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안 대고 코 풀기
세상에는 손 안 대고 코를 풀려는 얌체가 참 많다. 자신의 노력은 최소화하고 남의 노력에 얹혀서 이득을 보려는 부류의 얌체들 말이다. 흔히 '무임승차자', '프리라이더 Free Rider' 불리는 그들은 어느 때나 있었고 어디에나 있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을 뿐이지 선사시대에 집단 사냥을 할 때에도 아무 일도 않고 무리의 뒤쪽에서 몸을 사리다가 제 몫의 고기만 챙긴 조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일터도 사람이 모인 곳이라서 일정 비율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일터에 '프리라이더' 동료가 있냐는 설문조사에서 54.9%가 그렇다는 응답을 했다. 아르바이트생의 경우는 51.8%, 직장인들은 59.1%였다. 어딜 가나 얌체는 있다.
'무임승차'는 대가를 직접 지불하지 않고도 사용이 가능한 공공재를 무분별하게 사용해서 발생하는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이것이 조직 내 기여도와 그에 따른 이익 분배를 설명하는 데까지 쓰이면서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자기 숟가락만 얹어놓고 밥 먹을 준비하는 이들은 무임승차자라고 부른다. 무임승차의 사례는 생활에서 워낙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반인의 경우 조별과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점수를 따내는 대학생,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만 빼먹는 직장인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무임승차자는 쉽게 찾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수가 많은 것은 아니다. 맛을 들인 사람 몇몇이 반복해서 무임승차를 반복한다고 보는 게 맞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염치없고 부끄러워서라도 무임승차는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평균적인 양심과 의식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무임승차자가 밉기도 하겠거니와, 그들의 행동과 태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합리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도덕적, 사회적 규범을 어기면서까지 그렇게까지 구는 것은 용납 이전에 공감도, 이해도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그들은 속내는 어떻게 된 것일까?
도덕적 위반 vs 착취적 의도
뉴욕 스토니브룩 대학교 교수이자 행동경제학자인 앤드류 델튼 Andrew Delton은 조직 내의 무임승차자들을 가리켜 '집단의 과제에 기여하지 않으면서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앤드류 델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무임승차 여부를 판단할 때 '도덕적 위반' 보다는 '착취적 의도'를 더 크게 본다고 한다. 다시 말해 도덕적, 윤리적 잣대보다 행위 당사자가 혜택을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기여를 얼마나 '착취'하는가로 무임승차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는 규범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한 반감보다 무언가를 빼앗기는 불쾌감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능력이 부족하거나, 기회가 없거나, 과제가 달성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거나 해서 기여를 하지 못한 사람에게 무임승차자라고는 하는 경우는 드물다. 적어도 기여하려는 노력이 엿보인 이상 기여하지 못한 결과만을 두고 얌체로 몰아가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착취의 의도가 보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다른 이들의 기여를 착취한다는 것은 함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을 최소화하는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무임승차자는 스스로의 노력 없이 다른 이들의 노력과 기여를 착취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행동을 뻔뻔하게 한다는 점이다. 무임승차자들은 보통 사람들은 양심이나 규범뿐만 아니라 남의눈을 의식해서라도 쉽사리 하지 않는 얌체짓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한다. 프로젝트에 이름만 올려놓고 관련 업무는 이리저리 남에게 미루다 일이 끝나면 기여한 사람 명단에 자리 잡고 있는 직원, 동료 직원이나 부하직원이 야근까지 해가면서 만든 기획서에 자기 이름을 넣는 상사의 뻔뻔함은 절대 이해불가다.
뻔뻔함의 근원
사람은 규범을 어기거나 양심에 엇나간 일을 하면 수치심을 느끼게 마련이다. 수치심은 자신을 선량하고 도덕적이며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수치심은 불쾌한 감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불쾌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무임승차자들도 수치심을 느낀다. 비슷한 사회 환경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 특별히 다를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은 수치심을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 보통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
무임승차자들은 자신을 선량하고 도덕적이며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정당한 것으로 둔갑시킨다. 그 둔갑술에는 그럴듯한 처세술과 약삭빠른 논리가 적용된다. 노력을 적게 들이고 이득을 많이 얻는 것이 합리적이고, 세상은 이기주의에 의해 돌아가며, 강한 자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자가 강한 것이고,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뻔뻔함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으로 무임승차는 과대 포장된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곤란한 얘기들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반박도 어렵다. 상사든 동료든 좋지 않은 얘기를 면전에서 하는 것도 부담이라 기껏해야 "그래, 그렇게 뻔뻔하게 잘 살아봐라." 정도의 비아냥거림이 고작이다.
무임승차자들이 들이대는 하찮은 논리가 전부는 아니다. 그들이 같잖은 논리로 덮고 싶어 하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얻을 이익이다. 그들이 실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의 원리 따위가 아니라 이익이다. 그 이익을 위해 뻔뻔함을 처세술로 포장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익은 무임승차자뿐만 아니라 모든 직장인에게 중요하다. 다만 그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다. 보통 직장인들은 이익을 얻기 위해 기여를 한다. 그 이익의 형태가 월급이든 보너스든 인센티브든 상관없다. 조직의 공동 과제 수행에 기여함으로써 정당하게 이익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무임승차자들은 이익을 얻고 싶을 뿐 기여에 따른 노력은 하기 싫어한다. 이익을 얻고 싶은데 일은 하기 싫으니 남의 것을 빼앗아 먹고사는 선택을 한 것이다. 결국 무임승차자들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이익을 얻기 위해 남의 노력을 착취하는 질 낮은 이기주의이다.
무임승차를 위한 환경
이런 무임승차자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환경 덕분이다. 아무리 무임승차의 열망이 솟구친다고 해도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주어지는 환경이라야 무임승차자가 공짜 버스를 탈 수 있다. 첫째는 무임승차를 해서 얻는 이익이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손해보다 커야 한다. 부하직원이 올린 기획서에 자기 이름을 슬쩍 올려서 보고한 상사에 대해 직원들이 들고일어나거나 임원쯤 되는 더 높은 상사가 페널티를 물리거나 하는 환경에서는 무임승차가 어렵다. 하지만 적당히 눈치를 보거나 뻔뻔한 태도로 넘어갈 수 있는 환경이라면 해볼 만한 장사가 된다.
둘째는 무임승차가 가능한 시스템 안에 있어야 한다. 업무 분장이 불분명하거나, 업무의 책임 소재가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거나, 성과 평가의 룰이 명확하지 못한다면 무임승차자가 나타날 확률이 높아진다. 시스템에 허점이 많을수록 책임을 남에게 미루기도 쉽고 적당한 편법으로 이익을 따내기가 쉬운 것이다. 만약 업무 분장이 칼 같이 되어있고 책임 소재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으며 기여도나 성과가 더없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평가된다면 아무리 뻔뻔하다고 해도 쉽게 무임승차를 감행할 수는 없다.
원인을 알면 문제의 절반은 푼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쉽게도, 직장 내의 무임승차자 문제는 쉽게 풀 수가 없다. 업무라는 것은 시스템만으로 완벽하게 통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업무마다 완벽한 시스템이 존재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 무임승차자의 출현은 피할 수가 없다. 무임승차자의 이기주의는 시스템의 불완전성 앞에서 무임승차 실현의 욕망에 불을 지핀다. 결국 돌고 돌아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무임승차자를 막겠다며 시스템에 조건을 더 해가다 보면 오히려 시스템 자체가 엉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임승차자에 대해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치는 별 게 없다. 발견하는 즉시 직원들로부터 격리시키고 나타나는 즉시 조직 내에서 제거해야 한다. 일이 터진 후에서 할 수 있는 조치라는 점에서 아쉽긴 하지만 그것만이라도 빨리 해야 선량한 직원들의 기여가 덜 착취당한다. 직장 내 무임승차에 대한 옐로스 더글러스 Yellowlees Douglas라는 미국의 컨설턴트는 이렇게 조언한다. "가능한 한 빨리 발견하고 같이 일하지 말라. 안 되면 다른 팀에라도 떠넘겨라."
해충을 완전히 박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눈 앞의 벌레를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손을 대기는 흉물스러우니 나타나는 족족 잡지를 둘둘 말아서 세게 내리치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변은 금방 벌레 소굴이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