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기에는 너무 아픈 상사의 갑질
직장 내 갑질에 관한 설문들을 보면 적게는 60%, 많게는 90%까지 갑질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이 나온다. 갑질을 하는 사람은 절반 이상이 직속 상사이며, 타 부서의 상사나 임원까지 합하면 80%가 나보다 높으신 분들이다.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자고 만든 위계질서를 사람 괴롭히는 데 쓰는 셈이다. '갑질'이 사회 문제가 되면서 직장 내 갑질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급기야 직장에서 괴롭힘을 금지하는 법까지 등장했다. 그나마 숨통이 트일 구멍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수많은 '아랫사람'에게 상사들의 갑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법은 갑질을 하는 상사보다 멀리 있다. 결국에는 법에 기댄다고 해도 눈 앞의 갑질에 대처할 방법은 있어야 한다. 법에 호소할 때까지는 어쨌든 정신이 든 채로 살아 있어야 하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사의 갑질에 대한 대처 방법을 얘기한다. 대처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거절하라', '싫다고 표현하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라' 같은 적극적 대응과 '그냥 받아들여라', '깨면 그냥 깨져라' 같은 순응적 대응이다. 간혹 '상대에게 공감하라', '나를 사랑하라' 같이 얼토당토않거나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뭐가 됐든 현실에서는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적극적으로 대응했다가는 뒤탈이 있을까 두렵고 순응하다가는 마음에 상처가 늘까 봐 걱정이 된다. 갑질이라는 것 자체가 을의 그런 곤란한 처지를 이용하는 측면이 크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곤란한 지경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부하직원이라는 이유로 당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적극적 대응이나 순응을 넘어서는 현실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상사의 갑질은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하급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일'이다. 상사의 갑질은 반드시 지위의 차이가 있어야 가능하며 조직의 위계질서가 그 지위의 차이를 만든다. 결국 상사는 위계질서라는 '현실'을 뒷배로 삼아서 갑질을 한다. 그렇다면 을도 현실에 맞는 대처 방안을 구상해야 한다. '현실에 맞는'이라는 표현은 피해를 최소화하되 맞은 만큼 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때는 내 손해를 줄여야 하고, 이 악물고 '존버'할 때는 나중에 그만큼 돌려받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대응이다.
상사의 갑질에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사들이 갑질을 하는 속내를 알아야 한다. 그 속을 알면 대응책을 세우기가 한결 편하다. 상사의 갑질은 지위로부터 주어진 권위를 극단적으로 휘두르는 행위이다. 권위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뜻에 따르도록 하는 권력이다. 권력은 힘이며, 힘을 쓸 때는 반드시 동기와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상사의 갑질에는 반드시 갑질을 실행하게 하는 동기와 목적이 있다. 상사가 막말을 하는 것은 단지 화가 나서가 아니며 부하직원의 의견을 묵살하고 불합리한 업무 진행을 강요하는 이유가 실적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권력을 휘두르는 행위의 배후에 숨겨진 동기와 목적에 따라 상사의 갑질은 통제지향형 갑질, 무례형 갑질, 사익추구형 갑질로 나눌 수 있다.
상사의 갑질 유형
통제지향형 갑질은 지위나 권위를 이용해 상황을 통제하고자 할 때 저지르기 쉽다. 통제지향형 갑질을 일삼는 상사들의 특징은 분노 표출이 잦다는 점이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서 분노의 감정은 승리, 복수, 자기 보호, 통제의 목적을 갖는다. 상사들의 정도를 넘어선 무분별한 분노의 표현은 이 네 가지 목적 중에 통제에 해당한다. 부하직원에게 막말을 퍼붓는 것으로 자신에게 통제의 권한이 있음을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분노는 저항을 부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수직적 위계질서에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쉽게 저항하지 못한다. 분노를 갑질에 활용하는 상사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람 대 사람으로 그렇게 화를 내다가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겠지만 자신의 지위가 그 저항을 막아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정도를 넘어선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분노의 표출을 일삼는 통제지향형 갑질은 그래서 지위를 이용한 갑질의 전형이다.
통제지향형 갑질이 항상 과격한 것만은 아니다. 보기에는 권위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통제지향형 갑질도 있다. 가장 흔한 것은 사내 행사나 회식 참여의 강요다. 사내 행사나 회식 참여를 '강요'한다는 것은 원래 참여 여부가 자유의사에 맡겨졌다는 얘기다. 처음부터 '전원 필참' 조건이었다면 상사들이 나서서 강요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상사 입장에서는 강요가 아니라 '독려'일 테고 자신의 권위를 적절히 사용했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상사의 지위가 주는 위압감으로 인해 부하직원들은 강요로 느끼기 쉽다. 이렇게 상사가 굳이 나서서 참여를 강요하는 것은 직원들이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부서 회식을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불참자가 많아지는 것은 상사의 입장에서는 통제권을 잃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내 행사나 회식에 참여를 강요하는 것은 직원들에 대한 통제권이 상사인 본인에게 있음을 선포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무례형 갑질은 글자 그대로 사람 사이의 기본 예절을 무시하는 갑질이다. 무례는 오만에서 온다. 오만이라는 감정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했을 때 갖는 감정이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상사는 자기가 가진 가치관이나 신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하직원의 개인 영역에도 서슴없이 침범한다. 부하직원의 옷차림, 말투, 태도, 심지어는 식습관, 화장 따위를 훈계하는 것도 모자라 삶의 방식이나 주관까지도 간섭하려 드는 꼰대 상사들이 무례형 갑질의 실행자다. 물론 본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갑질인지 모른다. 자신은 부하직원보다 훨씬 나은 사람의 입장에서 복된 충고와 조언을 해주는 것뿐이다.
자신의 지위를 과대평가했을 때도 무례를 범하게 된다. 조직에서의 지위는 어디까지나 그 조직 안에서만 유효하다. 그런데 지위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게 되면 조직 안에서만 정당성을 갖는 자신의 지위를 조직 바깥에서도 유효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퇴근한 지 한참 된 직원에게 굳이 전화를 걸어서 업무를 확인하고 지시하는 무례를 범한다. 당연히 당사자는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우월한 지위는 퇴근 후 개인 생활의 영역으로 돌아간 부하직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상사에게 부하직원의 사생활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닌 것이다.
무례가 반드시 오만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대신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무례해질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행위가 부하직원을 하대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이름 대신 '야', '어이', '거기'라고 부르거나 인신공격, 욕설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행위도 무례형 갑질에 속한다. 당사자는 '친해서 그런 것'이라고 변명을 하겠지만 거짓말이다. 마주 보고 서로 욕을 할 수 있어야 친한 것이지 한쪽만 일방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갑질이다. 이런 행동은 자신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한때 문제가 되었던,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을 '열정 페이' 같은 불법적인 대우나 불합리한 처우도 인간에 대한 무례에서 온다. 특히 이런 갑질은 주로 직장 생활 경험이 적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비열함의 정도가 크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신입이라고 근로계약서 대충 작성하고, 경력이 적다고 입사할 때 약속했던 업무가 아닌 허드렛일이나 시키는 것은 사람을 얕잡아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당사자들은 업계 관행, 회사의 특수성 따위를 말하겠지만 그래 봤자 갑질이다.
사익추구형 갑질은 상사가 본인의 이익을 위해 부하직원을 이용하는 행위다. 상사의 여러 갑질 중에서 가장 치사할 뿐만 아니라 갑질을 당하는 부하직원의 상처도 무척 크다. 이 갑질은 직장생활에서 의외로 자주 목격된다. 해야 할 일을 부하직원에게 떠밀기, 부하직원의 실적 빼앗기, 책임을 부하직원에게 전가하기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익추구형 갑질의 동기는 아주 단순하다. 그저 상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위를 남용하는 것뿐이다. 사익추구형 갑질은 업무 이외의 분야에서 더욱 치졸해진다. 부하직원에게 개인의 일을 맡긴다던가 심부름을 시킨다던가 하는 일은 갑질 중에서도 최악이다. 실제로 몇몇 대기업 총수 집안이나 임원들의 갑질이 사회의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그래서 시선이 아주 높으신 분들에게 쏠려 있지만 실제로는 고만고만한 직급에서도 사익추구형 갑질은 횡횡한다. 부하직원에게 담배나 커피를 사 오라고 시키거나 세탁소에 옷을 찾아오라고 시키는 것도 규모만 다를 뿐 엄연한 갑질이다.
현실의 대처 방안
이렇듯 상사의 갑질은 지위를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부하직원은 쉽게 대응을 하지 못한다. 어쨌든 상사는 부하직원의 밥그릇을 쥐고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면 위험과 손해를 감수할 마음을 먹어야 한다. 막말을 들이받으려면 퇴사를 각오해야 하고 부당한 지시를 거절하려면 치졸한 보복을 각오해야 한다. 상사의 말을 무시하면 버릇없는 사람이라는 오명이 따라붙을 수 있고, 상사와 거리를 두면 눈 밖에 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진퇴양난이다. 결국 상사의 갑질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간접적으로 공세를 펼치는 거나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현실적일 수도 있다.
분노를 통해 통제지향형 갑질을 하는 상사들을 대할 때는 일단 입을 닫아야 한다. 그들은 통제에 대한 욕구가 있으므로 부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통제에 대한 그들의 불안을 더 자극하게 된다. 그러면 더 큰 분노를 불러올 수 있고 일이 더 커진다. 일단 더 큰 상처를 받는 일은 피해야 한다. 피해는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이다. 대신 그렇게 당한 것을 꼼꼼하고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분노를 느낀 상황을 다시 반추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다. 만약 습관적으로 폭언을 일삼는 상사가 있다면 대화를 시작할 때 스마트폰의 녹음 버튼을 눌러두는 것도 방법이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 기록들이 무기가 될 수 있다.
무례형 갑질과 사익추구형 갑질을 당했을 때도 맞대응은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작은 갑질에 책임을 물어 초반에 기세를 꺾어버리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작은 일일수록 갑질의 당사자가 져야 하는 책임도 작다. 결국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해야 한다면 뒤탈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맞대응을 보류한다면 일단은 갑질의 내용을 세세하게 작성해 두어야 한다. 갑질과 관련된 이메일이나 SNS 메시지 같은 것도 철저히 보존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갑질하는 상사와의 전화 통화를 녹음하는 버릇을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또, 마음의 상처로 괴롭다면 병원 진료를 받거나 전문가와 상담을 해야 한다. 상처는 폭력의 결과다. 맞은 사람이 부끄러워하거나 숨길 일이 아니다. 진단서나 진료확인서, 상담확인서 정도는 큰돈 들이지 않아도 마련할 수 있다. 언제가 될 모르지만 제대로 '항거' 하기 위해서 꼭 챙겨두어야 한다. 낮은 지위에 있는 힘없는 하급자의 입장에서 '사실'만큼 든든한 지원군은 없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증거가 많다고 해도 혼자만의 힘으로 진실을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를 대비해 자신이 당한 갑질은 주변에 알려야 한다. 갑질을 일삼는 상사들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뒷담화를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비열함에 저열함으로 대응하면 진흙탕 싸움이 되고 사람들의 관심은 도리어 진실에서 멀어진다. 친한 동료에게, 마음 맞는 선배 직원에게 고민처럼 털어놓는 정도면 충분하다. 갑질의 피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공론화가 되기도 쉽고 피해자의 입장이 더욱 선명해진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골탕 먹이거나 괴롭히려는 목적이 아니다. 더구나 부하직원이라는 이유로 상사의 갑질에 무방비로 얻어맞고만 있을 수는 없다. '결전의 그날'이 도래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결국은 웃는 낯으로 퇴사를 할 수도 있고 노동청 앞에서 발걸음을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예정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도저히 피할 수 없을 상황을 처음부터 가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하도록 사람을 몰아붙인 갑질 상사들에게 책임을 물을 일이다. 용서와 복수는 서로 반대되는 말이지만 그 결정의 몫이 오직 피해자에게 있다는 점은 같다. 누구도 갑질의 피해자들에게서 그 권리를 빼앗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