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취향을 더해 나를 만드는 것 vs 내가 좋아하는 것
한국에서 낯선 이에게 말을 걸면 '도를 아십니까'로 오해받는 것과 반대로 말을 건네지 않으면 사회성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문화에서는 wall flower(:모임에서 상대 없이 혼자 있는 여성을 일컫는 말)는 그대로 벽에 붙어 말라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입이지만, 살기 위해 용기를 내다보면 종종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죠. Good Morning, Hello로 시작한 인사가 아이는 어느 학교 다니는지, 무슨 일 하는지로 대화가 넓어지다가 간혹 그 안에서 보석 같은 인연들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 날도 어쩌다 보석을 집어든 그런 날 이었어요
언어란 참 독특한 물성의 것이라 다른 것들과 섞이면 더 도드라지게 느껴지죠. 영어의 바다 가운데 동동 떠있던 한국어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녀를 만난 것도, 바로 그 작은 '말'이 시작이었어요. 그날, 놀이터에서 저를 부르던 아이의 "엄마"라는 한국어 소리는 수많은 소음들 속에서도 그녀의 귀를 찾아갔고, 이국에서 한국인이 아닌 남편과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고 있던 그녀를 제 곁으로 불러왔습니다.
우리 아이보다 한참 어린, 걸음마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걷는 것이 너무 즐거운 나머지 보는 부모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작은 꼬마 곁의 그녀와 저는 한국인이라는 동질감에 반가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중학교 때 이민온 미국이었지만, 자식들이 다 커서 성인이 되고 각자의 가정을 꾸린 뒤 부모님은 한국에서 노년을 보내고 계시다며 한국에 간지 오래라는 그녀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한국 부모님 곁에서 살고 싶겠어요... "
그녀가 답했습니다.
"늘 돌아가고 싶죠. 지금 결혼해서 여기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마음은 늘 한국에 있어요."
그리고 그 해 여름, 쉽지 않았던 임신과 일 때문에 갈 수 없었고,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장시간 비행기 타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서 거의 5년이 넘게 한 번도 가지 못한 한국을 간다며 그녀는 꽤 한동안 들떠있었습니다. 아주 길게 휴가를 내고 마음먹고 가는 길인지라, 오랜만에 중학교 때 친구들도 다 보기로 했다며 어떤 선물을 좀 사가는 게 좋겠냐 묻는 질문에 나름의 조언을 건네며 즐거운 여름을 응원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바쁜 계절을 지나갔습니다.
오트밀크에 튜머릭을 넣은 '골든라테'와 호박향기가 솔솔 나는 '펌킨라테'가 카페에 등장하기 시작한 초가을. 각자의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우리는 다시 마주 앉았습니다. 조용히 일상의 이런저런 크고 작은 일들, 학교는 다르지만 아이의 새 학년과 새 선생님들, 바뀐 내니에 적응 중인 언니의 아이와 둘째를 가지려고 시험관 시술을 다시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여름방학으로 우리의 시간이 돌아갔습니다.
"다시 안 가려고요."
"왜요?"
"…그 호텔 알죠? 망고빙수 유명한 곳."
"알죠, 근데.. 호텔이 왜요?"
운동을 좋아해서 계절 상관없이 건강하게 탄 피부로 청바지에 나시를 즐겨 입으며 특유의 건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던 사람이었기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그녀였지만, 간간히 이야기하는 한국에서의 추억을 듣다 보면 적어도 저보다 10살 정도는 위라는 것을 짐작했었습니다. 40대 후반의 여성으로 그녀 세대의 평균적인 한국의 결혼 연령을 고려해 볼 때, 기혼에 자녀가 있다면... 보통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분들이라 짐작할 수 있었죠.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일테니, 다들 조용하고 널찍한 곳에서 보자고 한 것 아니겠냐는 제 말에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제 옷이 문제더라고요."
만나는 친구들마다 약속 장소를 다들 그 호텔 로비의 카페로 잡은 것도 신기했는데, 또 다들 같은 곳에서 사 입고 온 것처럼 비슷한 스타일의 옷에 같은 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나온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일하는 날에는 슈트나 정장류를 입고 고급 백 역시 넘칠 만큼 있지만, 재택을 하거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때에는 청바지에 슬리퍼나 운동화를 신고, 비싼 브랜드 가방보다는 그때 그때 적절한 사이즈의 실용적인 가방을 선호하던 그녀였습니다. 뉴욕에서는 별로 특이하거나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던 그녀의 복장이 [나이와 장소에 적절치 않는 어떤 것]이 된 거죠.
"난 그냥, 여행으로 한국을 간 거고...
친구들 만나는 자리니 편하게 지금처럼 입고 검은색 배낭 메고 청바지 입고 간 건데,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미국에서 무슨 일 하냐고요."
직업을 묻는 것 같은 질문이지만,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암묵적인 룰-고급스러운 복장-을 깬 그녀를 에둘러 비난하는 말이란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이야기를 함, 그녀의 말에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문화가 존재하고 이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여러 가지지만, 법과 규범이나 예절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아래와 같이 3가지 범주로 나누어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Guilt culture : 죄책감 문화],
[Shame culture : 수치심 문화],
[Culture of fear :두려움 문화]
대충 분류명만 들어도 감이 오듯, 어떤 방식으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사회를 유지하는 도구로 삼는지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00을 하면 부끄러울까?" 또는 "내가 00을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날 생각할까?" 이런 질문을 되뇌어본 적이 있고, 그에 따라서 내가 하는 어떤 행동을 바꾸어 본 경험이 있는 곳이라면 '수치심 문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질문 같지 않으신가요?
질문을 좀 바꾸어서 다시 이렇게 써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좀 추운데...
롱 패딩 입으면 이상할까요?"
"학부모 총회인데
이런 스타일 너무 유난스럽나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주 목격되는 이런 질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패션이 자신의 기호나 성향에 맞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장소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드레스코드가 명시되지 않고 자유로이 즐기는 장소에 가는 상황에서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확인하려 노력하는 문화가 있다 보니, 학교에서 하는 행사나 회사에서의 복장 등에 더더욱 엄격한 기준이 생겨있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한국 사회에 잔잔하게 깔려있는 '수치심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죠.
때로는 소속되어 있는 조직의 암묵적인 규범이 법과 같은 절대적인 기준을 넘어 작용하기도 해서 "공정성"을 훼손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도 이 수치심이 중요한 척도가 되는 사회가 가진 어두운 면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지금 나의 상태가 문제없는지를 체크해야 하기에 개인이 가진 피로도가 상당하죠. '개인'의 생각이나 성향보다는 '집단'의 성향이나 생각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고 그 결과, 보이지 않는 다양한 기준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많이 들어본 몇몇 단어들이 바로 그런 예가 됩니다. 모두가 당연한 듯 따라야 하는 규칙이라는 뜻의 [국룰]이나, 끊임없이 사는 내내 비교 대상이 되는 [엄친딸] 같은 단어들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이 자신의 행동을 규제할 때에만 쓰인다면 개인의 문제로 끝날 텐데, 타인 역시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그룹의 가치 기준을 중심으로 적절하다 부적절하다 판단하려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날, 호텔 로비에서 그녀가 마주한 친구는 그런 판단을 입 밖으로 꺼내서 전하는 것이 당연히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두 사회의 차이가 전반적으로 미국이나 유럽의 같은 연배의 젊은이들과 비슷한 가치를 지양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의 젊은 세대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소비 패턴을 통해 살펴볼까요.
오픈 서베이에서 2022년 9월에 발행한 리포트를 보면, [물건의 구매 시에 영향을 주는 기준]이 미국에서는 "기업이나 브랜드의 공식 홈페이지 정보"라면, 한국에서는 "주변 지인들의 추천"이 됩니다. 주변사람들도 인정하는 무언가를 구매하는 것이, 객관적인 기업의 제품에 대한 정보보다 우선시된다는 지표는 무채색 계열의 통 넓은 바지에 카메라 가방을 든 사람을 한 명 지나치면 또 하나 걸어오는 성수동이나, 크롭티에 밝게 염색한 머리 스타일에 커플 신발을 신은 사람들이 많은 강남역을 설명하는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한국으로 좀 더 범위를 좁혀 세대별 구매 패턴을 살펴보면 또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더 보입니다.
그 주변 '지인'의 범위 내에서는 나이가 어려질수록 친구보다 인플루언서의 영향이 구매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죠. 과거에는, 따라야 하고 더 신경 써야 하는 눈이 직접 만나는 가족이나 친구였다면 지금은 만날 수 없더라도 온라인 공간 내에서 더 크게 형성되어 있는 팔로워 그룹 내에 속하며 그 안의 모두가 함께 인플루언서가 제안하는 제품을 함께 구매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큰 차이로 보이는 거죠. (아래 자료)
더욱 개성이나 자기표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세대지만, 그 개성의 영역이 "집단이 인정한" 범위 내에 있을 때에만 인정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갸웃해 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인플루언서들... 주로 SNS를 통해서 접하게 됩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내의 이들의 삶을 보고 거기에 영향을 받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은, 거꾸로 뒤집어 보자면... 이들의 화려한 삶과 나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할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플루언서의 힘과, 자살률의 상관관계
앞서 다른 글들에서도 몇 번 이야기해 본 적이 있지만,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습니다.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이 감소하고 있는 양상과는 달리, 한국은 최근 10년간 급격히 증가했고 2011년 OECD 평균 12.4에 비해 100,000명당 33.3명의 사망률로 최고치를 기록한 후 줄곧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높아지는 자살률에서 더 위험군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 바로 "여성들"이라는 점 역시 현재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한시가 급하다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Economist 웹사이트에서는 2003년 이후, 10만 명당 자살률을 기록한 차트를 성별로 볼 수 있도록 해두었는데요, "Female(여성)"로 설정한 결과 값을 보면 위와 같이 20대와 30대에서 최근 들어 가파르게 자살률이 올라가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래 차트)
자, 그럼... Male (남성)으로 결괏값을 보면 어떤지 한번 볼까요? 아래의 차트와 같이 특히 최근 들어 감소하고 있는 모양이, 여성들의 자살률을 보여주는 그래프와는 확연하게 다른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왜 뜬금없이, 인플루언서가 구매 결정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를 보며 전 이 데이터가 떠올랐을까요.
얼마 전 사회 심리학자인 조나단 하이트 Jonathan Haidt는 그의 최근 책 "The Anxious Generation"에서, 그는 사람들이 막연히 '스마트폰'과 'sns'로 인해 우리의 집중력이 흐려지고 각종 불안과 우울증을 야기한다는 '가설'을 연구를 통해 증명이 가능한지 접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확인 가능한 다양한 수치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스칸디나비아 등 국가를 가리지 않고 2012년을 중심으로 동일하게 나타나는 발생된 충격적인 결과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스타그램이 페이스북에 매각되고, 이 두 가지 sns의 폭발적인 사용 증가와 스마트폰으로 얼마든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요금제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던 2012년이 여자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했던 것입니다. 여자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은 "정신 건강 위기"라고 불릴 만큼 전 세계가 비슷한 시기에 극도로 악화된 것이 발견된 거죠. 반면, 남자아이들의 경우는 자살이나 우울증 쪽으로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학업적인 부분이나 학교 생활에서 낙오되는 케이스들이 증가했다는 점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자아이들이 높은 성적을 유지하고 남자아이들의 학력저하가 심각한 상황 역시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가리지 않고 급증하고 있는데, 수도 없이 울려대는 알람에 영향을 받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지만... 남자아이들이 좀 더 영향받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볼 부분이죠?)
조나단 하이트의 책은 미국에서 발간되었지만... 미국보다도 스마트폰 보급율이 높은 한국에서 이와 같은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은, 2012년 천장을 뚫을 듯이 올라간 20-30대 여성들의 자살률 그래프를 보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연결되고 싶지 않아도 24시간 연결된 세상 속에서, 주변에 만날 수 있던 타인들의 삶이 아니라 만날 수도 없는 무수한 온라인상의 행복의 찰나를 보며 자신의 현재를 비추어 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수치로 증명하고 있는 한국은 '수치심 사회'에 떨어진 SNS 한 방울이 어떤 파장을 가져오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학교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볕이 너무 따가워서 좋아하는 모자를 하나 쓰고 갔습니다. 모자 옆에 제 이니셜도 새겨져 있는, 친구와의 추억이 들어있는 모자였죠.
그런데, 그날 집에 오는 길에 아이가 나지막이 말을 건넸습니다.
"엄마. 그 모자 쓰고 학교 오지 마."
"왜?"
"다른 엄마들은 그런 모자 안 쓰잖아."
"다른 엄마들이 안 쓰면 엄마도 안 써야 한다고 생각해?"
"응. 여기는 한국이니까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럼 미국에서는 괜찮아? “
"거기는. 미국이니 괜찮아."
모자를 들고 다시 한번 거울 앞에 서서 가만히 제 모습을 바라봅니다.
전 모자를 쓰고 있는 제 모습을 더 좋아하는데,
써도 되겠냐고 나에게 물어야 할지 사람들에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는 시간이 흘러갑니다.
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참고 자료
1. 세 가지의 다른 형태의 사회에 대한 설명 :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Guilt%E2%80%93shame%E2%80%93fear_spectrum_of_cultures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성격의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아폴론'의 성격을 바탕으로 가정된 "아폴로니아" 사회 속에서, 그들이 개인(특히 어린이)을 통제하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감정에 따라 그들을 분류했습니다.
죄책감 사회에서는 특정한 비난받는 행동에 대한 죄책감(그리고 향후 벌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강화함으로써 통제가 유지됩니다. 죄책감의 세계관은 법과 벌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유형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내 행동이 공정한가 불공정한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유형의 문화는 개인적 양심을 강조합니다.
수치 사회(때로 명예-수치 문화라고도 함)에서는 수치의 인도와 보완적으로 퇴출의 위협을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수치-명예의 세계관은 "명예 균형"을 추구하며 복수의 역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내가 X를 하면 수치스러워 보일까?" 또는 "내가 Y를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바라보게 될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수치 문화는 주로 자존심과 명예의 개념에 기반합니다. 종종 행동들이 모두 중요하고 중요합니다.
두려움 사회에서는 보복의 두려움을 통해 통제가 유지됩니다. 두려움의 세계관은 신체적 지배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문화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하면 누군가 나를 다치게 할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2. 한국과 미국의 인플루언서 마켓의 차이점
쇼핑부터 SNS까지, 한국·미국 Z세대 디지털 라이프 얼마나 비슷할까
https://blog.opensurvey.co.kr/article/gen-z-2022-2/
3. 인플루언서에 대한 중앙일보의 특별 기획 기사
인플루언서 과잉 시대..."영향력이 돈" 팬덤몰이 광풍, 상업성 지나쳐 '디인플루언싱' 현상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51726#home
5. The Anxous Generation의 저자인 조나단 하이트 Jonathan Haidt의 인터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w8MjG_aVwRI
6. OECD 통계 자료 중 한국의 자살율 관련 자료.
https://www.oecd.org/els/health-systems/MMHC-Country-Press-Note-Korea.pdf
7.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자살율 관련 기사 중, 성별에 따른 레포트
8. 남학생의 성적 저하에 대한 조선일보의 기획기사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19/20171219003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