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턴 대리라는데
매일 주어지는 하루는 사람의 인생에 있어 한 번밖에 경험하지 못할 소중한 순간이긴 합니다만, 그런 나날들 속에서도 몇 가지 사건이 더해지면 특별함이 더해지는 날들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에겐 오늘이 그런 날이 될 수 있겠는데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저는 수습행원의 신분에서 벗어나 내일부턴 대리가 됩니다.
사실 제가 속한 은행에서 대리가 된다는 것은 승진의 개념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월급이 오르거나 하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6개월의 수습기간을 큰 사고 없이, 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진퇴사를 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힘들었던 순간으로 기억하는 이 시기를 보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고생했다'는 말 정도는 해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짧다면 짧은 6개월이었지만, 그래도 그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확신에 가깝게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역시 일보단 사람이 힘들고, 반대로 사람들 덕분에 힘든 일도 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역시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관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27년 차 은행원, 지점장님
보통 지점장님은 부지점장님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편인데, 오늘은 부지점장님이 외근을 나가셔서 제가 지점장님과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는 업무로 지점장님을 만날 일이 아직은 없다 보니, 아직까지는 이런 식사자리가 부담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동안 지점장님과의 식사자리에서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 중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만, 오늘은 사뭇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지점장님은 앞으로 은행이 어떻게 바뀔지는 자기도 예측할 수 없지만, 국책은행이라 해서 구조조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이 신입행원에 가까울 무렵이었던 97년, imf 당시 이 은행에서도 수천 명의 은행원들이 구조조정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은행에서 근무하다 보면 어느샌가 안정감에 젖어들 때가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 보면 어떤 위기가 찾아올지 모른다. 어떤 것이든 좋으니 매뉴얼과 규정대로 처리하는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지점장님 표현에 따르면 앞만 보고 질주하는 경주마가 되지 말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통해 꾸준히 실력을 쌓길 바란다는 것이 말씀의 요지였습니다.
덧붙여 말씀하시길 50대가 되고 나니 어떤 걸 하더라도 재미가 없다면서, 젊을 때 가급적 즐겁게 해볼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경험해보며 즐겁게 사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는데요, 점심때 이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는 그냥저냥 한 이야기로 들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퇴근을 하고 와서 다시 이야기를 곱씹어보니 어쩌면 이 이야기에 대해 제가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에 따라 저의 미래가 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은 기간 9년 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본 적은 없지만, 사실 저는 은행에 합격했을 때부터 다짐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0년 뒤에는 언제든 퇴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입니다. 더 솔직하게는 '10년 뒤에는'이 아닌 '10년 안에는'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최근 주목받고 있는 파이어족이라는 개념과도 유사해 보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개념은 파이어족과는 조금 다릅니다.
파이어족이 근로, 투자활동을 통해 노후를 대비하기에 충분한 자산을 모아 최소한의 근로생활, 혹은 투자를 통해 그동안 모아둔 돈을 가지고 자유로이 살아가는 이들을 말한다면, 제가 생각하는 목표는 '언제 어디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물론 저의 목표는 파이어족을 추구하는 분들과도 직장에 묶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전문 자격증을 취득해 자격증을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이 되는 것도 방법 중 하나일 텐데요, 하지만 2021년을 살고 있는 지금 세상에서도 전문 자격증만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전문가분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만으로 저의 목표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제가 어떤 콘텐츠의 창작자가 되어 제가 창작해낸 콘텐츠가 저의 자산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있겠습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팔릴 수 있는 무언가'를 창작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방법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운이 좋게도 저는 가족 중에 웹소설 작가가 있어 이러한 목표 또한 전혀 불가능한 길은 아니라는 것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요
전 둘다입니다
현재 저는 목표인 10년 내 자유로이 퇴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위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이스크림을 고를 때도 한 종류만 고르면 왠지 아쉬웠으니까요, 오늘은 제 인생에서 제가 가장 젊은 날이라는 생각을 하며 저는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두 가지를 다 이루어보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시험공부를 하고, 저만이 창작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해 고민하며, 저에게 월급을 주는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 생각해보니 제가 해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였네요, 어쩌면 저는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사냥꾼이 될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저는 이 어려운 길을 기분 좋게 걸어가 보고자 합니다.
이유는 단순한데요, 이렇게 해야 미래의 저 자신에게 있어 결과와 무관하게 가장 만족스러운 선택이 될 것이라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마음에 생겼기 때문입니다. 다 실패해도 좋으니, 괜히 생각만 이리저리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결과만은 피할 것! 그래서 전 다소 무리처럼 보일지라도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이제 수습기간이 끝난 신입행원이 퇴사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제 선택, 제가 살아갈 인생의 길은 그 누구도 아닌 제가 정하는 것이니까요.
한 번 열심히 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