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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Jan 03. 2022

신선하고 싶어.

한 살 더 먹더라도, 언제까지나

새로 이사 온 한국의 집 근처에는 인근의 주민들을 위해서 조성한 수변 공원이 있다. 작은 하천이 흐르는 보기 좋은 이 수변 공원을 걸으며 알게 된 최대 단점은, 본래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 곳을 인공적으로 내천으로 만들다 보니 물이 고여있어 쉽게 탁해지고 그로 인해 벌레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산책할 때는 모르다가, 집에 와서 보면 모기들이 나모르게 팔뚝 위에서 파티를 벌인 것을 종종 발견한다.) 흐르지 않는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설치된 물레방아라도 돌아가지 않는 날이면, 탁한 녹색을 띠기 시작하는 물에서 나는 좋지 않은 향으로 그나마 아름다워 보이던 풍경도 빛을 잃는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속담의 실사판이랄까.  

너무 익히 알고 있는 속담이라 그냥 그러려니 했던 그 말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 요즘 새삼 가슴과 머리에 시시 때 때로 툭 와서 닿는다.


그리고 질문이 이어진다.


어디부터가 고인물이고, 어디부터가 흐르는 물일까. 

이제 30대를 벗어나는 나는 이 사회 속의 고인물일까,

고인물의 정의는 무엇일까.

언제까지고 신선할 수는 없을까.

그러려면 어찌 살아야 할까.



월스트리트(Wall Street) 근처의 사우스 스트리트 시포트(South street seaport)의 한 독립 서점을 들렸다가, 표지와 제목이 재미있어 쓱 집어 든 책이 한 권 있었다.

"Crying in H Mart"


H-mart안에서 울고 있다는 재미있는 제목의 책은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작가 미쉘 자우너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제목에 등장하는 H-mart는, 미국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한국 식료품점으로 미주 한인들의 생활의 중심이라 말할 수 있다. 진미채부터 비빔밥 재료까지, 마치 작은 한국으로 들어간 곳처럼 느껴지는 곳이랄까. 한국이 그리워지면 달려가 라면을 집어오고, 엄마가 만들어 주었을 법한 반찬들을 사 오던 곳.

맨해튼의 Hmart

바로 그런 곳을 제목으로 달고 있다 보니, 당연히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이다 싶어 집어 들고 집으로 왔다. 국적을 예상할 수 없는 "Michelle Zauner 미쉘 자우너"라는 이름의 작가는 한국인인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난 뒤, 한국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을 회상한다.

미국과 한국이라는 너무나 다른 2가지 문화가 공존하는 가정 내에서 자란 작가는, 한국인이기도 미국인이기도 그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한 혼란스러운 마음과 방황을 지난다. 전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작가의 어머니는, 동양인도 드문 지역에서 한국 엄마로 아이를 키우는 과정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요, 환경은 미국, 남편도 미국인 남편이지만... 이 어머니의 양육 방식은, 1960~70년대생 한국의 어머니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양육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 내가 다칠 때면, 우리 엄마는 소리를 먼저 질렀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친구들이 다치면, 걔들의 엄마는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는 괜찮을 거라 이야기해주고 바로 의사에게 데려갔다. 백인들은 언제나 의사에게 갔다. 하지만 내가 다치면, 우리 엄마는 마치 내가 일부러 짓궂게 엄마의 소유물을 망가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척 화를 내고는 했다."

-Crying in Hmart 중-

나무를 타다가 떨어져 크게 다친 날에도 작가의 엄마는 친구들의 엄마들처럼 "Are you OK, sweetheart?(괜찮니 우리 아가?)"라고 이야기하기보다, "엄마가 그 나무 타지 말라고 말했었지!!!"라며 화를 낸다. (읽으면서 실은 너무나 찔렸다. 나도 너무 자주 튀어나오는 속상함과 혼냄의 짬뽕탕의 표현이었기에.).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많은 한국의 엄마들이 그러하듯 자식의 삶에 본인을 투영하기도 하고, 자기 뱃속으로 나왔지만 이해할 수 없는 딸을 마주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집에서야 엄마가 만드는 한국 음식을 먹으며 자랐지만, 작가를 둘러싼 그 외의 모든 환경은 미국이었으니 일반적인 가정이 경험하는 것 보다 그 간극은 더 크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지독한 전쟁 같은 사춘기에는 엄마와 몸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그 후에 몇 년은 거의 절연하다시피 해서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기까지 깊은 상처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책 속에서도 그대로 그려진다.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지 않아도, 자란 환경 덕에 입맛이며 취향이 미국 아이와 같은 꼬마를 키우고 있기에 책 속의 이야기가 아주 남 일 같지 않았다. 더불어... 미국에서 미국인과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도 이토록 변함없이 '한국적'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살고. 미국인 남편과 결혼 해 살면서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엄마보다 더 오래전 한국의 엄마 같은 작가의 어머니.

읽어 내려가는 내내. 시공을 초월한 여전함이 신기했고 의아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한 가지 추억이 떠올랐다.


뉴욕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미국 금융 기관에서 인정하는 신용에 관련된 이력이 전무한 우리에게 유일하게 계좌를 열어주고 카드를 발급해 주던 곳은 한국은행들의 뉴욕 지점이었다.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참 시시콜콜 어렵고 난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그중 한 곳에 남편과 함께 가서 계좌 개설을 위해서 각종 서류를 작성하였다. 당시, 우리를 담당하고 계시던 직원분께서 은행 볼펜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며 내 곁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시더니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참으로 짧은 팔다리에 오동통 볼이 있던. 작은 꼬마 시절

"저... 이 정도 키면 몇 살 정도 되는 거예요?"

"네? 아.. 4살이요."

"아.. 그렇구나... 저도 곧 엄마가 되는데, 막상 아이들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여쭤보았어요."


이야기를 듣고 보고 있던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그분의 배를 바라보니, 내일모레 출산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삭이셨다. 지나온 길은 지나 본 이들만 알 수 있기에,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일하고 있는 그녀에게 갑자기 지난 어느 시기 즈음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정말 힘드시겠어요… 막달에 앉아 있기도 힘드시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힘내셔요~그럼 정말, 말도 못 할 재미가 기다리고 있으실 거예요."

"네... 근데, 저는 지금 이 아이 낳고 바로 하나 더 낳아야 해요."

"....... 네??"

"시댁에서 아들을 원하시는데, 지금 뱃속 아이가 딸이라서요..."


순간, 내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딸아이를 보며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혹시 1950년대 한국인가? 바다를 건너서 다른 나라에 와있는 게 아니라, 타임슬립을 했던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시댁에서, 아들이 아니라서 또 아이를 낳으라고 하신다는 거예요?"

"네...."

"그 이야기를 직접 들으신 거예요???"

"네...."


은행 카드 신청 서류를 두고 앉은 창구 직원과 고객이 아니라, 여자인 아이를 낳은 엄마와 여자인 아이를 낳을 예정인 엄마가 마주 앉아 서로 당황하며 질문과 답을 이어갔다. 옆에서 왠지 모르게 뻘쭘해하던 남편은, 앉아 있기 어색했는지 은행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한 딸아이 뒤를 쫓아 자리를 벗어났다.


그날의 대화는 사뭇 충격이었다.

21세기에. 그것도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다양한 삶이 지구 상 그 어느 곳 보다 먼저 숨쉬기 시작한다는 뉴욕의 맨해튼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옆구리의 코리아 타운에서 마주한 1950년대의 한국식 [남아선호 사상]이라니. 한국에서도 출산 전의 며느리에게 태어날 아이의 성별을 논하며 더 아이를 낳으라.. 와 같은 말을 하시는 시어른들은 많이 볼 수 없는 케이스가 된 지 오래였고, 그런 경우가 글이라도 올라오면 이혼하는 게 낫겠다는 덧글이 더 많이 달리는 시기를 지난지도 꽤 되었기에... 더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정말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던, 21세기 뉴욕 한복판의 조선시대 남아 선호 사상의 존재 이유는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개인의 서로 다른 삶이 존중받고 그대로일지라도 크게 관여하지 않는 미국이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외부와 소통하고 변화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타국에서의 외로움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같은 민족이나 문화 속으로 더 파고든 사람들은, 그렇게 그 속에 머문 채 마치 진공팩 속의 식재료처럼 변화하지 않았다. 그 보존력은, 설사 한국인이 아닌 다른 인종, 국가의 사람과 결혼하여 살지라도 변치 않을 정도로 강력할 수도 있다는 것을 Crying in H mart 책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 말이다.  



그렇게 뉴욕이라는 도시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외국인'으로의 '한국인'들을 보았다.

겉보기는 한국인이지만 그 안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미국인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가치관과 취향을 가지고 미국 사회 내 동화되어 경쟁하는 사람들. 그리고 고국을 떠나왔어도 떠나온 시점의 그 언젠가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미국 속 작은 한국에 사는 사람들.


너무 먼 대척점에 있는 그 모두를 함께 보며, 어느 쪽이 맞는가를 고민하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은,  [어디에,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느냐]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방식이 “너무나 당연한 답”이 아닐 수 있고 세상에는 늘 서로 다른 관점과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에게 맞는 더 나은 방향이다 싶은 쪽으로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진 삶]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일시적인 불편을 감수하고 새로움을 받아들일 힘.

시간에 따라 쌓인 전문적인 노하우와 그저 쌓인 시간으로만 증빙하려는 꼰대력을 구분할 수 있는 현명함.

외부에 대한 호기심의 눈을 감지 않고 계속 두리번거릴 수 있는 에너지.

이해할 수 없는 생각들도 일단 들여다보자는 마음.

이런 점들이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


부디, 이런 점들이 새로운 한 해 나의 마음 속에 자리잡길 바라며, 2022년의 시작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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