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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Dec 09. 2021

당신의 밤도 편안하길.

새벽 택배를 뜯는 불편한 마음의 넘실거림.

아이와 앉아서 다음날 저녁에 먹을 메뉴를 주문했다. 생면이 포장되어 소스와, 잘 손질된 새우까지 함께 들어 있는 밀 키트였는데, 내가 주문한 시간은 밤 8시.

그리고, 우리 집 문 앞에 배달되어 온 것은

다음날 아침 7시.

 

무언가를 결정하고, 결제한 뒤

내 두 손안에 담기까지

24시간도 걸리지 않는 한국.

그런 한국으로 우리는 돌아왔다.


태어나서부터 "빨리빨리"가 적응된 한국 사람이 처음 뉴욕으로 이사를 갔을 때, 가장 답답했던 점 중 하나가 어떤 온라인 주문도 다음날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 물론, 버그도프 백화점이나 삭스 핍스 애비뉴 백화점의 일부 제품들은 '샵 러너'와 같은 서비스를 통해서 같은 맨해튼 내에 한하여 당일 배송이 되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했지만.... 일상 소모품이 아닌 고급품에 한한 경우가 대부분. )

그러니 [쓱. com]이나 [쿠팡]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던 시기에 한국을 떠난 우리에게는 뉴요커들이 '정말 빠르다'며 자랑하는 대부분의 서비스들을 마주하며 감탄보다는 '도대체... 어디가 빠른 것인가-.,-.'라는 의문만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몇몇 프리미엄 패션 위주의 고급 백화점들은 정~말 양반이었다.(받은만큼 일하는 자본주의 논리랄까 ㅎㅎ) 가구 배송 일정을 변경하기 위해서 미국 이케아에 건 전화는 2시간은 대기하고서야 가까스로 상담원과 통화가 가능했고, 가장 멋진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이라는 미트패킹 지점에서 주문한 커피는 무려 50분이 지나고 나서야 손에 쥘 수 있었다. 물론... 기다리는 내내 지쳐서 커피가 나올 즈음 우리 아이는 산 낙지처럼 나에게 달라붙어 매미처럼 징징거렸기에 커피 맛이 다 도망간 것은 말하면 입아프다. 100불 가까이 내고 가입한 아마존 프라임 서비스라고 해도 제일 빠른 배송은 다음날 저녁 정도가 최선이었기에, 급한 물건은 늘 직접 마트로 뛰어야 했다. 아, 어떤 품목들은 주문한 물건을 잊어먹을 때가 되어서야 도착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강가에 침수방지를 위한 방어벽을 설치한다는 공사는 무려 2년 동안 도대체 어디를 고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지속되었고, 새로 보수한다는 놀이터는 디자인 하나 달라진 것 없이 장장 1년 동안 공사가 이어졌다. 하도 진행이 더뎌서, 지나다닐 때마다 우리가 목수 일을 배워서 해도 저것보다는 빠를 것 같다는 농담을 지치지도 않게 했더랬다. 가장 뒷목 잡게 만드는 곳으로 유명한 미국 공공기관들의 서비스 속도도 말 안 하자니 서운하다.


이렇게... 어느 한 곳 빠짐없이 느린 뉴욕인데.

이런 뉴욕인데, '뉴욕이 너무 빠르고 편해서 이 도시를 못 떠나겠어'라고 이야기하는 뉴요커인 친구들을 마주하게 될 때의 기분은 마치 나무늘보들의 군락지에 들어가서 의도치 않게 초 스피드를 뽐내는 외계인 토끼가 된 기분이랄까.


그렇게 답답하고 속 터지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던 어느 날.

홀푸드에서 과일을 사느라 과일매대 앞에 카트를 잠시 옆에 세워두고 이봉지 저 봉지를 들었다 놨다 하며 열심히 장을 보고 있던 아침이었다. 한참을 뒤지다 마음에 드는 봉지를 하나 집어 들어 옆에 세워두었던 카트에 넣으려 몸을 돌린 순간, 내 카트가 살짝 빗겨 세워진 바람에 좁은 통로를 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내 카트 뒤에서 지나가지 못한 듯 기다리고 계시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체리 더미를 뒤적거리는 동안 내내 기다리셨을 것 같아 죄송한 마음에 황급히 "I'm sorry"를 연발하며 카트를 치우는 나에게 , "No worry. Take you time. (괜찮아요. 천천히 해요)."라며 웃으며 손사래를 치시는 게 아닌가.

 

사실, 이 순간 퍼뜩 머릿속을 스쳐간 건 불과 며칠 전의 내 모습이었다.

똑같은 마트, 똑같은 매대에서 나와 같이 한~참을 공들여 물건을 고르던 한 아주머니 뒤에서 '아.. 되게 오래 걸리시네. 좀 빨리빨리 하시지.'라며 마음속으로 구시렁대며 장 보시는 아주머니의 뒤통수에 엄한 레이저를 쏘아대던 내 모습 말이다. 불과 2-3분이었을 텐데, 그 틈을 못 참았던 내 모습.

부끄러움이 마음을 박차고 올라왔다.

고작 몇 분을 못기다리는 나의 성질머리가 부끄러웠고, 부족하다못해 가뭄난 마음의 여유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서두르고 빠른 것에 익숙한 [나의 속도]에 맞춰 뉴욕 사람들의 행동을 느리다 탓하던 시선을 가졌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 날 이후, 무엇이든 신속하게 빨리 잘 해내는 것이 최고다 생각했던 틀을 벗어나 [반드시 꼭 그래야 하는가?] 라고 한번씩 멈추어 보기로 했다. 그간 내가 기준이라 생각한 속도 속에 존재한 많은 사람들을 꼭 한번 짚어보기 시작했다. 혹여 내가 편리하다, 좋다… 했던 그 모든 과정 속에 과하게 힘이 들거나 불편했을 누군가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불가능한 속도를 위해 사람을 갈아 넣어 굴러가는 과정에 무감각해 진 것은 아니었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떠올랐다. 나의 템포를 하나 늦추는 것이 어쩌면 나의 삶과 아주 가느다랗게 연결되어 있는, 만날 수 없고 만난 적 없는 누군가의 가쁜 숨을 잠시 쉬게 할 수 있지는 않을까…..?


2019년 가을, 당시 아동복 회사의 마케팅일을 하며 블랙 프라이데이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당연히 미국 내 각 유통사들의 프로모션 일정을 모니터링하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에 눈이 갔다. 처음에는, 추수감사절 다음 날부터 시작하는 것이 당연했던 블랙 프라이데이는 타겟(Target), 월마트(Watlmart) 등등 미국 내 주요 유통사들이 매출을 선점하기 위해서 추수감사절 당일 오후부터 프로모션을 시작하는 형태로 변화해왔다. 그 결과, 법적 공휴일인 해당일에 매장을 열기 위해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당연히 출근 해야 하는 상황 역시 생겨났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집에서 머물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쇼핑을 하러 가거나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급여를 받으며 일하는 직원 입장에서는 회사에서 정한 프로모션 일정에 따라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가열되는 블랙 프라이데이 프로모션의 경쟁적인 시작 시간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물론,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휴일에 하는 추가 근무에는 조금 더 높은 임금이 지급되었을 것이고, 출근하느냐 마느냐 선택의 여지는 존재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일부 회사들이 다른 곳보다 조금 일찍 시작했던 상황은 결국에는 대부분의 많은 회사들이 추수감사절 저녁상에 오른 칠면조가 채 식기도 전에 문을 열기 시작하는 방향으로 변화했고, 결국 리테일 업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추수감사절 당일이 가족과 함께 하는 휴일 보다는 화끈한 세일기간의 시작의 날로 의미가 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

수년 사이에 엄청난 스피드로 변화한 각종 배달 서비스들의 편리함을 보며, 휴일에도 여는 것이 당연한 식당과 백화점들을 보며... 살기 편하기는 한국이 최고라고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격한 동의와 감탄을 연발하는 한편, 마음 한구석에서 어딘가 불편함도 함께 움찔거린다. 주야간 교대근무가 아니라, 야간에만 하는 근무형태가 처음 생겨나 노동법상 휴식시간에 대한 보장도 받기가 어려워 연이은 심야노동에 시달리다 돌연사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는 기사(참조 1)를 보고 난 뒤에는 더욱 그 불편함이 마음을 스친다.





시장의 흐름을 이끄는  회사들이 시스템이나 법안이 보조되지 않는 부족한 체계안에 사람을 갈아 넣어서는 굴릴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고. 소비자들이 선택 가능한 옵션 역시 "  빠른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현재를 보며 이것이 당연히 가야  방향인가 짚어보게 된다. 모든 혁신의 과정에서 우리는,  단계를 천천히 짚으며 나아갈 여유는 없었기에, 이로인해 생기는 문제가 결국 누군가의 어깨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내 손 끝에 떠있는 "주문" 버튼과,
이른 아침 현관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 도착해 있을 박스 사이를 스친
누군가의 밤이,
5일 연속 이어진 야간 근무로
켜켜이 쌓인 피로의 다른 말은 아니었을까.


한국에 돌아와 처음 맞게 된 2021년의 추수감사절.

당연히 미국 명절과 전혀 상관없이 고요하기만 한 한국에서, 메일함에 도착한 뉴스들을 열어보던 중 한 가지 재미있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타겟(Target)에서 이번 추수감사절부터는, 모든 지점이 휴일 당일에는 문을 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것.( 참조 2) 타겟뿐만 아니라 월마트와 트레이더 조 역시 앞으로 추수 감사절 당일 저녁에는 문을 열지 않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단다. 작년 한 해만 코로나로 인한 임시조치인 줄 알았더니 앞으로도 한 해 동안 수고한 임직원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쭉 이런 지침을 유지할 예정이라는 월마트 부회장의 말을 읽으며, 모두가 빨리 빨리 조금이라도 더 멀리, 많이 가려는 세상 안에서 '잠시'를 외치는 흐름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가 가족과 저녁을 먹으며 웃는 시간에,

다른 이들도 그렇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단잠을 이루는 밤에,

누군가의 밤도 단잠으로 가득하기를,

너무 힘들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

당면한 일들을 너무 빨리 처리하려다, 그 과정에서 다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아주 급한 것이 아니라면

좀 천천히 받아도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을 담고,

눌러야 할 주문 버튼을 바라본다.





[참고자료]

참조 1.

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desk/article/6303289_34936.html

참조 2.

https://www.prevention.com/life/a38331599/is-target-open-on-thanksgiving/


[그 외 참고할 자료]

박제성 한국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새벽 배송을 위한 야간 노동을 ‘규제 완화와 기술의 발전이 결합해 초래한 이윤추구를 향한 무한경쟁의 부산물’이라고 정의한다. 박 연구위원은 “새벽 배송은 이제껏 편리하고 유용한 서비스로만 인식돼 왔지 이면의 부작용은 알려지지 않았다”며 “새벽 배송처럼 기업의 이윤 극대화를 위한 야간 노동이 정말 필요한 노동인지 사회적 논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세계 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야간 노동을 2급 발암물질(Group 2A)로 규정한다.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도 야간 노동을 ‘유해 요인’으로 간주한다.


원문보기: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2011061524591&code=#c2b#csidx7d1c483a151e75daef139b56eabbf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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