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노팅힐을 다시 보고 난 뒤
영화 좋아하시나요? 저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몇 가지 영화는 이미 몇 번이나 봤는데도 종종 생각이 나서 그럴 때마다 반복해서 보기도 하는데요, 가령 [비포 선라이즈], [러브 어페어], [매그놀리아], [터미널] 같은 영화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 소재로 선택한 이 [노팅힐]역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이제는 꽤 오래된 영화라 그런지 이 영화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 듯한데요, 그래도 좋은 영화인만큼 저는 기회가 닿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노팅힐을 감상하는 걸 추천하곤 합니다.
많은 분들이 보신 영화인만큼, 노팅힐에 대한 감상평은 다양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연으로 활약한 두 배우가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줄 시기였기도 한 데다,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제 친구들만 하더라도, 영국 여행을 가면 노팅힐의 촬영 장소를 가보는 것을 관광코스에 넣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그만큼 노팅힐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인상을 남긴 좋은 영화입니다.
저도 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영화 속 어떤 장면에서 감명받았는지를 개인 블로그에 글도 적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제가 노팅힐이라는 영화에서 가장 감명받았고,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들과의 대화' 장면입니다.
너무 평범한 장면이라 기억하지 못하는 분도 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이 장면은 주인공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상황인데요, 이때 서로가 주고받는 대화가 참 인상적입니다. 많은 대화를 주고받지만, 그 대화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거든요, 그건 바로 '솔직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인 휴 그랜트의 친구들은 사실 대단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한 사람, 직장에서 해고당한 사람, 그리고 현실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의 친구들이니까요.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그리 불편해하거나 숨기려는 기색을 보이진 않습니다.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나선 식탁에 놓인 음식을 먹을 뿐입니다.
저에겐 왜 이 장면이 그렇게나 감명 깊었을까요? 고백하자면 제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영화 속 인문들이 너무나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해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가진 속마음과 진짜 생각을 남들 앞에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들이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싫어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사실을 말하더라도 언제나 조금 더 과장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저의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해 이 교류관계가 이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도 이런 저의 과거 생각들을 글로 옮겨 적는 것이 여전히 부끄럽습니다. 하물며 본인인 저도 그런데, 이런 거짓과 가식이 버무려진 제 말과 행동을 보고 듣는 상대방은 얼마나 제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을까요? 그러고 보니 과거의 저는 상대의 눈을 마주 보며 대화하는 것을 잘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미 말에 거짓과 과장이 들어가다 보니 상대의 눈을 마주 보면 이 사실이 탄로 날까 봐 스스로 감추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상대의 눈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였기 때문에, 저는 영화 속 평범한 친구들의 대화 장면을 인상 깊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나 지금 백수야!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랐습니다. 아무리 제가 영화를 보고 솔직해지겠다고 다짐을 하더라도, 이걸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당장 퇴사를 하고 나니,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걱정이었습니다. '잘 지내?'는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예전처럼 괜히 대단한 것이라도 준비하는 것처럼 가식적으로 행동하고 말 것인지, 아니면 부끄럽더라도 솔직하게 말할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퇴사하고 얼마 뒤, 저는 친한 친구들과 약속이 잡혔습니다. 그중에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도 있었고, 인원도 적지 않았던지라 참석 자체에 대한 고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걸 계속해서 숨겨질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저는 약속 장소에 나갔고, 그냥 눈을 꾹 감고 먼저 이야기해버렸습니다.
"다들 안녕! 나 지금 백수야, 하고 싶은 게 생겨서 지금은 백수로 살아야 할 것 같더라고,
그래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나중에 물어보니 제 얼굴이 엄청 달아올랐다고 하더라고요. 하긴 지금까지도 저 대사를 잊어먹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제 딴에는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은 맞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어땠을까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들 덤덤하게 "아 그러냐, 잘해봐라"가 대답의 전부였네요. 왠지 저 혼자 난리 친 것 같았습니다.
곧이어 건배가 이어졌고, 저의 퇴사는 다른 친구의 28년 만의 첫 연애 이야기에 완전히 묻혔습니다. 나중에야 몇 명의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사실 네가 퇴사한 것에 대해서 본인이 제일 많이 고민했을 텐데 우리가 뭐 딱히 보태줄 말이 있겠냐는 건조함 그 자체의 대답이 전부였습니다. 자꾸 이런 무미건조한 반응만 듣고 있으니 차라리 4차 산업을 이끌어갈 혁명가가 되겠다는 뻥이라도 칠 걸 그랬다는 치기 어린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우선은 제가 솔직하게 말을 했기 때문에 친구들도 그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지만, 다른 친구 역시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이걸 저한테만 말한다고 해서 이유를 물어보니, 제가 퇴사 사실을 자기들한테 솔직하게 말할 정도면 뭔가 준비가 잘 되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제게 솔직하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친구와 아주 솔직하게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의 솔직함이, 타인의 솔직함을 불러들여 진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 것입니다.
꾸미지 않고 그대로의 삶
이 사건은 제게도 큰 성장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날 이후부터는 저를 소개할 때 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사실을 부풀리거나 거짓말로 저를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퇴사 후 백수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현재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몇 번만 하고 나면 이 말을 하는 것이 그리 부끄럽지 않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제가 스스로를 포장하지 않게 된 이후로, 저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좋은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종종 제가 사는 집으로 놀러 와 같이 이야기하고 놀아주는 친구들이 늘었습니다. 저도 바쁘지 않을 때는 밤늦게까지 서로의 고민도 나누고 맥주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즐거운 소통의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백수는 외롭다고들 하는데 저는 이상하게 백수인 지금이 훨씬 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정해둔 원칙이 3가지가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바로 '있는 그대로, 내 생각을 쓰기'입니다. 나중에 혹시나 나의 삶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자신 있게 이 글을 읽으면 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제가 글을 쓸 때부터 거짓이나 과장 없이 저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좀 부끄러운 고백을 하게 될 때도 있지만 뭐 괜찮습니다. 그것도 제가 가진 모습 중 하나니까요. 자기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 그것은 바로 백수로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