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무게, 감사의 예술

by 아침햇살

인간 존재의 질량은 무엇에 달려 있을까? 누군가 내게 “너의 존재의 무게는 얼마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내가 가진 것보다는 내가 흘려보낸 것, 즉 ‘Giving’에 달려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Giving’이라 해서 동네 슈퍼에서 물건 사고 거스름돈 받는 걸 말하는 건 아니다. 진짜 ‘Giving’이란, 영영히 갚을 수 없는 이에게, 내 손가락 틈새로 재산이 빠져나가듯 흘려보내는 것. 마치 종이배를 접어 강물에 띄우고, 그 배가 바다로 가는 걸 멀거니 바라보는 심정과도 같다.


세상은 스포츠처럼 경쟁하며 재물을 쌓으라고 부추기지만, 예술은 그 재물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흘려보내는 데 있다. 성경은 “열의 아홉은 네 생존을 위해, 열의 하나는 하늘을 위해 쓰라”고 했다. 내 열의 하나가 꼭 예배당에만 바쳐야 할 이유는 없다. 이웃, 성전, 거지, 적십자, 심지어 해외동포까지도 내 열의 하나를 받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액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만 원을 내고도 하늘만큼 큰 마음을 바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백만 원을 내고도 문창호지 구멍만 한 마음을 들이는 이도 있다. 내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도 모르게 하라 하셨으니, 부부 사이에도 몰래 해야 진짜 ‘Giving’이다. 그래야 내 마음이 뿌듯해지고, 내 존재의 질량도 늘어난다.


이쯤에서 신앙의 종류도 한 번 분류해보자. 힌두교에 따르면, 첫째는 아무 조건 없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사람. 이들은 신선한 음식,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선물을 주는 걸 좋아한다. 둘째는 부귀와 권력을 숭배하는 사람. 이들은 시고, 쓰고, 짜고, 매운 음식에 집착하며, 남 보라고 예물을 드리고, 보상도 바란다. 셋째는 죽은 혼령을 섬기는 사람.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썩은 걸 즐긴다. 예물도 없고, 신앙도 없고, 그냥 귀신만 섬긴다. 이쯤 되면, 나 자신은 어디쯤에 속하는지 반성하게 된다.


또 인간을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습관적으로 불평하고 남 탓만 하는 사람. 둘째, 끝없이 구하기만 하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 셋째,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한 사람. 마지막으로, 늘 감사하는 사람. 이 네 번째 경지에 이르려면 도 닦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왜냐고? 우리 존재 자체가 이미 은총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인디언들은 대지를 어머니라 여기며, 아침에 첫발을 내딛을 때마다 미안하다고 속삭인다. 사슴을 잡아먹고도 그 뼈를 물에 던지면 다시 부활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어미 거미는 새끼에게 몸을 내어준다. 성경에도 “이것은 내 몸이니 먹으라”는 말이 있다. 존재의 신비란 이런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잘 풀릴 때만 감사하는 게 아니라,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은 우리를 진실하게 하고, 눈물은 영혼을 씻어준다. 꽃이 지고 바람이 불어야만 산이 고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구름이 달을 가려야 달이 둥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인생의 어려움과 슬픔은, 오히려 내 삶의 달빛을 더 선명하게 비춰주는 무대장치다.


결국, 삶이란 유도와 같다. 거친 상대를 부드럽게 넘기는 것처럼, 우리는 고난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 바로 그게 존재의 예술이 아닐까? 오늘도 내 존재의 질량을 조금 더 무겁게 만들어보자. 물론,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살짝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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