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하느님-나라-사람’의 삼각관계를 생각하며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 셋의 화학작용은 마치 ‘짜장-짬뽕-탕수육’만큼이나 취향과 시대, 환경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오래된 구약 성경을 펼치면 하느님은 왠지 낯설게도, “개인플레이”를 싫어하고 “팀워크”를 추구하는 엄격한 체육선생님처럼 군다. 아브라함과 하늘의 약속은 사실 한 사람의 신비체험이 아니라, 그 후손 전체, 곧 동네 전체에 적용되는 ‘조상 찬스’인 셈이다.
하느님은 언뜻, “예쁜 아이 하나만 사랑하겠다” 하실 법도 한데, 실제로는 “네 옆의 아이, 그 옆 옆 아이, 다 같이 사랑해 줄게!”라고 하신다. 이쯤 되면 내 마음속 하느님은 철저한 ‘민족주의자’ 혹은 ‘공동체 애호가’다. 아담이든 노아든 아브라함이든, 모두 개인적 카리스마보다 ‘소속 공동체’와의 관계로 엮인다. 예수님조차 결국엔 “모든 인류”라는 단체와의 계약을 체결하신 셈이다. 독특하고 신비로운 단독 인터뷰 대신, 늘 “단체 회식”을 여는 하느님! 사사로운 분이 될 틈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이 나온다. 신앙의 길은 혼자만의 깨달음에서 멈추지 않고, 반드시 ‘우리’라는 울타리까지 넓어진다. 어머니는 아들을 챙기면서 언니, 동생, 심지어 이웃집 아이까지 한 데 끌어안듯이.
흥미로운 점은 하느님의 사랑 역시 맥락과 정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 머릿속 이미지는 따뜻한 햇살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햇살마저도 남극과 적도의 강도가 다르듯, 하느님의 사랑도 그때그때 좀 ‘편애’가 들어간다. 공동체 안의 약자, 억눌린 자, 착취당하는 자에게 쏠리는 하느님의 ‘치우친 사랑’. 사자에게 쫓기는 양을 온 힘 다해 감싸는 것이 하느님의 방식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착한 편을 들어준다? 그럴 때도 많다.
문득, 그런 하느님이라면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에서는 늘 눌린 쪽만 편애하신다”는 생각에, 나는 위로를 받는다. 세상에 모든 게 ‘공평하다’라는 말은 있지만, 사실 하느님의 세상엔 “공감”이 먼저다. 하나님이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 혼자 신비한 경험에 푹 빠져 있을 자유 따윈 없다. 세상에 엉켜 있는 가시덤불, 혹은 복잡다단한 사회의 얽힘에서 “나만 구해 주세요!” 하면, 하느님은 “가시부터 걷자, 함께 구하자”라고 답하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바라는 신앙인의 모습은 “나는 구원받았으니, 됐다!” 하고 방석 위에 앉는 게 아니고, 내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를 위한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다. 너무 신비로운 종교만 좇아가면 집 안에서 명상만 하다가 끝나고 말지만, 공동체와 함께 부대끼다 보면(물론 피곤하다), 세상과 이웃, 심지어 미래의 후손까지 생각하게 된다.
종교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서로 맛있는 밥을 나누고, 때로는 같이 싸우고, 같이 울고 웃고, 때로는 눈치도 봐야 하는 식당 같다. “신앙생활=맛집 탐방”이 아니라, 어울림의 훈련장이다. 하느님의 이상은 인류 모두가 결국 하나의 식구가 되는 것, 큰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는 세상 아닌가.
마지막으로, 나라와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에 세 가지 경로가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겠다. 나라=하느님이라 주장하면 왕정 신드롬(와, 위험!)이, 나라=사람이라며 하느님을 빼면 전체주의(으, 숨 막혀!), 사람=하느님만을 외치면 나라는 무의미해진 불교나 힌두교 스타일(아, 초월!). 그런데 하느님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기독교적 생각은, 나라마저도 ‘사람을 섬기는 시스템’으로 포함시킨다는 게 다르다. 하느님의 나라(Kingdom of God), 그건 곧 사람 중심의 나라!
우리의 신앙이 어전회의 방석에만 머물지 않고, 내가 속한 사회, 공동체, 그리고 타인의 운명까지 품게 하는 ‘큰 집’이 되길.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라, 다 같이 떠드는 할머니댁 부엌 마당임을 기억하며, 오늘도 하느님-나라-사람의 ‘삼각김밥’ 한 입 크게 베어 먹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