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백수로 살게 되면 꼭 지켜야 할 것들 몇 가지에 대해 스스로와 약속을 맺은 것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직접 만들어 먹기'였습니다. 제가 이런 규칙을 적한 이유는 직장에 다닐 때 야식으로 배달음식을 너무 많이 먹다 보니 살도 찌고 건강도 나빠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말고도 제게 자급자족의 동기부여를 심어준 것이 있다면, 아마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저의 결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봤었고, 영화를 볼 때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틀 포레스트]는 '사계절 자급자족'을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주인공이 시골에 내려가 살면서, 계절의 변화에 따라 계절에 걸맞은 음식을 직접 만들어먹는 것이 전부니까요. 하지만 이 단순한 줄거리 속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 인생을 살아오며 경험했던 방황과 고민, 그리고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입니다.
영화에선 이 부엌에서 요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이치코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하는 일은 다가올 계절에 대비해 조금 먼저 시간이 필요한 재료를 손질해 두거나, 혹은 계절에 어울리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나 요리의 재료가 될 동식물을 기르고 가꾸는 것 정도입니다. 우리도 아마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치코는 종종 실수를 하거나 모르는 것이 많아 가족이 남겨 둔 노트를 확인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서투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역시 맛있게 만들어진 요리를 이치코가 혼자서, 혹은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먹는 장면입니다.
가을엔 감을 말려 겨울에 먹을 간식을 만들기도 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나도 저렇게 자급자족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비단 건강만을 생각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한창 바쁠 때는 2주일 내내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으로만 세끼를 다 먹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때 놀라운 경험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건 아무리 다양한 종류의 도시락을 먹어도 맛이 다 똑같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배달음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매 번 주문할 때마다 나름대로는 색다른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활에 질려가던 차에 제가 본 [리틀 포레스트] 속 모습은 그야말로 사람이 계절에 맞게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직접 따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요리의 즐거움
살면서 김치찌개 한 번 끓여본 적 없는 제게 요리란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머니께 요리를 조금 더 열심히 배워둘껄하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처음엔 계란 프라이도 제대로 구워지지가 않아서 겉을 다 태워먹거나 노른자가 충분히 익지 않은 생태에서 젓가락으로 찔러보다 손등에 노른자가 튀어 화상을 입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인 '포기는 배추를 세는 단위일 뿐, 나에게 포기란 없다'는 마음가짐과 유튜브 속 훌륭한 요리사분들 덕분에 저의 요리실력은 조금씩이지만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요리를 시작하고 2주쯤 지났을 무렵, 제가 만들었던 김치찌개가 너무 맛있어서 국물까지 다 먹었다가 그다음 날 얼굴이 퉁퉁 부었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요리 실력이 늘기 시작하자 제게도 '레시피'라는 새로운 능력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친구가 저희 집에 자러 왔을 때 저는 일부러 아껴두었던 술을 꺼내 주며 실컷 마시라는 인심을 쓰기도 했습니다. 네가 웬일이냐며 신기해하며 제가 꺼내온 술을 잔뜩 마신 친구는 다음날 숙취로 얼굴이 반쪽이 되었습니다. 저의 계획대로입니다.
저는 미리 준비해둔 황태와 두부를 가지고 황태 해장국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계획은 술에 잔뜩 취한 친구가 제가 만든 황태 해장국을 먹었을 때 과연 숙취해소가 된다는 느낌을 받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국이 좀 싱겁다는 불필요한 말을 붙이긴 했지만, 그래도 속이 풀린다며 제 요리를 칭찬해주었습니다.
그 뒤로 지인들 사이에서 제가 요리를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해 온갖 지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인다고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평생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요리라는 것을 제가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즐거웠습니다. 요리하는 것에 재미가 붙기 시작하자 배달음식을 주문하지 않게 된 것도 좋았습니다.
생활의 변화
어느 대학의 광고노래처럼, 요리를 하면서부터 제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요리실력이 늘기 시작하자 이제는 재료 선택에도 점점 더 까다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마트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왔지만, 이제는 마트가 성에 차지 않으면 근처의 재래시장에 가서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재료를 구하려고 노력합니다.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가장 먼저 주문배달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 '어떤 재료가 필요한지'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가령 피자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면 우선 집에 식빵이 있었는지를 떠올린 뒤, 마트에 가서 피자치즈와 토마토소스를 사 와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토스트 빵으로 만드는 피자는 요리하기 쉬운 편이니까요.
처음엔 즉석으로 만들 수 있는 요리에만 관심이 생겼지만, 이제는 시간이 걸리는 음식에도 눈길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엔 마트에 가보니 절인 배추를 팔고 있길래 올해는 처음으로 김장도 해보려고 합니다. 어머니에게도 김장을 하겠다는 말을 하자 결혼할 사람 생겼냐는 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셔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어머니가 기뻐하시며 제대로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셔서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생강청이랑 레몬청을 담아두었던 것을 지인과 학교 다닐 적 많이 도와주셨던 교수님께 선물로 드리고 왔습니다. 제가 만든 청은 설탕을 넣지 않고 꿀을 넣어 만들었기에 꽤 건강식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반응이 괜찮았던 것을 떠올리니 역시 정을 나누는 데는 음식을 나눠먹는 것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이렇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요리 능력이 생긴다는 것 이외에도 건강한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외식과 배달 주문을 하지 않게 되면서 지출도 많이 줄일 수 있게 된다는 것도 큰 장점일 것입니다. 직접 요리하게 되면 재료 구매에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식품들의 경우엔 그리 비싸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집에서 작은 텃밭이라도 가꿔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상추와 콩나물이 재배하기 쉽다는 이야기를 들어 지금 열심히 기르고 있는 중입니다. 아파트 경비원님께 잘 말씀드리면 뒤편 공터를 어떻게 좀 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이건 아직까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요리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또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이다 보니 재료도 건강을 생각하며 고르게 되었습니다. 꽤 건강해진 기분이 듭니다.
우리가 노래방에서 자신의 애창곡을 연습해두는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도 몇 가지 만들 수 있게 된다면, 그것 만으로도 인생의 풍요로움은 예전보다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건강도 함께 따라올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