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존재, 그리고 흘려보내는 예술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오래된 나무장이 하나 있었다. 그 장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고, 문을 열면 묵은 냄새와 함께 온갖 잡동사니가 쏟아져 나왔다. 그 안에는 아버지의 낡은 모자, 어머니가 아끼던 자개함, 그리고 내가 어릴 적 썼던 색이 바랜 그림책까지, 가족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장을 정리하다가 한참을 멈춰 섰다. ‘이 많은 물건들,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 아버지의 모자는 이미 주인을 잃었고, 내 그림책은 더 이상 내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장 안의 물건들은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 주인이 누군지조차 모른 채 세월을 견디고 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인생도 이 나무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들이, 잠시 소유했다 떠나는 물건들. 결국 남는 것은 장 안에 남겨진 낡은 추억뿐이다.
성경 레위기에서는 “땅은 영원히 내 것이라. 너희는 잠깐 머무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땅 위에 집을 짓고, 밭을 갈고, 물건을 쌓아두지만,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땅도, 장도, 그 안의 물건도 잠시 우리 곁을 스칠 뿐이다. 존재와 소유, 즉 ‘Being and Having’은 결국 한 공간과 시간을 잠시 공유하는 인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말에는 “아들이 있느냐?”, “집이 있느냐?”처럼 ‘있다’라는 표현이 많다. 영어로는 “Do you have?”라고 하지만, 한국말의 ‘있다’는 함께 머무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가졌던 차”처럼 영어식 표현이 스며들고 있다. ‘가졌다’는 움켜쥐는 느낌인데, 원래는 ‘있다’가 맞다. 소유와 존재가 나란히 인연을 맺고 공존하는 것이 우리말의 멋이다.
밥을 흘리면 죄라는 말, 어머니들은 밥 한 톨에도 경외감을 가르쳤다. 그 쌀알에는 태양, 비, 흙, 농부의 땀, 그리고 무수한 시간의 인연이 담겨 있다. 다시는 오지 않을 햇빛과 비가 만든 쌀알, 그 유일함을 생각하면 밥을 아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예전에 먹고 살기 힘들 때도 우리 부모들은 밥을 조금씩 땅에 뿌리며 ‘고시레’라 했다. 대지에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이다.
거지에게 따뜻한 밥을 주거나, 중에게 쌀을 수북이 시주할 때, 우리는 ‘인심이 좋다’고 한다. 주는 마음, 큰 마음이 바로 인심이다.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평생 긁어모으다 죽어 재산만 남겼고, 다른 한 사람은 후하게 베풀다 죽어 남긴 것이 없다. 둘 다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누가 더 멋진 삶을 살았을까? 후하게 주고 간 사람은 평온함을 남긴다. 움켜쥐기만 하다간 손은 병신이고, 후하게 쓸 줄 아는 손이 살아있는 손이다.
재산을 쌓는 것은 스포츠, 후하게 쓰는 것은 예술이다. 이 두 가지를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삶을 사는 것이다. 주는 것은 무엇일까? 종이에 적어 보내지 못할 임에게 띄우는 편지, 강에 띄우는 빈 병, 고시레의 밥 한 숟갈, 모두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보내는 것이다. 주는 것은 예술이다.
노자는 “자애하는 자는 용감할 수 있고, 검약하는 자는 후하게 쓸 수 있다”고 했다. 검약은 후하게 쓰기 위한 준비다. 사람이 죽을 때 저 세상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살아서 ‘Give away’한 것뿐이다. 윈스턴 처칠도 “우리는 버는 것으로 생존하지만, 주는 것으로 삶을 멋지게 만든다”고 했다.
신학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께 바치는 손조차 하늘이 주신 것이다. 하늘은 직접 받으실 수 없으니,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이웃에게 흘려 보내는 것을 하늘에 바치는 것으로 친다. 레위기는 “토지는 영원히 팔 수 없다. 토지는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열에 하나를 떼어 하늘에 바치고, 아홉은 후하게 쓰라고 한다.
결국, 인생은 소유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가 인생을 위해 있는 것이다. 소유란, 우리가 하늘을 닮아 후하게 쓰는 연습을 하라고 잠시 맡겨진 것일 뿐이다. 도겐 선사는 “주는 것은 비애착”이라 했다. 무엇을 주었느냐가 아니라, 애착 없이 주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 동전 한 닢, 이파리 한 조각, 한 줄의 가르침, 모두 같은 일이다.
노래를 바치고, 시를 드리는 마음처럼, 주는 마음이 바로 우리의 존재를 크게 만든다. 제단에 바치거나, 갚지 못할 이웃에게 나누는 것, 모두 하늘을 닮아가는 훈련이다. 그러니 오늘도 움켜쥐지 말고, 후하게, 멋지게, 예술처럼 살아보자. 어쩌면, 진짜 내 것이 되는 것은 내가 ‘흘려 보낸 것’뿐일지도 모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