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날아가는 새들, 내 품을 떠날 준비를 하는 너.
짠맛의 바람이 불어오는 깊은 밤 해안가 절벽 작은 동굴 안. 홀로 남은 퍼플링이 엄마를 부릅니다.
하지만, 아무런 답도 들을 수 없죠.
아무리 불러보아도, 엄마도 아빠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엔, 비슷한 크기의 다른 친구들도 홀로 남겨진 것이 보입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퍼플링들은 각자의 둥지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오래지 않아 배고픔이 엄습합니다. 점점 배는 고파오고, 어쩔 줄 모르며 자리에서 날개를 파닥여 보아도, 몸은 떠오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먼저 용기를 내서 절벽 끝에서 바다로 몸을 내던진 퍼플링들이 저 멀리 작은 점이 되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둥지에 남은 다른 퍼플링들도 용기를 냅니다.
한 발, 두 발. 뒤뚱뒤뚱 둥지밖으로 나와 절벽 끝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몸을 가누어보는데, 바람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는 것이 느껴집니다. 무섭지만 방법이 없어요. 저 멀리 보이는 달을 향해 눈을 감은 채 있는 힘껏 날개를 펴고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립니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생각하던 찰나, 몸이 붕 떠오릅니다. 날개 아래로 떠받쳐준 바람이, 멀게만 느껴졌던 달 가까이로 실어가는가 싶어 신이 나려던 찰나.
... 쿵!!!
눈을 뜨니 처음 보는 느낌의 차가운 바닥 위입니다. 분명 달처럼 둥근 것이 눈앞에 있었는데, 어디인지 혼란스러운 퍼플링들 앞으로 사람들이 달려옵니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엄청 억울하게 생긴 눈에 부리는 그 누구보다 화려한 무지개색을 뽐내는 '퍼핀 Puffin'은 아이슬란드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이 퍼핀의 새끼들을 "퍼플링 Puffling"이라 불리죠.
그런데, 이 퍼핀들, 퍼플링 양육에 있어서는 이보다 단호할 수가 없습니다. 귀여운 아기 퍼핀-퍼플링들이 날 준비가 될 정도로 좀 컸다 싶으면, 부모인 퍼핀들은 과감하게 새끼만 남겨두고 떠나버리고, 그 후 퍼플링들은 스스로 둥지를 떠나 바다로 날아가 몇 년 동안 바다에서 지내게 됩니다. 바로 이 시점이, 이 작고 귀여운 퍼플링들에게 각자도생의 세상이 펼쳐지는 때죠.
아직 혼자서는 날아오르기 어렵고 글라이더처럼 공기를 타고 활강하는 것 정도만 가능하기에 높은 지대에서 바다 쪽으로 몸을 던져 물고기 사냥을 나가야 하거든요.
그런데 현대문명의 발달이 이 귀요미들에게는 큰 위기가 된 듯합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달빛을 따라 바다를 찾아 나가야 하는 퍼플링들이 도시의 불빛을 달로 착각하고... 항구, 골프장, 또는 건설 현장과 같은 곳으로 모여드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8월에서 9월, 아이슬란드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웨스트맨제도(베스트만나에이야르Vestmannaeyjar)를 방문하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밤 9시가 넘으면 손전등과 상자를 들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길가에서 회색 솜뭉치 같은 작은 새들을 주워 담는 ‘퍼플링 시즌’을 경험하게 됩니다. 도심 곳곳에 불시착한 퍼핀의 새끼들인 퍼플링들을 구조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2017년에는 이렇게 구조된 퍼플링들이 5천 마리에 육박한다니.... 아마도 거의 한, 두 걸음마다 퍼플링들을 주워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렇게 도심에 불시착해 사람들의 손에 구조된 퍼플링들을 지켜보며 저는 제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6월의 세 번째 주 월요일
얼마 전부터 낮 기온 30도를 넘기기 시작한 날씨에, 이제 정말 여름이 시작인가 생각하며 지하철 역 출구 앞에 서 있었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로 피해보았지만, 크게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공기가 이미 뜨끈합니다. 지하 4층까지 연결된 승강장에서부터 올라온 사람들의 얼굴에는 땀과 지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이제 겨우 여름 시작인데 벌써 새카맣게 그을린 피부로 노란색과 분홍색이 섞인 타이다이 티셔츠를 입은 우리 아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절 보자마자 환하게 웃던 아이가 말합니다.
"친구들이랑 오는 것 재미있는데,
힘들었어 엄마. 가방이 무겁더라고."
새로운 모험에 눈은 생기가 가득했지만, 더위와 땀에 묶은 머리는 이미 목덜미에 달라붙어 있었고 노트북과 책, 그리고 물통까지 들어 무거워진 책가방에 눌린 어깨는 한층 더 쳐져 있었습니다.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수업까지 듣고 난 뒤라, 점심시간 언저리에 이미 오후 5시 같은 얼굴을 한 아이를 보며 가슴 한편이 찡했습니다.
한국의 학교들의 여름방학은 7월 말에나 시작한다는데, 미국 학제를 따라 운영되는 외국인 학교의 여름 방학은 6월에 이미 그 시작을 알렸습니다. 유치부 과정부터 5학년까지가 초등학교에 해당하기에 이제 여름방학이 끝나는 8월이면, 아이도 초등 과정의 마지막 학년을 맞이할 예정이죠. 그래서 이번 여름, 고심이 깊었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바다와 자연 속에서의 방학일정을 캔슬하고 한국에 있기로 결정한 것도 이런 고민의 결과였죠.
그러던 중, 마침 같은 반 친구들이 많이 간다는 여름 특강이 있는 학원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강 자체의 내용보다, 비슷한 동네의 친구들과 함께 새롭게 도전해 볼 수 있는 의외의 미션이 흥미로운 곳이었어요.
부모님 없이, 친구들과 함께
학원이 위치한 곳은, 출퇴근 시간에는 꽉 막혀있는 길 한가운데 있는터라 차로 가기에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데, 지하철로는 딱 6개 정류장을 10분만 타면 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아이들끼리 똘똘 뭉쳐서 학원과 집을 오가는 방향을 생각 중이라는 말씀을 주시는 게 아니겠어요.
13세 정도까지 부모나 그 외 다른 성인 보호자의 보호아래 모든 것을 하는 뉴욕의 어린이들에 비해, 한국의 경우 꽤 많은 아이들이 굉장히 어린 나이부터 혼자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웃인 일본의 경우는 여기서 한 술 더 떠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지하철을 혼자 타고 등하교를 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보자면... 벌써 4학년이 끝난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오간다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싶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회사일로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에 하교는 어렵더라도 등교는 꼭 엄마 아빠가 함께 데려다 주려 애쓰다 보니 개인 차로 오갔었고, 제가 프리랜서로 일하며 시간을 좀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뒤에는 그동안의 빈자리를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에 등교와 하교는 물론 가까운 거리의 학원도 늘 함께 손잡고 오갔었죠. 그러니,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나 다른 보호자와 떨어져서 이동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방학중에 학원이라는 이야기에 "안 갈 거야~!"를 외치던 아이가 "친구들과 지하철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너희들끼리 오고 갈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제 말에 "... 그래? 그럼 갈래!"라고 마음을 바꾸며 호기심을 보였어요. 아이에게도 '엄마 곁을 떠나' 낯선 곳을 친구들과 함께 오가며, 약간의 모험을 해본다는 사실‘이 들뜨고 흥미롭게 느껴졌나 봅니다. 학원이라면 절레절레하던 아이가, 냉큼 가겠다고 할 정도로 말이죠.
그렇게 새로운 모험이 더해진 방학중 학원의 시작 첫날, 청소년용 T머니 카드를 손에 쥐어주고, 옆에서 쉴 새 없이 "여기야, 개찰구를 통과한 뒤 00선의 ㅁㅁ 방향에 서서 6개 정류장을 가면 돼~기억해, 알겠지?"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들의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아이들은 알아서 길을 잘 찾아갔습니다.
사실, 오랜만에 "걱정인형" 모드가 잔뜩 활성화된 저는 '혹시 지하철에서 이상한 아저씨가 말 건다고 따라가면 어쩌지, 늘 주변도 잘 안 살피고 다니는데, 지하철 계단에서 친구랑 이야기하며 내려가다가 구르거나 하지는 않겠지, 가방 잘 열고 돌아다니는데 노트북이나 지갑을 잃어버리는 일은 안 생기려나... 등등등' 갖가지 고민을 보따리로 쌓아두고 있었는데, 그런 제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들은 담담하게 자신의 방향을 찾아갔습니다.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되자, 문자함이 울렸어요.
"엄마, 학원 끝났어."
그리고 또 잠시 후.
"I'm on subway now.(지금 지하철역이야)"
그리고 또 몇 분 뒤.
"2 stations ahead.(2 정류장 남았어)"
문자로 아이의 이동상황을 확인하며, 집 근처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가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첫날 아이들을 지켜보러 가신 다른 친구 어머님께서 보내신 다른 문자가 하나 또 도착했습니다.
"잘 찾아가는지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는데 알아서 길을 너무 잘 찾아가네요."
제 생각보다 아이는 더 훌쩍 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히 미션을 성공한 아이였지만, 무거운 가방과 더위에 물미역이 되어있더군요. 아마도, 생각보다 꽤 긴장도 하지 않았나 싶었어요. 집으로 돌아와 시원한 음료수와 과일을 들고 아이 방에 들어가 내려놓으며 물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엄마가 데려다줄까?"
"엄마 힘들잖아. 나 데려다주는데 오래 걸리고, 또 한참 기다렸다가 데리고 와야 하고."
"아냐, 엄마 괜찮아. 친구들이랑 같이 가도 되고, 가방 무거워 힘들면 엄마가 차로 데려다줄 수도 있어. 엄마가 네 수업 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같이 오면 되니, 생각해 보고 알려줘."
퍼플링 시즌(Puffling season)에 도심 곳곳에서 발견된 퍼플링들은 주민들과 환경보호 단체 회원들로 구성된 [퍼플링 구조대]에 의해서 조심스레 상자에 담겨 인근의 바닷가 근처의 절벽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의 손을 빌려 한번 더 날아오른다고 해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마치 체육관에서 케틀벨을 들어 올리듯 양다리를 넓게 벌리고 두 손 가득 퍼플링을 잡고, 아래에서 위쪽으로 힘껏 반동을 주어 퍼플링을 날려 보내는 거죠.
친구들과 함께 하는 모험에 신은 났지만, 통학이 버거웠던 아이에게 데려다주겠노라 이야기를 꺼내놓은 이유는… 사실, 아이를 데려다주고, 기다렸다 데리고 오는 그 시간을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집에 있더라도 거실에서 영화를 보기보다는 방에서 작은 패드로 홀로 자신만의 콘텐츠를 보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고, 부모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 못지않게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이 더 즐거워지기 시작한 아이는 하나씩 하나씩 자신만의 세상을 만드느라 바빠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세계로 걸어가는 중인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함께 보내자고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이 저라는 사실을, 말을 꺼내놓고 새삼 깨달았죠.
손안에 쥐고 있을 때는, 너무 가벼워서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퍼플링이지만. 날려 보내고 나면 허전한 손 끝이 느껴져서 어딘가 마음이 뭉클하다 말하는 퍼플링 구조대원들의 인터뷰를 보며, 그들이 느끼는 허전함이 어느 날엔가는 제가 느끼는 마음이 될 것이다 싶습니다. 제 품 안의 아기새도, 제가 아무리 잡아도 굴 밖의 바다를 향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날아오를 준비를 할 날이 곧 올 테니까요. 그리고 그날이 정말 코앞이라는 사실도 이번 여름 알게 되었습니다. 적당히 자란 새끼가 스스로의 길을 박차고 나갈 수 있도록 과감하게 남겨두고 떠나는 엄마새, 아빠새처럼 강단 있는 부모이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갈 길을 잃은 아기새들이 사람들의 손을 빌려 다시 날아오른 것처럼 아이가 살다 길을 잃고 불시착하는 날, 그 품이 우리 곁이기를, 그래서 다시 날아갈 기회를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라죠. 제 품에서 머무는 시간에는 가능하면 작은 힘듦은 수월히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고 큰 위기나 어려움이 왔을 때 이렇게 비축해 놓은 힘들로 이겨낼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마음과 체력의 여유가 있다면 현재 지나고 있는 순간순간의 행복에 더 집중하고, 타인에게도 너그러운 사람이 되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날까지는.
그때 비어있게 될 둥지가 아쉽지 않도록 지금의 이 순간 곁에 앉아 있는 아이의 날개를 좀 더 세심히 사랑을 담아 매만져 보아야겠죠?
아아. 벌써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가네요.
오늘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또 나가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