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4일은 특이한 하루였습니다. 어느 때처럼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런치타임이 조금 남아 회사 주변의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던 차에, 문득 '남은 학자금을 다 갚아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이 들고 나서 한국장학재단 어플을 실행해보니, 제가 상환해야 할 대출금은 약 414만원 정도가 남아있었습니다. 대출을 받을 때는 여러 가지 서류를 제출해야 했던 기억이 남아있었지만, 대출금을 상환하는 것은 매우 간편한 절차로 진행되었습니다. 상환하기 버튼을 누르고, 상환할 금액과 출금할 계좌를 적고 공인인증서 로그인을 하고 나니, 잠시 뒤 한국장학재단에선 대출금 상환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었습니다.
10분이나 걸렸을까요, 제가 10년 넘게 가지고 있었던 빚은 그 기간이 무색할 만큼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시원섭섭한 기분과 함께 저를 감싸는 이유모를 후련한 기분이 드는 것은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대출할 수 있었기에
이날은 왠지 스스로에게 격려와 축하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선반에 두었던 와인을 꺼내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한잔 두 잔, 술이 한 모금 두 모금 몸에 들어오며 기분이 조금 상기된 탓일까요, 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러 가지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학자금 대출을 받았던 것은 2010년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가 배우고 싶었던 학과에 지원해버린 탓에 차마 등록금을 지원해달라고 할 수가 없었기에 받았던 학자금이 제 인생에 있어 처음 있었던 대출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1학기 만에 그 학과를 자퇴하고, 다시 수능시험을 준비했었습니다.
운이 좋았기에 원하는 학과에 다시 입학할 수 있었고, 더욱 다행이었던 것은 그 당시 막 시행되었던 국가장학금이라는 제도 덕분에 등록금은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등록금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들, 대학생이 학교를 다니기 위해선 일정 수준의 돈이 필요하다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저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여느 대학생들처럼 아르바이트를 해 용돈을 벌어가며 학교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생활비 대출을 받아서 그 돈을 쓰며 학교생활을 할 것인가가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지였습니다. 물론 부모님께 소정의 용돈을 받는다는 것도 생각해볼 수는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저는 성인이 되었으니 부모님께 더 이상 무언가를 부탁하고 싶지 않다는 고집이 강했었습니다. 아마 저 때문에 부모님이 더 불편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고민 끝에 저는 생활비 대출을 받는다는 것을 선택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선택은 썩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1학기에 150만 원의 생활비 대출금은 제게는 학교에서 생활하는 데 있어 딱 적당한 돈이었으니까요. 물론 큰돈은 아니었기에, 이 돈만으로는 대학생이 경험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해보는 데는 부족함이 있었지만, 도서관에 가고, 끼니때가 되면 학생식당에서 큰 고민 없이 밥을 먹을 수는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이때 받았던 생활비 대출금 덕분에 과외를 통해 벌었던 돈을 모을 수 있어서 졸업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었으니, 역시 저는 생활비 대출금이 있었기에 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근한 걱정거리
당연한 소리지만 1,500만 원 가까운 빚이 있다는 것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이런 빚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싶어도 연말이면 국세청에서 '학자금 대출 채무자 신고'를 하라고 끝도 없이 연락을 주기 때문에, 저는 빚 덕분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만 동시에 빚은 저의 고민거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25살 때부터 직장생활을 했었기에 처음에는 월급을 받으면 빚을 가장 먼저 갚아버릴까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었습니다. 빚을 갚게 되면 사회 초년생으로서 목돈을 모으는 시기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걱정거리가 많은 저의 입장에선 언젠가 큰돈이 필요한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도 했었습니다. 갑자기 가족이 아프다거나, 내가 몰랐던 문제가 생겨 큰돈이 필요한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불필요한 고민거리였지만, 그리 높지 않은 이자율 때문인지 저는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는 것보단 그냥 조금씩 여윳돈이 생길 때 대출금을 갚아나가는 방식을 선택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제가 갚아야 할 원금에서 2백만원에 가까운 이자를 추가로 갚아야 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저는 몇 년 전부터 학자금을 상환할 수 있는 정도의 저축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이유와 더불어,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학자금 대출을 갚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들을 정리해보면 결국 학자금 대출을 갚는데 큰돈을 쓰고 나면 마음에 여유가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염두하며 제가 11월 4일 점심때 갑자기 남은 학자금을 상환해버린 것은, 어쩌면 이제는 저도 어느 정도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과거 20대의 제가 살아가는데 필요했었던 한 부분이었기도 한 학자금 대출이라는 과제를 마무리 짓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듭니다. 어찌 되었건, 제 나름대로는 하나의 과제가 끝난 것 같아 후련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 때는 생활비 대출이 없으면 혼자 힘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꽤 우울해졌던 날도 있었지만, 지나고 나서 다시 돌이켜보면 이러한 상황에 스스로를 던져놓았었기에 조금 더 게을러지고 싶은 상황을 한번, 두 번씩 참아가며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갔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앞으로 제가 살아가야 하는 삶도 이와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제가 20대 시절 학자금 대출을 받았던 것처럼, 30대의 제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다소간의 부담과 빚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지요, 그리고 그 빚을 발판 삼아 제가 목표한 바를 이룬 뒤, 11월 4일 점심시간 때와 같이 저를 도와주었던 그 빚을 말끔히 상환해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일까요, 11월 4일의 그날은 유독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생각이 참 많이도 들었던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