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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Dec 02. 2023

난 너의 길을 제대로 열어주고 있는 것일까.

헤르만 헤세의 책 속 내 아이의 모습과 수학학원


얼마 전 긴 여행을 다녀왔다.


(돈을 버는) 일 할 때만 계획에 계획을 세우는 파워 J고 그 외 모든 삶의 부분이 매우 즉흥적인 P지만, 아이를 데리고 멀리 가는 여행에는 ‘준비 없음’이란 곧 ‘재앙’이 될 수 있기에,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서점에 들렀다.


요즘 세상에 누가 여행 간다고 책을 사냐는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었지만… 인터넷으로는 정보를 긁어모아도 박박 긁어모으는 느낌이 아니라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큰 빗자루로 훑는 느낌이라 아직도 난 여행지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표지에 딱 박혀있는 책을 선호한다. (이렇게 옛날 사람 티가 납니다..)


무슨 기밀이라도 들었는지 내용을 보지 못하게 비닐로 돌돌돌 말아놓은 여행섹션의 책들 사이에서, 표지의 폰트와 배경색상을 기준으로 책을 골랐다. 내용을 못 볼 때는 편집자의 센스를 믿어보는 것이 나쁜 선택이 아니길 바라며.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골랐는데,


흠.

무료 주차등록을 위한 최소구매 금액이 3만 원이란다. 이렇게 또 책을 살 좋은 핑계가 있나 싶어 다시 서가로 돌아서서 금액을 채울 겸 읽고 싶던 책들과 필요하다 생각했던 책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거리며 몇 권을 더 손에 얹어 계산대로 향했다.

그날.

그렇게 덤으로 우리 집에 온 책이 바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였다.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보았을 작가의 이름과 제목도 열일했지만, [위선적이고 비인간적인 교육 제도에 파괴된 어린 영혼]이라는 띠지의 글귀가 손을 이끌었다. 세상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원서 느낌을 한껏 살린 책의 원 표지는 눈에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교육제도" "파괴" 같은 글씨에 훅 꽂혀버린 것.

“비인간적인 교육제도”라.

어떤 제도를 “비인간적”이라 칭한 것일까?

자전적 소설이라면.. 헤르만 헤세도 어린 시절 엄격한 교육을 받았던 것일까?


극 중 한스는 신학교에 가기 위한 입학시험을 치른다. 극의 초반부를 이어가는 것은,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준비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한스의 모습과 함께 그 와중에도 주변 어른들의 기대와 격려에 자기 세뇌를 반복하는 한스의 모습이 등장한다.

한편 한스는 어린 시절의 즐거움을 포기한 대가로
이 방에서 더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자부심과 승리감에 휩싸여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꿈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자신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뛰어나서,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어 언젠가는
높은 자리에서 친구들을 내려다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한스는 이런저런 상상의 날개를 펴며
몇 시간을 보낸 뒤,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P.24 /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헤세, (주)미르백 컴퍼니 발행]


왜 시험을 쳐야 하는지.

왜 신학교에 가야 하는지.

왜 남들보다 뛰어나게 되어서 높은 자리에서 친구들을 내려다보고 싶은지.


이런 부분에 대한 한스의 고민에 대한 답은, 대부분 그를 둘러싼 어른들이 내려주고 있었다. 거의 마을을 대표하는 학생이 되어 시험을 치는 한스를 향한 교장선생님과 부모님의 기대와 흥분을 고스란히 떠안은 어린아이의 마음. 그런 아이가 시험장에서 처음 만난 큰 도시(괴팅겐)에서 온 친구를 보며, 그간 '신학교'만이 유일한 답이라 고등학교 과정으로 진학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기도 한다.


시험, 긴장, 불안, 합격 후의 들뜸.

합격 후 이어진 신학교 생활에서 맞이하게 되는 친구들과의 갈등, 방황.

사춘기에 나누는 우정 속에서 고민하게 되는 삶의 의미.

멀어지는 공부와 함께 낮아지는 주변의 기대와 실망들.

신학교를 나온 뒤 평생 절대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직업을 하게 된 뒤 느끼는 패배감.

피폐해 가는 정신과 열등감, 우울증.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19세기말의 독일 사회를 배경으로 쓰인 책인데, 읽는 내내 어딘가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 계속 반복적으로 들었던 것은 2020년대를 지나고 있는 한국의 교육제도는 물론 아이들을 대하는 사회의 방식과 비슷한 부분들이 계속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은 자기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
열 명의 보통 학생들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선생님의 역할은
빗나간 학생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와 수학을 잘하는
성실한 인간을 키워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P.138 /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헤세, (주)미르백 컴퍼니 발행]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 수학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던 우리 아이의 얼굴이 책 속에 있었다.

한국나이로 만 9세, 3학년이지만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가 외국인 학교라 아이는 이미 9월에 4학년을 시작했다. 매일 책가방에 간식과 물만 싸서 들고 다닐 뿐, 딱히 공부 같은 것을 하는 것이 보이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한국에 와서 학교를 다니면서 또래 그룹에 껴서 놀며 학교에 적응하는 것에 애쓰고 있는 것만도 안쓰러워 그저 즐겁게 가주기만을 바라던 시간이 지난 2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4th grade 4학년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 책을 가져온 아이를 보며, 그동안은 '아직 어리니까..'라는 생각에 크게 개념치 않던 아이의 학습 상황에 대한 걱정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고민 끝에 동네에서 가장 큰 버스를 운영하는 수학학원을 보고, 레벨테스트를 예약했다.


버스와 학원 선택은 무슨 상관인지 물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 버스 사이즈가 크니->아이들 등하원 시의 안전에 더 신경을 쓸 것 같고 -> 아이들을 전반적으로 더 잘 신경 써줄 것 같은데?] ……라는 굉장히 단순한 사고의 결과였다고 부끄럽게 고백해 본다. 수학을 잘 가르치느냐는 둘째고 일단, 아이들의 기본인 안전에 더 신경을 쓸 듯해서 덜컥 찾아간 그 학원에서 나와 아이는 '레벨테스트'라는 시험과, 충격적인 결과를 함께 마주했다.

한국 나이로 3학년이면 이미 4학년 2학기 정도는 진도를 나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수준이라는 안내와 함께 어느 정도 선행을 하고 있는지 질문을 받았고, 이를 토대로 진행된 레벨테스트였지만, 결과와 함께 받아본 시험지 속의 문제들은 이중언어를 배우느라 언어가 비대칭으로 성장 중인 아이의 한국어 실력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복합적인 문장들의 나열이었다. 시험 후 받아 든 결과를 보며 굳어지는 얼굴을 도무지 펴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그날로 등록한 학원은,

일주일에 3번. 한 번에 2시간씩 수업이 진행되었다.

월, 수, 금 3시에 학교가 끝나자마자 달려가 2시간을 내리 수업하려면 학교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놀 시간이란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숙제는 매일 저녁 10시까지 아이를 책상에 묶어두었다.

숙제와의 전쟁에 주말을 써본 적이 없는 아이는, 분명 빨간 날인데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이 강을 이루도록 울고 난 뒤에야 책상에 앉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더불어, 다음 시간까지 숙제를 해오지 못하면 받는다는 벌점에 대한 아이의 공포는 상상이상이었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하시기에 이토록 숙제를 해가야 한다는 생각이 또렷하게 생긴 것인지 신기할 지경이기도 했다. 그렇게, 알지 못했던 세계에 발을 디딘 아이와 그 곁의 나는 매일 밤 이어지는 숙제와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수월치 않은 한국어 때문에 기본적인 수학적 정의에 대한 설명부터 되짚고 되짚어보아야 하는 우리에게, 또래의 한국 친구들은 1시간이면 끝낼 숙제가 3시간이고 4시간이고 이어졌고.

놀지 못하고. 숙제를 하느라 쌓인 스트레스에 넉다운이 된 첫 주말을 지나며 아이는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주말이 안 기다려질 것 같아.


그렇게 두 주가 지났을까.

처음 들어갈 때 기록적인(반어법입니다 여러분...) 점수를 세워서 모두를 놀라게 했던 것과 달리, 두 주 만에 진행된 주간평가에서 아이의 점수는 놀라울 정도로 올라있었다. 더불어, 학원의 같은 반에서 사귄 한국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과도 그새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학원생활의 흥미도 높아졌다. 그렇게 점수의 변화가 느껴지니, 한번 숙제하려면 하기 싫어 눈물이 먼저 터졌었는데 이제는 숙제를 펴놓고 척척 하기 시작했고, 주말에도 문제집을 끼고 앉아 있는 모습이 조금은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늘 에너지와 생기가 넘치던 아이 얼굴이 눈에 띄게 혈색이 안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에는 적어도 한 시간은 하던 운동들을 하나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수면 시간은 훅 줄어들었으니까. 장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좋아하는 낚시도 포기하고 취미로 기르던 토끼들도 빼앗긴 채, 매일 4시까지 이어지는 학교 수업에 이어서 특별 과외까지 소화하고 6시까지 복습한 뒤에도 이어지는 과제 속에 11시, 12시까지 잠들지 못하던 한스의 모습은 시간과 대륙을 건너 2023년 서울 우리 집에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결국 내 입에서 먼저

우리 이 학원 그만두고,
수업시간이 더 짧고 적은 곳으로 옮길까?

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인생은 길고,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사는 내내 반복해야 할 일인데… 너무 지쳐버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더불어 일주일에 3번을, 등교를 위해서 아침 7시 30분에 나간 아이가 6시 반에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생활을 지켜보며 계속 가슴 아파할 자신이 내게는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내 질문에 아이의 답은.

 아니, 좀 더 다녀볼래 엄마.

바로 그만두겠다 할 줄 알았는데 거꾸로 놀라게 한 아이의 말, 그 이면에는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한번 맛본 성취감과 또래 친구들 사이의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조바심이 엿보였다.


고민의 포인트는 이 지점이었다.

(어렵다고 해서 너무 일찍 포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은 듯도 하니…)
계속 다니겠다는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줄 것인가?

아니면...

아이는 아이의 상태와 미래의 모습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니,
어른인 우리의 판단을 믿고 그만 두자

고민에 고민이 이어졌다. 조금 더 보내면, 이미 지난 짧은 기간 동안 보여준 놀라운 점수 상승이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아이의 체형도 다크서클의 깊이도 놀랍게 변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학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속도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아이의 모습 앞에 우리의 선택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느껴졌으니까.


우리의 결정은 '중단하고 좀 더 짧은 시간의 수업시간, 적은 숙제가 있는 곳으로 옮기자'로 마무리되었다.

때마침 갑자기 떠나게 된 여행을 기점으로 수학 학원에는 안녕을 고했다. 비록 단시간에 놀라울 정도의 향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타이트한 학업관리도 중요하지만, 아직 만 9살이라는 나이에는 좀 더 자고 좀 더 놀며 훗날의 언젠가를 위한 에너지를 비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내린 선택이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고 전력투구하는 시점이 학창 시절이라면 가장 좋겠지만, 그 시점이 더 뒤라 하더라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전력투구 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를 바라면서.

물론. 이런 선택에 불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일주일에 세 번 가서 매 번 두 시간이 넘게 수업이 진행되는 수학학원 대신, 일주일에 딱 한 번 가는(+ 숙제도 적은..) 학원으로 등록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새 학원의 레벨테스트가 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 각. 보. 다. 잘 본 레벨테스트 결과를 듣고 ’엇... 고새 좀 늘었네. 이전 학원이 잘 가르치는 것 같긴 한데... 그냥 계속 보낼 것을 그랬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올라온 것 또한 진실.

우리의 선택이 그저 근성을 기르지 못한 실패였는지, 훗날의 에너지를 위한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아주 먼 미래의 아이가 보여줄 부분일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그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지금은. 지금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향해 한 발 걸어 보기로. (몇 년 후에 이 글을 되돌아보며 ‘으이그…..‘라며 혀를 끌끌 차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책 후반부에 수록된 작품해설에 따르면, 19세기말 독일에서는 청소년의 자살, 특히 군사학교나 기숙학교 학생들의 자살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두드러진 교육 체계와 학교 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지금 독일의 학생들은 ‘수레바퀴 아래서’에 등장한 학생들보다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단다. 독일도 무수히 많은 아이들을 잃고서야 지금 을 맞이했다니, 마치 독일의 옛 시절에 지금 서있는 것 같은 난 혹시 나의 선택으로 아이를 원치 않는 곳에 세워두게 될까 봐 두렵다.


내 삶보다 더 답을 찾기 어려운, 작은 사람의 자라는 길을 가꾸는 일. 

그 많은 일들 중 가장 중요하지만 어려운 교육, 

특히 사교육 시장에서 내 중심을 잡고 있기란 참 어려운 미션이다 싶다.

부디.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길 바라며...


오늘은, 좀 더 자고, 좀 더 뛰어노는 아이 곁에서 우리의 선택을 믿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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