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너 말야.너.
한국은 2020년 연초의 대 충격에서 벗어나 서서히 일상으로의 복귀가 이루어졌고, sns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가족과 친구들은 마스크만 했을 뿐 그 전과 많이 다르지 않은 일상을 조심스레 하고 있는 듯했다. 불과 몇일 전 서울에서도 대규모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기사가 떠서 보았는데...워낙 확진자의 동선을 빠르게 파악하고 격리가 확실하게 이루어져서인지, 충격의 와중에도 일상은 정상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 보였다. 영상과, 뉴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한 확인만 가능하지만... 적어도 그런 매체를 통해서 보는 한국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곳, 뉴욕과 몇 가지 부분에서 (대충격이라 부제가 붙는 기사 속에서도 ) 몇가지 선명한 차이를 보였다.
- 한국의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 할지라도) 학교에 갈 수는 있었고, 확인된 확진자의 동선이 겹치는 곳에서만 임시로 휴교를 하며 가능한 대다수의 아이들이 배움을 이어가고 있는 듯 했다.
- 한국의 어린이집과 학원, 체육관은 운영이 되는 듯했고... 무엇보다. '회사'는 일시적인 재택근무의 시기를 지나 대부분 정상 출퇴근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한국의 레스토랑은 식당 안에서 서빙을 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고.
-한국의 아이들은 방역수칙을 지키며 다양한 문화시설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일부라도 가능했다. (문제의 지역은 임시 폐쇄를 하더라도 도시 전체가 다 문을 닫는 것은 아니었기에)
하지만, 미국은 나아질 줄을 모른 채 끝도 없이 높아지는 확진자 수치에 좌절하는 매일이 이어졌다.
8월 21일 기준 미국 전체 확진자 숫자 5백65만 명, 뉴욕의 확진 케이스 23만 6천여 명.
뉴욕주의 확진자 숫자만 들여다보았을 때 프랑스 국가 전체(23만 8천명)와 독일 국가 전체(23만 3천명) 확진자 숫자가, 뉴욕 한 주의 확진자 숫자와 비슷한 상황이니.
뭐. 할 말이 없을 지경.
덕분에 Big Apple이라는 귀여운 별명 대신, Epicenter of the Epicenter라는 슬픈 별명을 하나 더 얻게 된 뉴욕의 우리 세가족은... 학교도, 회사도 가지 못한 채 정말 말 그대로 온 가족이 24시간의 공동생활을 6개월째 지속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그는 사망자 통계 수치가 계속해서 상승한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조직이라도 버텨 내지 못할 것이며, 행정 당국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산더미처럼 죽어 길거리에서 썩어가거나, 공공장소로 나와 죽어 가는 사람들이 정당한 증오심과 어리석은 희망이 뒤섞인 심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붙잡고 매달리는 광경을 도시 전체가 보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중 (열린책들)-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아무 곳도 가지 못한 초기의 3개월은 정말이지 극한의 공포와 스트레스로 집 안에서 숨죽여 매일의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던 듯하다. 이제 겨우 이 곳 생활이 조금 익숙해졌다 싶은데 다른 미지의 동네로 떠날 용기는 나지 않았기에 버티는 방법을 택했지만 도시 외곽으로 아예 기약 없이 떠나는 친구들과, 임시로라도 탈출해있는 지인들을 보며 무엇이 우리 가정에게 최선인지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상황 속 '나'의 일상은 당연히 무너졌다. 정말 하루 단 1분도 '나만의' 시공간이 없는 24시간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서 충전되는 동굴형(이라 쓰고 내향적이라 읽는다) 인간인 나에게는 쉬이 적응하기 힘든 생활의 변화였다. 빌딩 숲 속의 작은 도심 속 아파트에서는 고개를 굳이 돌리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남편이, 아이가 항상 내 눈에... 반대로 그들의 눈에도 내가 항상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아이는 부모가 늘 상주하는 것이 반가웠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기분은 마치 신생아를 끼고 있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돌아서면 엄습하는 삼시 세 끼와 곳곳에 자꾸 출현하는 설거지산과 빨래 산을 포함한 각종 집안일. 그리고, 그 와중에 대환장파티로 축약되는 아이 학교의 홈스쿨링까지 얹어졌다. 더불어, 시기도 애매하게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시작한 사업은 마비된 물류와 우편 수단으로 인해 비용만 지불한 채 굴러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되어 좌절의 연속이랄까.
추운 날들이 이어지면 전염병이 수그러들 것이라고 행정 당국은 기대했지만, 페스트는 겨울 초엽의 혹한을 거치며 계속해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아직 더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란 너무 기다리다 보면 결국엔 더 이상 기대도 하지 않는 법이라, 우리 도시 전체는 미래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 알베르까뮈의 '페스트'중 (열린책들) -
그래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건강하게 이렇게 세 가족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해. 다행인 거야]라고 강박적으로 되새겨 보고는 했지만, 그 반대편의 마음속 아주 어둡고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질문은 시속 25m/s 강풍을 동반한 초강력 태풍처럼 내 마음속을 할퀴고 있었다.
과연 나의 아이는 안전하게 커 나갈 수 있을까?
그 어느 곳보다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재미있던 나라라 생각하며 내가 한국에 반영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무언가가 정말 존재했던 것이 맞나?
안전이라는 근간이 흔들리는데 과연 그게 중요했던 걸까?
또한 그는 사망자 통계 수치가 계속해서 상승한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조직이라도 버텨 내지 못할 것이며, 행정 당국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산더미처럼 죽어 길거리에서 썩어가거나, 공공장소로 나와 죽어 가는 사람들이 정당한 증오심과 어리석은 희망이 뒤섞인 심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붙잡고 매달리는 광경을 도시 전체가 보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 알베르 까뮈의 ' 페스트' 중 (열린책들) -
과거 모든 것이 '정상'이던 시절. 우리 세 가족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가족 모두가 동시에 집에 머무는 시간은 3-4시간이 최대였었다. 각자의 바쁜 하루 끝에 저녁에 잠시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코로나 때문에 급변한 [온 가족 24시간 합숙] 시추에이션에 적응 못한 것은 물론, 나뿐만은 아니었다. 회사 사무실이 되어버린 우리 집 식탁 앞에 앉아 출퇴근을 반복하는 남편은 아이가 만들어 내는 산만한 소음들 속에서 집중해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덕분에 스트레스성 위장병이 걸려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인생 최저 몸무게를 기록 중이었다. 작아져 못 입었던 바지가 아주 잘 맞는다는데 어찌나 애처롭던지. 그리고, 바깥도 쉽게 못 나가던 아이는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의 발현인지 마치 신생아처럼 하루 단 1분도 혼자 있지 않고 끝없이 나를 찾고, 매달리는 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그렇게 밖에 펼쳐진 코로나 지옥도를 건너며, 세 가족은 각자의 개인적인 지옥문을 또 열며 시간이 지나기만을,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바라던 중.
벌써 계절이 바뀌어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바뀐 계절과 함께 조금 나아진 상황 속에 우리는 허드슨 강 건너 뉴저지의 널찍하고 아름다운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는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방문하게 되었다. 그 가정도, 우리도, 정말 오랜만에 다른 가족을 만나 용기를 내서 식사를 한 날이었고... 오랜 칩거 생활 끝에 이루어진 만남이라 그 반가움은 더했다. 그간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와 맛있는 저녁,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던 하루가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시 가까워지는 맨해튼의 뾰족한 스카이라인만큼 그간 우리가 왜 힘들었는지 너무나 명확히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이 그리웠다.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가족이 아닌) 사람의, 특히 어른 사람의 말소리와 웃음이 그리웠다.
요새 뭘 좋아하는지, 뭘 보았는지, 요새 먹고 싶은 것은 무언지, 어떤 과자가 맛있는지, 코로나가 끝나면 뭐하고 싶은지... 같은 시시콜콜하고 별거 아닌 이야기들을 함께 하며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웠다.
각자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 날 시간을 함께 보낸 지인의 집은 총 3개 층에 방이 곳곳에 있어서, 아이들이 아이들대로 노는 동안 어른들의 아이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이야기를 하며 어른들의 음악을 들으며, 어른들의 음료(그러니까... 술)를 즐길 수 있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의 세계에서 뛰어놀고, 노래하고 신이 났다. 귓가에 환청처럼 들리는 "엄마"라는 소리를 정말 잠시 벗어났을 뿐인데,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막힘없이 소화가 되고 술은 취기 없이 술술 넘어갔다. 적어도 그날 해소된 내 마음속 스트레스의 크기는, 아이가 다시 24시간 껌딱지 모드가 되어 신생아 마냥 화장실도 못 가게 내 등딱지에 달라붙어 "엄마~엄마"를 23453465789876234번 즈음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로 적어도 3-4일은 견뎌볼 수 있을만한 만큼의 거대한 무엇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라 말하고 있는 중이다 ㅎㅎ)
그리고 그 날 저녁.
한동안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하던 머릿속의 안개가.
조금 내려앉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오랜만에 노트북 앞에 앉아 다시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일 후부터 아주 천천히 다시 시시껄렁한 책일지라도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도저히 도망갈 수 없는 이 상황이 내가 처한 현실이 맞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는 이 스트레스를 해소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명확해졌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매주 주말이 되면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이 도시의 공기를 떠나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한국 전체 대비 1.4배인 엄청나게 큰 뉴욕 '주'에 살고 있지만, 정작 서울시의 구 2개만 한 작은 맨해튼을 떠나본 적이 거의 없던 우리가, 그 발걸음을 도심 '밖'으로 넓히기 시작했다. 도시에 넘쳐나는 프로그램과 공간들 때문에 후순위로 밀렸던 도시 밖의 산과 들로, 바다로 발길을 돌렸다. 사람이 드문 곳으로 찾고 찾아, 친근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들판으로, 바다로.
한 주의 일과 스트레스, 육아와 가사에 눌려 죽을 것 같이 어깨에 피로가 내려앉는 금요일 저녁에도 꾸역꾸역 짐을 쌌다. 그리고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라도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나기를 반복했다. 당일치기 하이킹인 적도, 1박 2일짜리 캠핑인 적도 있었지만 떠나고, 돌아오고, 또 떠났다.
마치 시험하듯 가는 길에 갖가지 문제가 빵빵 터져나와 울며 간 적도 있었지만, 늘 돌아오는 길에는 더 행복해지고 더 에너지가 채워진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분명 전날 손발 끝이 아리다고 느껴질 정도로 피곤하고 온 몸이 쑤셨는데, 산속을 걷는 두어 시간의 하이킹 후에 맑아진 피부와 가벼운 몸을 느꼈다. 새벽에 출발하는 탓에 아침, 점심을 다 밀가루 류의 간편식만 먹었는데도 소화 불량은커녕 잘먹고 소화도 잘 시키고 포동포동 살이 쪘다. (이건 좋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건강해졌다 치자.) 남편은 이유를 알 수 없던 위장병이 나아가며 그간 먹고 싶었으나 참았던 것들의 리스트를 하나씩 꺼내 들기 시작하는 중이다. 나에게만 달라붙어 하루 종일 매미처럼 엄마를 찾던 아이도 조금 나에게 떨어져 혼자 노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아이는 다음에는 어떤 산에 갈 것이냐는 질문을 했다.
알고는 있지만 납득이 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해서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아니 적응하고 싶지 않았던) 이 도시의 현실을 인정하고 상황을 바로보기 시작하니 작은 해결책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박물관과 미술관, 새로운 전시가 가득했지만 지금은 죽은듯 웅크리고 있는 도시를 떠나 나무와, 물, 대지를 밟는 주말속에 아주 천천히 조금씩 우리 모두는 회복중이다. 그리고, 이제 겨우 생각이란 것을 다시 하기 시작한 머리는, 글도 읽고, 자판도 두드리라 명한다. 일상이 변했다고, 주어진 환경이 변했다고, 나의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번은 완패했지만, 두번은 지지 않으리라. 또 다시 같은 상황속에 놓일 지라도 더 힘내 일하고, 읽고, 쓰며 일상을 이어가리라 다짐하며 외쳐본다.
코로나.
난 너 따위에 지지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