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할머니, 나 이거."
"아니.. 그런 쓸데없는데 꼭 돈을 써야겠니."
"할머니가 갖고 싶은 것 골라보라고 했잖아요. 근데 왜….."
"아니, 근데 이런 인형은 집에 넘치도록 많은데 꼭 사야겠어?"
할머니의 못마땅한 눈길에 속이 상했습니다.
'사고 싶은 것 고르라고 해서 고른 건데, 할머니는 또 안된대.' 뾰루뚱해져 볼이 부풀어 오를 찰나, 옆쪽 복도에서 통화를 막 끝낸 엄마가 한숨을 쉬며 다가왔습니다.
"아니, 엄마. 애한테 선물을 사줄 거면 사주던지... 아니면 애초에 아예 이거나 저건 안 된다고 하던지... 맨날 이게 뭐예요. 결국 기분 상하게."
"아니, 돈 아깝게 저런 걸 산다잖니. 좀 갖고 놀다가 버릴걸."
"엄마, 늘 이렇게 사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진짜 오랜만에 생일선물로 갖고 싶은 것 사준다고 해서 나온거고, 그래서 고르라고 한 거잖아.... 정말. "
장난감 가게 안에서 언짢게 오가던 이야기는 한숨이 점점 더해졌습니다. 화가 잔뜩 난 것 같은 엄마와 여전히 납득이 안된다는 할머니 사이에서 분위기는 나아질 줄을 몰랐습니다.
"매 번 이래야 해? 이런 날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한 번이라도 좀 너그러우면 안 돼?"
엄마의 큰 목소리에 마음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왜 이 인형을 집었을까... 괜히 할머니가 하지 말라는 걸 해서 엄마랑 할머니가 싸우게 되었다 싶습니다. 그래서 인형을 조용히 매대에 다시 올려두렸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꽂혔다.
"수인아, 인형 가지고 와!"
"아니.. 할머니가... 안된다고.."
"가지고 오라니까!"
쭈빗쭈빗 다시 들고 온 인형을 엄마가 낚아 낚아채듯 들고 계산대로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등을 돌리고 있던 할머니가 말없이 제 손을 잡고 엄마 뒤를 따라 계산대로 향했습니다.
왜 엄마랑 할머니는 매 번 만나면 이렇게 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맨날 나에게는 "엄마한테 그렇게 눈 부릅뜨고 그런 말투로 말하면 안 돼."라며 혼내놓고는, 왜 똑같이 엄마의 엄마에게 그러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방학이라 일주일간 놀러 와있던 할머니 집으로 엄마가 날 데리러 온 길에, 내일모레 내 생일선물을 사자고 함께 간 외출이었는데... 선물을 샀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의 따가운 공기에 품 안에 털인형을 꼭 안고 눈을 감았어요. 그리고 분명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할머니 집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얼른 차릴 테니, 저녁 먹고 가렴."
"아니에요. 내일까지 마감인 일이 있어서 시간이 없어. 얼른 가야 해요. 수인이 아빠도 이제 퇴근해서 집에 온다니, 그냥 가서 집에서 같이 먹을게요."
꼬로로로로록.
때마침. 눈치 없이 울리는 뱃소리가 제 대신 배고프다 말했습니다.
"... ..엄마. 수인이는 먹여서 가야겠어요."
할머니가 해주는 저녁을 기다리며 할머니 집에 여전히 있는 엄마의 방 여기저기를 탐험해 봅니다. 엄마가 결혼하기 전까지 썼다는 엄마의 방에는 엄마가 어릴 때부터 쓰던 학용품들이 아직도 있어요. 엄마가 학교 다닐 때 썼다는 계산기도, 스테이플러도, 지우개도, 엄마가 만든 연필통도 모두 그대로입니다. 하나 둘 모으다가 아빠랑 결혼하며 다 두고 시집갔다고 할머니가 말해준 작고 예쁜 향수들도 아직도 고스란히 엄마 방에 남아 있습니다. 아, 몇 가지 달라진 건 있어요. 엄마가 쓰던 침대 대신 할머니가 쓰는 안마 마침대가 자리 잡고 있고, 엄마가 쓰던 옷장에는 할머니 모자와 가방이 대신 잔뜩 걸려 있죠. 모자를 쓰시는 건 잘 못 보았는데, 옷장 안에 있는 모자만 서른 개는 되는 것 같아서 할머니는 모자를 쓰고 어디를 가시나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 방 문을 열고 매 번 '엄마, 여기 좀 정리하라니까.'라며 잔소리하는 건 우리 엄마이고요. 엄마의 책꽂이에는 우리 집에서는 보기 힘든 할아버지 얼굴이 담긴 액자들이 있습니다. 엄마가 무척 어려 보이는 그 가족사진을 보면, 엄마는 할아버지를 좀 더 닮은 것 같습니다. 사진 속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지금의 우리 엄마아빠와 비슷한 나이 같아 보입니다. 한 팔에는 엄마를 안고 있는 할머니는 주름살도 없고 무척 건강해 보입니다. 만약에 할아버지가 살아계셔서 나이가 드셨다면 어떤 얼굴이셨을까요? 자주 궁금합니다.
할머니가 뚝딱뚝딱 저녁을 차리는 사이, 소파에 앉아서 그 사이에도 노트북을 펴놓고 일하고 있던 엄마가 조용해졌습니다.
"할머니, 엄마 잠들었어."
"에고... 너희 엄마 피곤한가 보다야. 할머니 이거 다 만들 동안 엄마 좀 자라고 놔둬. 얼굴이 아주 때꾼하더라니."
엄마의 곤히 잠든 숨소리와, 할머니가 끓이는 국이 보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옛날 엄마방 서랍을 뒤적이며 노는데, 서랍장 바닥에서 작은 열쇠가 걸린 오래된 수첩이 하나가 곤히 잠든 것을 발견했습니다. 꼭 내가 쓴 것처럼 비슷한 글씨체로 써져 있는 엄마의 이름 세 글자가 보입니다.
노트를 펼쳐보니, 엄마가 쓴 것 같은 글들이 가득했어요. 군데군데 그려져 있는 낙서와, 소설인지 일기인지 모르겠는 내용들을 넘기며 구경하는데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도 무지개링이 가지고 싶어.
나도 배우고 싶어. 나도.]
무지개링이 뭘까요, 과자 이름일까요. 왜 엄마는 사달라고 하지 않고 이걸 여기 써둔 걸까요.
어젯밤에는 이 잠을 자고 나면 할머니와 헤어지는 날이 되어서 더 잠들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집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신나게 놀았습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 노래하는 TV 프로그램도 늦게까지 보고, 이불 위에서 귤도 까먹었어요. 그리고 10시가 넘어서도 할머니랑 둘이 누워서 수다를 떨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어?"
"할머니 젊을 때 돌아가셨지."
"병에 걸리셨었어?"
"응. 그랬지."
"많이 아프셨어?"
"그랬지."
"…할머니. 혼자되어서 슬펐겠다."
"... 어려웠지. 어려.. 웠어."
할머니 눈에 얼핏 무언가가 어렸습니다.
"할머니, 외롭지 않아?"
"외롭지... 아냐. 할미 괜찮아. 수인이가 할머니 보러 와서 괜찮아."
"내가 또 올게 할머니. 내가 자주 올게."
"그래. 우리 수인이 또 놀러 올 때까지 할미 잘 지내고 있을게."
나를 꼭 안아주는 할머니 품 안에서 늘 할머니가 잔뜩 사놓고 기다리는 강냉이 냄새가 났습니다. 입에 넣으면 아무리 힘껏 깨물어도 폭신하게 변해버리는 달달한 맛의 과자. 할머니를 꼭 껴안고, 할머니 품 안에서 나는 강냉이 향을 잔뜩 들이마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엄마와 할머니가 해준 저녁을 먹고 집으로 가려 나서는데 할머니가 주차장까지 따라 나오셨어요.
"엄마. 또 올게요... 수인이랑 며칠 지내느라 고생하셨어."
"그래. 운전 조심해서 가고. 도착해서 전화해."
"네. 그럴게요. 수인아, 할머니께 인사~."
"할머니, 안녕~."
집으로 향하는 길, 차 안에 우리 둘만 남았을 때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할머니는 안 외로우실까?"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저 큰 집에 혼자면. 무서울 것 같아."
"...."
"할머니가, 할머니도 무섭고 외롭다고 했어."
"........ 할머니가, 너한테 그랬어?"
"응. 그래서 내가 자주 간다고 했어."
"..."
"엄마, 무지개링이 뭐야?"
"무지개링? 어디서 나온 건데??"
"엄마 방에서. 엄마가 쓴 것 같던데? 무지개링이 가지고 싶다고."
한참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갸웃하던 엄마의 눈에 갑자기 쌉싸름한 미소가 스쳤습니다.
"아.. 그거 장난감이야. 수인아."
"장난감?"
"응. 무지개색으로 된 플라스틱 스프링. 계단 같은 곳에 올려두고 떨어지는 걸 보고 있으면 재미있는데, 그걸 갖고 싶었었거든."
"근데 왜 못 가졌어?"
"그때는, 할머니가 그걸 사줄 수가 없었어."
"왜? 사줄 수가 없었어?"
"그 돈으로 사야 할 다른 게 많았거든. 그래서 할머니가 못 사줬는데, 엄마가 그게 참 가지고 놀고 싶었었나 봐. 그래서 써놨나 보다. 할머니가 못 사줄걸 알면서도, 그게 너무 가지고 싶었었나 보네. 하하."
"그때도 할머니가 뭘 잘 안 사줬어? 그럼 할머니가, 그거, 무슨 새지? 아, 구두새야?"
"수인아, 구두새 아니고 구두쇠야. 오-이. 하고 발음하게 되는 '쇠'. 알겠지? 그리고 할머니는 구두쇠가 아니야. 그냥... 아끼는 생활이 몸에 배어버린 거야. 아주 어려울 때, 아무도 할머니를 못 도와줄 때 아끼던 버릇이 몸에 배어서 이제는 안 그래도 되는데, 그냥 그렇게 사시는 거야. 마음도 돈도, 미래에 대한 긴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나이가 많이 든 어른들은 습관을 바꾸기가 힘들거든. 그게 엄마는 많이 속이 상해."
"할머니가 안 바뀌어서?"
"응.. 엄마는 할머니가 이제는, 예쁜 옷도 많이 입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좋은 곳도 많이 다니고 그랬으면 좋겠어. 수인이 와도 기분 좋게 시간 보내고... 그냥 자주 작더라도 즐겁게.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할머니는 다 참고 살다가 즐겁고 행복해지는 방법을 잊게 되신 것 같아. 그게 엄마는 화가 나고 슬퍼."
앞만 보며 이야기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축축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법을 모르는 할머니.
딸에게 5천 원짜리 무지개링도 사주지 못했던 할머니.
배우고 싶은 것이 많던 딸에게 해줄 것이 없던 할머니.
지금도 나에게 털인형 하나도 쉽게 사줄 수가 없는 할머니는 오늘도 혼자 주무실 것 같습니다.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어두운 도로 위의 가로등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품에 안긴 털인형을 꼭 쥐었습니다.
"엄마, 내가 용돈 모은 걸로, 엄마랑 할머니한테 무지개링 사줄게."
굳게 다짐한듯한 나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 얼굴에 웃음이 스쳤습니다
"무지개링?"
"응. 엄마도, 할머니도. 그리고 같이 놀자 우리."
엄마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래, 우리 같이 사러 가자."
엄마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아까 어려있던 습기 대신 웃음이 서렸습니다.
할머니 손에 무지개링을 쥐여드릴 때, 그 가벼운 장난감이 얼마나 무거운 시간을 품고 있는지 할머니도 알게 되실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엄마와 할머니의 마음을 손끝에 잡고 즐겁게 출렁이게 하는 일, 저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마랑 같이 무지개링을 사러 가는 내일이, 조금은 더 행복한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