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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근로하는 백수:
일 하나에 쌓이는 경험 하나

다양한 경험을 쌓을수록 인생은 풍부해진다.

by 이도

단조로운 인생에 자극을 준다

다채로운 경험이 현명한 선택을 돕는다




좁아지는 생각


예전에 읽은 소설에 나온 구절인데, 참 인상적이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친구였던 누군가의 말인데, 이 사람의 직업은 기업과 투자자를 연결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일종의 중개인입니다. 문제는 정말로 좋은 기업과 현명한 투자자만을 연결해주지 않는 데 있습니다. 투자자들에겐 기업의 가치에 대해서 부풀려 소개하고, 기업에겐 투자자를 소개할 때 사업이 성공할 때까지 자금을 공급해줄 수 있는 것처럼 양쪽에 이야기를 흘립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수수료를 받는 것이죠. 주인공은 이런 친구의 행동을 못마땅해하기에, 정직하게 일하기를 바라지만, 이 말을 들은 친구의 대답이 참 특이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한다면,
내가 그들에게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런 말은 전제부터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거짓된 행동에 대해 인지 하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우리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몇몇 철학자들은 이성에 근거한 준칙에 입각하여 행동하라든지, 보편타당한 도덕률에 따라 산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완벽한 사기는 사기당한 사람이 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따위의 이야기에 현혹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백수에게 근로할 것을 강조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아해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위의 이야기는 저를 포함해 백수로 사는 기간을 잘 꾸려나가는데 상당한 시사점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지를 끊임없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려주지 않고 혼자 힘으로 생각의 감옥에서 빠져나오기란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안락한 감옥


기본적으로 백수의 삶은 단조롭습니다. 많은 고민과 준비를 한 끝에 백수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회사나 학교를 다닐 때보단 한결 여유가 넘칩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기한 내에 작성해야 할 리포트도, 보고서도 없으니까요. 세상 밖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혼란스럽다는 뉴스가 나오지만, 매일 자발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는 내 삶엔 평안과 조용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생각을 거듭하게 됩니다. 또 궁금한 것들은 사람을 만나 직접 알아보거나 경험하는 일 없이, 인터넷을 통해 대부분 알아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원하는 정보를 획득하고 나면 다시 생각합니다. 이 과정이 몇 번 반복되고 나면 이제는 모르는 것도, 불안한 것도 없다는 기분이 듭니다. 혼자서 충분히 고민했고, 많은 정보를 참고해서 내린 결론이니 내 생각이 틀릴 리가 없다는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대체 왜 저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일단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왜냐면 저들은 외부활동으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처럼 오랜 기간 집에서 충분히 공을 들여 고민과 생각을 거듭할 리가 없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귀찮아집니다.


제가 조금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서 설명했지만, 백수로 살아가는 분들 중에는 위와 같이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반론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거부합니다. 이미 본인이 충분히 고민했고, 근거를 완벽하게 만들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의 감옥 안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것이 백수의 매력이라고 여기기엔 아쉽습니다. 저는 오히려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고, 그렇게 쌓인 경험이 백수생활을 끝낸 뒤의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례로서, 제가 존경하는 독일차 선배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생각나면 일단 한다


제가 독일차 선배를 존경하는 이유는 딱 하나인데요, 그것은 살면서 이 선배보다 행동력이 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선배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물어보거나 직접 알아봐서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니까요.


가령 이런 식입니다.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 나온 안주가 치킨이라면, 갑자기 왜 순살치킨에는 뼈가 없는지를 궁금해합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제조 과정에서 뼈를 제거했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지만, 이 선배는 일단 발동이 걸리면 순살치킨이 주로 브라질 닭으로 만들어지며, 뼈는 수작업으로 제거가 되고 품질의 측면에서 순살보다는 뼈가 있는 치킨이 더 낫다는 것을 바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죠.


일을 해보는 것에도 망설이는 법이 없습니다. 뉴스에서 배달 아르바이트가 인기라는 것을 보자마자 자기도 요즘 배달하시는 분들이 많이 보여서 궁금했다고, 그날 밤부터 배달 알바를 시작합니다. 딱 5시간 해보고 나니 이건 너무 위험하고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선배가 경험한 일들이 제가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택배 상하차, 마트 판매원, 타일 도배, 감자 농사, 크루즈선 승무원 등등 여러 개니까요.


사실 이 선배를 제가 독일차 선배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선배는 군대 가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스포츠카를 타고 드라이브하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그런 차를 살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았습니다. 주변에 차를 빌려줄 사람도 없었고요. 또 단기 렌트를 하려고 알아도 봤는데 20대 초반의 선배에게 고급 스포츠카를 렌트해주는 경우는 없었거나 너무 비싼 요금을 지불해야만 했었기에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선배, 결국 그 꿈을 이루어냅니다. 바로 모터쇼 아르바이트에 지원해 행사요원으로 뽑힌 뒤,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어떻게 사정을 구해서 모터쇼가 끝난 뒤 차를 정리할 때 한 3분 정도 운전해볼 기회를 얻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에 그 3분이라는 게 아마 주차 정도 해본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아무튼 선배는 그렇게라도 직접 시동이 걸린 자신이 꿈꾸던 차를 운전해봤다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제가 선배를 독일차선배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경험이 기회를 만든다


결국 이 선배는 모터쇼 이후로 자신이 꿈에 그리던 차는 아니지만, 그 회사의 독일차를 구매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사실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특출 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선배의 그 '생각난 것은 해본다'는 능력이 성공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배는 모르는 것이 많았지만,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려줄 누군가를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또 워낙 별의별 일을 경험하고 나니, 일을 잘하진 않더라도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게 자신이 사업을 하면서 실패하지 않았던 큰 이유였다고 제게 말해주기도 했었는데요, 저는 여기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제가 다양한 일을 해보게 된 이유도 사실 이 선배의 영향이 아주 컸습니다. 지금 하는 일도 저의 전공분야인 재무, 회계와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쌓아둔 지식과 경험은 새로운 일을 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 크고 작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자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양한 일을 경험할수록, 제가 또 다른 새로운 일을 하게 될 때는 예전에 경험했던 일을 토대로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일의 수준과 급여를 따지기보다는, 일을 해보는 경험 자체를 얻기 위해서라도 백수의 삶에 일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일단 일을 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정보가 삶에 입력되고, 이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단단한 생각들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새로 시작한 일이 기대했던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 실망감만 커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도 꽤 괜찮은 경험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다음에는 지금 경험한 그런 실패를 안 겪도록 더 잘하려고 노력할 것이니까요. 독일차 선배도 일단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바로 그만두더라고요. 그러다가 딱 '이거다' 싶은 일이 생기니까 그때부터는 모든 시간과 노력을 한 가지일에만 집중했는데, 저는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이것저것 전부 다 해봤기 때문에 더 이상 의심할 여기가 없어져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배울 점이 많은 선배입니다. 오늘 연락이나 드려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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