살아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 보여주었다. 노화는 생명의 운명인 셈이다. 그러므로 노화를 멈추거나 늦추겠다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이다. 오히려 늙고 약해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변화한 몸에 맞게 사는 것이 늙고 약해짐에 대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이다. 철학을 하듯이 진지해지지 않더라도 필연을 순리로 받아들이면 이 정도의 발상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늙어감을 맞이하면 속이 탄다. 나이가 들면 늙고 약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자신이 그 상황에 이르면 덤덤해지기가 어렵다. 세상은 늙음과 약해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늙음과 약해짐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늙음과 약해짐 앞에서 불안해한다.
늙음과 약해짐을 받아들이고 그런 몸 상태에 맞춰서 활동하는 것은 웬만한 여유 없이 불가능하다. 당사자의 마음은 여유가 있어도 삶과 세상은 그런 유유자적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40대 남자들에게 그런 여유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웬만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보통의 남자들에게 40대는 한창 일할 나이다. 40대가 특히 한창 일하는 연령대인 이유는 생활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2017년 가구주(家口主 가계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 연령별 월평균 총 생활비 통계를 보면 20대가 124만 원, 30대가 195만 원, 40대가 239만 원, 50대가 213만 원, 60대가 167만 원이다. 40대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구가 가장 많은 생활비를 쓰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2018년 연령별 소비구조 조사 결과에서도 20대 166만 원, 30대 234만 원, 40대 266만 원, 50대 222만 원, 60대 123만 원으로 40대의 소비 지출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컸다. 이는 씀씀이가 큰 만큼 많이 벌어야 하고 많이 벌기 위해서는 열심히, 많이 일하는 수밖에 없는 40대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나마 40대의 평균 소득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렇게 ‘빡시게’ 일할 나이에 덜컥 병이라도 들어 아프기라도 하면 생활 자체가 곤란해진다. 심한 경우에는 삶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늙음과 약해짐은 현실의 생활과 등을 맞대고 있다. 한쪽이 힘이 부쳐서 내려앉기 시작하면 다른 쪽도 마찬가지로 내려앉는다. 40대 남자들이 늙어감, 건강하지 못함에 대해 갖는 불안은 늙고 약해지는 것 자체에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늙고 약한 몸이 원인이 되어 앞으로의 삶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이러한 불안은 비단 40대가 아니더라도 가질 수 있다. 아직 마흔 줄에 들지 않은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늙고 약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미래를 생각할 때 누구나 불안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유독 40대가 되면서 건강이나 몸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늙고 약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 미래의 삶이 부실해질 확률이 전보다 높아졌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불안은 대면하고 싶지 않은 미래의 괴로운 상황을 예상할 때 생기는 정서적 반응이다. 괴로운 미래를 예상하는 것보다 불안을 자극하는 것은 없다.
건강하지 못한 신체가 삶을 빈약하게 만들 확률을 높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안다. 갑자기 병에 걸리거나 해서 생업을 이어가지 못할 정도로 건강을 잃게 되었을 때를 상상하면 눈 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상황이라면 20대나 30대도 눈 앞이 캄캄해지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40대는 벌여 놓은 일이 더 많다. 40대 남자들에게 ‘한창 일할 나이’라는 족쇄 같은 칭호가 따라붙는 것은 그만큼 일을 많이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한창 일할 나이’는 ‘한창 돈이 들어갈 나이’와 뜻이 같다. 아이들은 이제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대학까지 보내려면 더 벌어야 한다. 일찍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40대 후반의 남자들은 한 학기에 수백만 원이 넘는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걱정해야 한다. 몇 해 전 겨우 마련한 아파트의 대출금은 아직 몇 년 더 남았다. 상환기간이 긴 것이 그나마 행운이고 4대 보험 꼬박꼬박 떼는 직장생활을 ‘아직’ 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슬슬 아내와 나의 노후도 준비해야 한다. 물론 그전에 부모님의 노후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질 생각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몸져눕기라도 하면 생활 자체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늙어가기 시작한 40대 남자의 몸은 예전처럼 회복도 잘 되지 않는다. 실제로 40대 남자들이 중병을 앓기 시작하면 원상복구는 꿈도 못 꾼다고 봐야 한다. 더 나빠지는 것을 막는 것만으로 ‘선방’이다. 썩 괜찮은 건설 회사를 다니다가 40대 초반에 병을 얻어 위의 상당 부분을 잘라내야 했던 친구의 얘기를 되새김하다 보면 겁이 덜컥 난다. “과연 나였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린 순간 “이번 생은 망했네”라는 답이 나온다. 다행히 그 친구는 부모님의 지원으로 어느 정도 삶을 다시 한번 일굴 기회를 얻었지만 요즘 말로 흙수저인 내 입장에서는 현업 복귀는커녕 삶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만 남는다. 비슷한 처지인 많은 40대 남자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장사를 하든 월급을 받든,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반적인 40대 남자들의 경우 당장 수입이 끊어지면 삶의 균형이 깨져버린다. 평범한 40대 남자들 중에 몇 개월, 몇 년을 버틸 수 있는 돈을 쌓아두고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이들에게 수입이 끊어진다는 것은 생활의 균형이 깨지는 지름길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건강하지 못한 몸은 건강한 몸보다 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병이 깊거나 위중할수록 나가야 하는 돈이 많아진다. 플러스(+)를 만들어도 시원찮은 마당에 마이너스(-)에 마이너스가 더해지는 것은 인내와 희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런 미래 앞에서 불안하지 않을 40대 남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존재의 삶까지도 떠받들고 있다. 그 존재들의 무게만큼 불안의 무게는 커질 수밖에 없다.
건강에 대한 불안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하는 일자리의 유지를 염려한다는 점에서 고용에 대한 불안과 맥락이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둘은 차이가 있다. 고용에 대한 불안은 고용자의 선택에 의해서 지금의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생기는 불안이다. 일시적으로 일자리를 잃을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일자리가 없으리라 가정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반면에 건강에 대한 불안은 지금 하고 있는 일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일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떠안아야 한다는 암울한 가정을 전제로 한다. 어쩌면 건강에 대한 불안, 늙어감에 대한 불안이 고용 불안보다 몇 배는 더 클지도 모른다.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까지도 곤궁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건강과 늙어감에 대해 느끼는 40대 남자들의 불안이 그 어떤 불안보다 심각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