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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Jan 28. 2020

무엇이 직업의 귀천을 구분 짓는가

"노동에는 귀천이 없지만 직업에는 귀천이 있지요." 

예전에 어느 동료 직원에게 들었던 말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이 옳다고 믿었던,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런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로만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잘난 척했을 뿐이었다. 사실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은 직업에서 서열을 찾고 그 서열에 맞춰서 사람의 층을 구분하는 일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와중에 폐부를 찔렸으니(뼈를 때려 맞았으니) 입을 다무는 것 말고 도리가 있었을까.


직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일에 종사하는 것을 말한다. '일하는 것'은 곧 '노동'을 뜻한다. 노동에 귀천이 없다면 일로 이루어진 직업에도 귀천이 없어야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실제 직업에 대한 인식은 단어의 구성 논리와는 별개로 흘러간다. 관련 설문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답한다. 적게는 50% 초반에서 많게는 60% 대까지 직업의 귀천을 인정한다는 응답이 나온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어야 한다는 윤리적 반박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위를 따질 일은 결코 아니다.


당장 눈 앞의 현실이 그렇다. 차를 운전하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대리운전기사와 카레이서는 직업인으로서 그 층위가 구별된다. 투잡으로 대리운전 알바를 뛰는 내 친구의 자동차 운전과 F1을 제패한 미하엘 슈마허의 자동차 운전은 같지 않다. 요리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어도 동네 식당의 주방장과 오성급 호텔의 셰프는 격이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도 아니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비정규직 문제도 결국은 층위의 문제다. 같은 종류와 성질의 노동을 하면서도 대우와 급여가 다르다면 둘의 직업은 구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차이를 귀하고 천함의 차이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업의 귀천을 가르는 잣대는 무엇일까?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인식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도덕 개념과는 별개로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심지어 우리 사회는 사회적 계급과 직업이 맞물려 돌아갔던 몇 백 년 이상의 시대를 겪어왔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사회적 인식은 결코 무시할 것이 못된다. 덕분에 비슷한 소득을 얻는다고 해도 직업에 따라 계층의 구별이 생긴다. 월급이 같다고 해서 직장인과 판검사를 동등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사회적 지위가 직업의 계층을 나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빠른 속도로 대체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직업에 따른 소득이다. 지금 세상은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이 좋은 직업으로 취급된다. 굳이 판검사, 의사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떤 차를 몰고, 어떤 동네에 살고,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지에 따라서 사회적 층위가 정해진다. 그런 것들을 구별 짓는 원천적인 것이 자본이며, 그 자본은 소득에서 나온다. 그러니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은 '좋은 직업'이 되고 소득에 따라 직업의 계급이 매겨지는 경향이 커진다. 부르디외는 문화 자본, 학력 자본이 계급을 구분 짓는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절의 프랑스 얘기일 뿐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회의 계층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구분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의 규모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경향이 매우 크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자본의 규모는 직업으로 결정된다. 결국 사회의 계층은 직업에 의해 구분되며, 직업 역시 결과물인 사회의 계층에 연동하여 우열과 귀천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덤이 있다. 직업의 귀천이 있다 보니 그 직업을 제공하는 직장에도 귀천이 생긴다. 더 많은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생각 같아서야 직업에 귀천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더없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날이 갈수록 직업의 귀천은 선명해지고 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직업은 없다' 같은 말도 이제는 고루한 옛말이 되었다. 특정한 형태의 노동이 여전히 필요할지 몰라도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필요 없어지는, 그렇게 직업이 사라지는 세상이다. 귀한 직업이나 천한 직업이나 그것만큼은 평등하다는 것 말고 위안을 얻을 길이 없다. 


물질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수록 사람들의 인식도 같은 방향으로 견고해진다. 그 물질의 규모와 질을 좌우하는 소득에 대한 집착과 욕망은 서슴없이 직업의 귀천을 구분 짓도록 만든다. 이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때가 올 것이라는 예감마저 든다. 아마 그때가 되면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던 노동 윤리가 소비 미학으로 변화하는 현상이 완성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암울하고 서글픈 예감이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는 알지 못하니 미리 불안해하는 것도 괜한 오지랖이겠지만, 비록 그렇게 되더라도 부디 사람에게 귀천이 있다는 말만 나오지 않았으면 하고 가만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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