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동네 골목에서 남자아이들은 장난감 총을 들고 ‘탕탕!’ 하며 뛰어다녔고, 여자아이들은 고무줄을 하며 ‘하나, 둘, 셋!’ 노래를 불렀다. 그때는 몰랐다. 이 단순한 놀이가 인류의 오랜 남녀 구분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세월이 흘러, 남자들은 남자답게, 여자들은 여자답게 살아가라며 사회는 우리를 ‘시멘트’처럼 굳혀버렸다. 하지만 과학이 말하길,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크로모좀 하나, 종이 한 장 차이란다. 그 얇은 종이에 인생을 걸고 싸우는 우리, 참 대단하지 않은가?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마치 용을 그린 후 마지막에 눈동자를 찍어 넣어야 용이 살아 움직인다는 옛 이야기처럼, 남자와 여자가 등장해야 우주의 창조가 완성된단다. 그런데 말이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면서 그 형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이 얼마나 철학적인 미스터리인가? 다행히 예수님이 오셔서 그 형상을 보여주셨다는데, 예수님의 껍질은 남자였지만, 그 일생을 들여다보면 남성, 여성, 아버지, 어머니, 심지어 어린아이의 마음까지 다 품고 계셨다.
예수님을 보면, 광야에서 홀로 싸우며 자신을 극복하는 모습은 산을 오르는 등산가의 남성미가 물씬 풍긴다. 또 잘못한 이를 꾸짖고, 제자들을 보호하는 모습은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내가 암닭이 병아리를 품듯 너희를 품으려 했다”고 눈물짓는 장면에서는 어머니의 모성이 느껴진다. 밥을 챙겨주고, 병든 자를 간호하며, 죄인을 용서하는 모습은 우리네 어머니와 다를 바 없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직감, 부드러운 바람처럼 유연한 마음, 잔치의 기쁨을 아는 여성의 섬세함까지 지니셨다. 남성, 부성, 여성, 모성, 네 가지가 한 사람 안에 다 들어있으니, 이쯤 되면 ‘완전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음악에 비유하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한 몸에 다 들어있는 셈이다. 산속에 잔디, 꽃, 부추, 우람한 나무가 다 모여 있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어릴 적 동심을 잃어버리고, 남자는 아버지가 되고 여자는 어머니가 되어 사회가 정해준 역할에 갇혀버렸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네 가지를 모두 품고도, 마지막까지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으셨다. 아이들과 손잡고 들판을 뛰노는 기쁨,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바라보는 순수함. 어른이 되면 잊어버리기 쉬운 그 동심을 예수님은 끝까지 간직하셨다.
중국의 바보 요간은 “봄날 아이들과 손에 손을 잡고 들에 나가 푸른 것을 따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노래했다. 우리도 월급이 오르거나 진급할 때만 기뻐하지 말고, 아이들과 들판을 걷는 그 소박한 행복을 잊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완전한 형상이란, 남성도 여성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잃어버린 동심까지 모두 품는 것. 어머니의 희생과 아이의 순수함이 만나는 그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닮아야 할 하느님의 모습이 아닐까?
그러니 오늘은 거울 앞에서 자신에게 물어보자. “내 안에 아직도 아이가 살고 있는가? 내 안의 어머니는 잘 지내고 있는가?” 남성, 여성,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심. 이 다섯 친구와 함께라면, 인생이라는 오케스트라에서 멋진 하모니를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