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 찬가
저는 점심메뉴를 고민하지 않는 편인데요, 뭔가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생각나지 않는 이상 그날의 점심메뉴는 국밥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좋아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봅니다.
제가 자주 먹는 국밥은 부산에서 살다 보니 아무래도 돼지국밥입니다만, 그렇다고 돼지국밥만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주말이면 40년을 이어왔다는 소고기국밥 집에서 이만원어치 정도의 국밥을 포장해 온 다음, 주말 내내 소고기국밥만 먹는 것은 꽤 오랫동안 이어져온 집안의 관례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을 땐 순대국밥도 종종 먹었습니다. 지금은 순대전골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요.
물론 제가 국밥을 좋아한다고 해서 '국밥은 이렇게 먹는 게 제대로 먹는 거지!'와 같은 근거 없는 이론을 늘어놓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국밥의 매력은 언제 어디서라도 일정한 수준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안정감, 어지간한 고급식당이 아닌 이상 만원을 넘지는 않는 합리적인 가격 등에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국밥은 '그냥' 좋아한다는 이유 정도면 더 이상 입을 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국밥이 그냥 좋습니다.
따로국밥
어찌 되었던 제가 국밥을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습니다만, 최근 들어 국밥을 먹으며 제가 경험한 것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건 '굳이' 따로국밥을 주문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생각해보면 저는 그동안 국밥을 주문하며 일부러 따로국밥을 주문했던 적은 없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마침 그날따라 비도 오고, 점심시간은 교대근무를 하고 있는지라 혼자서 찾아간 국밥집이었기에 주문한 국밥을 기다리는 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면 눈을 감는 버릇이 있어, 남들이 보면 너무 피곤해 보였거나 사뭇 진지한 고민에 빠져있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고민은 대단할 게 없었습니다.
나는 왜 따로국밥을 주문하였을까?
평소였다면 '그냥', '내켜서'라는 대답이면 충분했을 이 질문은, 이날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따로국밥은 보통의 국밥보다 천 원 정도 더 비싸다는 것도 특이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나오는 반찬의 양은 비슷할 텐데, 단순히 공깃밥의 양 차이인 것인지, 그것도 궁금해졌지만,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조금은 엉뚱한 곳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국밥스럽게 먹는다는 것
제가 따로국밥을 찾게 된 것은 몸의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예전처럼 따뜻한 국물에 잘 담긴 밥과 국물, 그리고 돼지를 숟가락 가득 담아 한 입에 넣어먹는 것은 지금의 제 소화능력으론 버거워졌습니다. 그리고 국밥은 토렴을 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뜨거운 음식이기에, 한 입가득 담긴 국밥은 입 안에서 충분히 씹은 뒤 삼키기보단 입에 넣는 대로 얼마 씹지 않고 삼켜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먹는 게 국밥을 제대로 먹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국밥과 함께 잘 익혀진 김치나 깍두기가 있다면 그 외의 반찬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만약 퇴근길에 들른 국밥집이었다면 소주를 한 잔 마시는 것도 좋았겠지요.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먹는 것이 제겐 힘든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소위 '국밥스럽게' 허겁지겁 국밥을 먹은 날이면 배가 불편해 오후 내내 속이 좋지 않았던 적이 조금씩 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은행원이 창구를 비워둘 수도 없는 법이라 속이 불편해지는 것은 가급적이면 피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공깃밥 없이 국물만 조금 마시거나 고기와 밥을 따로 먹을 수 있는 따로국밥을 찾게 된 것이겠지요.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고 나니 왠지 좀 씁쓸해지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나이 듦의 시작
저보다 연륜이 깊은 분들께는 31살밖에 안된 사람이 무슨 나이 듦을 이야기하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요즘 들어 전 예전과 똑같이 생활했을 때 몸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경험하는 횟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아무리 피곤해도 잠들기 전 휴대폰을 보더라도 중간에 잠드는 경우는 없었는데, 요즘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다가 저도 모르는 새 잠이 들어 얼굴에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마치 제가 어린 시절 거실에서 tv를 보시던 부모님께서 tv를 끄지 못한 채 잠들어 계셨던 모습을 보는 것 같은데요, 아직은 이런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결국 저도 점점 변화에 익숙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은 바로 그런 '나이 듦'의 출발선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런 변화에 대해 슬프게만 생각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분명 숟가락 가득 담아먹는 섞어국밥은 매력적이지만, 따로국밥을 먹게 되면서 알게 된 좋은 점도 있으니까요. 공깃밥을 적게 먹는 대신 국밥 본연의 구수함과 고기의 맛, 그리고 양파와 마늘을 곁들여 먹는 것도 국밥을 맛있게 먹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은 제가 따로국밥을 먹으면서 알게 된 기쁨 중 하나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처음엔 씁쓸함이 먼저 찾아오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든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방법도 하나씩 배우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비로소 즐길 수 있는 경험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의 작은 바람은 이처럼 나이가 들면서 배워나갈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충분히 경험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인데요, 나이가 들어가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면, 그 또한 인생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채워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이듦에 대해서 생각할 계기가 되어준 국밥에게 감사하며, 조만간 국밥이나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물론 그 국밥은 '따로'국밥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