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문제 없는 집이 있을까요? 새 집을 사도, 전 주인이 남긴 흔적이 남아있고, 그 집에 얽힌 소문도 따라옵니다. 마치 지구에 발 딛고 사는 우리 모두에게 내려진 첫 번째 숙제 같습니다. 구약 전도서 저자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지요. 과학이 발전해도, 문명이 진보해도, 인생의 문제는 반복된다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무명’이라 하고,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문제를 품고 사는 존재라는 이 처절한 발견이, 사실은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첫 번째 횃불이 아닐까요?
문제의 뿌리를 파고들다 보면, 우리는 종종 문제 자체보다 ‘문제의 문제’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90%는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 설교도, 시도, 소설도, 심지어 증언도 모두 말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언어란 게 완벽한 도구가 아니니, 문제는 더 꼬여만 갑니다.
어느 날, 막틴이라는 사람이 예배당에서 나오며 목사님께 “오늘 설교 말씀,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적힌 책을 봤다”고 했답니다. 당황한 목사님이 “그 책이 뭐냐”고 묻자, 며칠 뒤 막틴이 보여준 건 다름 아닌 ‘사전’이었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 이미 사전에 다 있다는 것! 결국 우리는 사전 속 단어를 이리저리 섞어가며 문제를 만들고 푸는 셈입니다.
예수님도 “입으로 들어가는 건 더럽지 않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하셨죠. 때로는 현실이 문법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등소평이 모택동의 회의에서 “이의 있는 사람 일어나시오”라는 말에 혼자 벌떡 일어났다는 일화처럼요. 모두 앉아 있으니 만장일치라던 모택동, 참 현실은 말보다 더 복잡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쇄된 말보다 살아있는 사람의 말을, 말보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리고 그 됨됨이보다 풍류를 더 귀하게 여길 때, 문제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집니다. 문제의 존재를 인정하고, 문자에만 집착하지 않을 때, 우리는 문제를 안고, 쌓고, 뭉개며, 마치 집 없는 제비처럼 그 분위기마저 즐길 수 있게 되지요.
일본의 정거장에서 만난 장사꾼 두 사람. “어디 가?” “고베로 가.” “자네가 고베로 간다니, 난 다른 데로 갈 줄 알았는데, 내가 보니 자네는 고베로 가는 중이야.” 이렇게 남을 의심하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또, 추운 날 대합실에 뛰어든 이가 문을 열어놓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문 닫으라!”고 소리치니, “문을 닫아도 밖은 춥다”고 답합니다. 나만 생각하는 이런 태도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이제 문제를 넘어 궁극적인 질문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무엇이 확실한가?”라는 열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과학이 정밀성을, 종교가 심각성을 다룬다고 하지만, 요즘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심각한 시대입니다.
요나 이야기를 볼까요? 하나님이 동쪽으로 가라는데, 요나는 당당히 서쪽으로 가는 배에 올라탑니다. 폭풍 속에서도 요나는 코를 골며 잡니다. 왜냐고요? 누가 풍랑을 일으키는지, 누가 자신을 추적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풍랑 이는 배 안에서 주무셨죠. 이게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여유 아닐까요?
믿음이란, 무턱대고 곧이곧대로 믿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곧이 믿지 못하는 데서 시작해, 요나처럼 말을 듣지 않고, 결국 폭풍 속에서도 잠잘 수 있는 뻔뻔함(?)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입니다. 이 여정이 우리에게 하늘과 땅을 떠받치는 힘을 줍니다.
결국, 예수나 바울, 베드로는 2,000년 전 자기 몫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며 우리 몫의 인생을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격랑의 시대에, 요나처럼, 예수님처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코를 골며’ 살아가는, 살아있는 포스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문제투성이 인생, 오늘도 유쾌하게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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