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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by 맨모삼천지교 Feb 25. 2025

연서가 수인을 처음 만난 것은, 인턴쉽을 따내기 위해서 필수라고 소문난 학내 중앙 동아리실에서였다. 커다란 링 귀걸이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머스터드 컬러의 워커를 신고 있던 보이쉬한 스타일을 즐기던 연서와 달리, 검은색 노치드 칼라의 코트에 연한 핑크색 스카프로 목을 두르고 아주 작고 귀여운 진주귀걸이를 하고 있던 수인. 너무 달랐던 서로의 스타일 때문인지 작은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선배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꾸만 서로 눈이 마주쳤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의 무리가 좁고 긴 학교 앞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있던 수인이 연서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우리 같은 과야.“

“아..그래.”

“ 넌 어디서 내려?"

"아.. 나는, 건대입구."

"엇! 나도. 나도 건대입구에서 갈아타야 해. 우리 같이 가면 되겠네."


갈아타는 지하철 역이 같다는 시시한 이유가 그렇게 반가운 것이 무언지. 조잘조잘 이야기를 시작한 수인의 경쾌하고 밝은 목소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보이지 않는 벽을 빠르게 세우는 연서의 탁월한 기술도 정지시키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날, 그동안 연서가 수인을 본 적이없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같은 수업도 3개나 듣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 둘은 그 이후 학교에서 부쩍 자주 마주쳤다. 그리고 마주치는 횟수만큼 소소한 일상을 함께 하는 순간들도 잦아졌다.

늘 웃상이라 동기나 선배 오빠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수인과 누구에게도 눈길한번 주지 않는 연서는 봄과 겨울 같은 조합이었지만, 겨울의 추위를 뚫고 찾아오는 것이 봄이듯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던 연서가 곁을 처음 내준이가 수인이었다.

알고 보니 고등학교 시절에도 같은 학원을 다녔다던지, 치킨보다는 튜나 샌드위치를 좋아한다던지, 도서관에서 고전을 빌려다 읽기를 좋아한다던지, 주연 남자배우보다는 짠한 서브 남주에게 더 마음이 가는 편이라던지.. 같은 소소하게 귀여운 공통점들을 발굴하며 환호하는 수인은 그럴 때마다 이런 이유들을 핑계로 수크게 한 걸음씩 연서에게 다가섰다.


그즈음은 연서는 정작 가족으로부터도 위안받을 수 없는 삶의 시기를 지나는 중이었다. 그래서 잔뜩 날이 서있는 고슴도치처럼 뾰족해져 다가오는 이들에게 상처를 먼저 주기도 했고, 그래서 떠나는 이를 잡을 마음의 에너지도 없었던 시기. 자라는 내내 세상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며, 가족을 제외한 누구도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돕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 연서였다.

완전한 타인에게 마음을 주지도, 기대하지도 말 것.

이런 엄마의 말들을 정언명령처럼 되새기며 자라다 보니 동갑인 아이들 역시 친구보다는 경쟁자라는 개념으로 바라보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인간관계조차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고, 하나를 받으면 반드시 하나를 되돌려 주어야 마음이 편안한 아이. 하지만, 세상에 오직 가족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던 그런 부모님이 이혼한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아 각자 상대를 만나 재혼하고 그 사이에 남겨진 아이들은 떠안고 싶지 않은 폐기물처럼 서로 책임을 미루는 모습을 본 순간, 연서에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신뢰는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가오는 수인을 피하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와 자꾸 자신을 내보이며 '난 네 친구가 되고싶어'라고 이야기하는 부드러운 눈빛이 불편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외로웠고 그 어느때보다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런 연서의 마음속 저 밑바닥이 수인의 손을 잡았다. 믿어본적 없는 완전한 타인의 호의와 관심. 그걸 필요로 하는 스스로가 낯설었지만 왠지 연서의 곁이라면, 자신의 얼굴에도 편안함이 드리울 날이 생길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수인의 일상을 가까이서 보게되면서 몰랐다면 되려 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는 사실들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수인의 전화기는 늘 엄마로, 아빠로, 동생으로 바삐 울렸다.

"응, 엄마. 어.. 어, 진짜? 알았어. 응. 응. 얼른 갈게."

"어머니셔? 왜? 오늘 무슨 일 있어?"

"아~엄마가 오늘 넷플에 새로운것 재미난 것 찾았다며 같이 보자고. 나 올때까지 정주행 안하고 기다리신다네. "

"아..그럼, 팀플 마감은 다음주 초니 오늘은 여기서 마감 하자."

"아, 그냥 오늘 하면 좋겠는데... 너 알지? 울 엄마. 이렇게 전화하면 진짜 나만 기다리고 있다니까. 아흐. 진여사 기다리니 나 얼른 가야겠다."


저녁이면 얼굴 볼 가족들인데도 점심은 뭘 먹었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시시콜콜 물어오는 가족들과 마치 또 다른 친구처럼 수다를 떠는 수인을 바라보며  연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남은 것이 '지나치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전화를 하며 하루의 일상을 묻는 엄마도, 늦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아빠도, 가족 간의 화목한 저녁식사도 연우에게는 이미 사라진 삶이었다.


수인의 집에서 함께 과제를 하다 처음 수인의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된 날. 잡곡과 검은색 콩이 충분히 섞여 짙은 보라색을 띠는 밥이 소복하게 가득한 밥공기와, 작고 예쁜 그릇에 담긴 예닐곱 가지는 되는 반찬들. 뽀얗게 우려낸 사골국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강된장. 그리고 일본 전통화가 그려진 접시에 담긴 살이 가득 찬 고등어구이까지. 손님인 자신을 위해서 일부러 애써 차려내신 것일까 생각했지만 오가는 횟수가 늘며 이렇게 다양한 찬과 다양한 요리들이 가득한 저녁 식탁이 수인의 일상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더불어, 가족들의 귀가를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하는 누군가가 집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선사하는 온기를 알게되었다. 수인의 주변에 흐르는 따스하고 다정한 공기는 풍요롭고 사랑이 머무는 수인의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란 사실도 함께. 그래서 연서는 수인이 더 좋아졌었다. 수인의 티 없는 밝음이 애쓰지 않아도 나오는 그 무엇이라 좋았고, 연서를 향한 호의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했다.


사실, 수인은 입학한 지 오래지 않아 연서의 존재를 알게 되었었다. 진한 아이라인까지 더해진 또렷한 이목구비는 한번 보면 잊기 힘든 얼굴이었다. 오죽하면 다른 과 아이들도 이름은 모르지만 그림같은 연서를 두고 “이집트녀”라고 별명을 붙였을까. 연서는 얼굴만 인상적인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강렬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늘 단정히 포니테일로 묶고는 늘 가장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께 맹렬히 질문을 퍼붓는 것은 기본, 발표를 하는 모양새도 남달라 눈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좀 지켜볼수록 그간 자라면서 수인이 주변에서 본 아이들과는 좀 다른 느낌이라 궁금증이 더해갔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부모님이 알아봐 준 학원을 다니고, 골라주는 옷을 입고, 방학이면 부모님이 해 두라고 말하는 코스를 밟아나가는, 오래 알고 지낸 수많은 수인의 학창시절 친구들의 삶과는 다른 좀..거친 결. 안전하다고 다들 말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집요하게 고민해서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만이 가진 특이한 색에 수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끌려버렸다. 투박할지언정 특별했던 아이를 먼저 알아본 교수님들과 선배들도 연서를 자주 찾았고 어디나 추천을 주저하지 않았다. 언제나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단호하고,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것 처럼 보이는 그런 연서를, 수인은 마치 언니처럼 따르며 동경했다. 자신이 갖지 못한 확신과 자유로움, 그리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지만 막상 좀 가까워지고 나서 알게 된 연서는 냉미녀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차가운듯한 인상 뒤에, 아주 약간의 다정함에도 무장해제가 되기도 하는 특이한 친구였다. 수인은 이런 연서의 곁에 머물며 보게된 부지런함과 본 적 없는 근성을 연서는 모르게 따라 해 본 적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바로 곁에서 연서를 지켜보는 수인도 몰랐던 연서의 삶의 키워드는 '간절함'이었으니까.살아 남아야 한다는 간절함, 해내야 한다는 간절함,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니 홀로 해내야 한다는 간절함. 하지만 이를 알리 없는 수인은 비슷하게 노력한다 생각했어도 탁월하게 다른 연우의 결과들을 마주하며, 움츠러드는 자존감에 좌절했다. 그래서 이럴 때 마다 부러 더 연서를 만나 비싼 밥을 사기도 하고 연우의 성과들에 대해서 더 크게 응원을 건네고는 했다.

'연서는 나와 다르니까.'

'연서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에겐 연서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 모든 환경 속에서, 연서라서 해낸 일들이니까.'


수인은 연서에게 다양한 형태의 심리적, 물리적 도움을 건네며 위하는 친구로서 스스로를 정의했지만, 사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현실적인 요소들에 더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심, 이런 환경의 차이들이 단단한 연서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무너지는 구석이 있을까 지켜본 적도 있었지만 연서는 변하지 않았다. 수인의 삶을 바라보는 눈빛에 분명 부러움은 존재했지만, 연서답게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걸었다. 바로 그것이 시간이 지날 수록 묘하게 수인을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수인이 연서와 함께 가고 싶어 했던 회사에 연서만 결국 합격했을 때에도, 여러모로 쉽지 않은 취업에 수인이 대학원으로 도피아닌 도피를 한 상황에서도 표면적으로는 둘의 사이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다만, 학교를 벗어나며 달라진 각자의 세계 때문에 자주 볼 수 있는 시간은 당연히 적어졌고 함께 알고 있는 지인들보다 서로의 입에서 이름만 들어본적 있는 사람들이 더 늘어갔다. 만남의 시간들이 간격을 넓혀가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연서는 수인과의 우정에 별다른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에는 뜻이 없다 이야기하는 연서에게 수인이 "그치..아무래도, 결혼은 가족끼리의 혼사니까. 이혼한 집 딸 좀 그럴 수 있지."라했을때도 수인의 말 끝에 담겨있던 묘한 현실저격에 상처받지 않았다. 다만 수인이 좀 피곤한가 생각했을 뿐.


머잖아 늘 빨리 결혼하고 싶다 이야기하던 수인은 대학원 졸업 전에부모님이 이미 확인한 안정된 경제력을 가진 집안의 남자와 선으로 만나 결혼을 했다.그리고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연서는 승진과 함께 해외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인생의 한때는 늘 함께였던 둘이었지만 사는 대륙이 달라졌고, 시차가 생겼으며, 대화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는 날들이 늘어갔다. 연서가 보내는 카톡을 읽고도 수인이 답이 없는 날들이 잦아졌고, 아예 읽었음을 의미하는 숫자 1이 사라지지 않고 머무는 날들이 길어졌다.

늘 서로의 새로운 삶에 응원을 보내며 언제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 믿는 연서였지만, 어쩌다 답이 와서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건강이 좋지 않다거나 안 좋은 일들이 생겼다는 짤막한 답변들이 돌아오거나 자세한 것을 물어도 긴 말을 하지 않는 수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뜨문뜨문이나마 연우가 애를 써 이어가던 둘의 대화에서 연서가 보내는 메세지에 붙어 있는 '읽지 않음' 표시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또 일주일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본 주말 아침.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우정이 끝났음을…뒤늦게 연서도 알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4년 뒤.

연서가 수인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마지막 메세지로부터 4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같은 업계에서 일하고 있던 동아리 선배가 경쟁사의 싱가포르 오피스의 아시아 총괄 대표로 오게 되었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연락을 한 연서였다. 외롭기도 하고 좁디좁은 이국의 한국인 커뮤니티에 아는 얼굴이 하나 더 생긴다니 반가운 마음에 마련한 자리에서 추억과 근황을 나누던 중,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 맞다. 너 한수인 알지?"


선배를 통해 듣게 된 수인은 근황은, 연서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곱고 밝게만 자란 수인이 아주 많이 울었을 것 같은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누군가 필요할 때 있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잠시. 왜 그럴 때 오랜 인연인 자신마저 끊어낸 것인지 연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핸드폰에 남아 있는 과거의 대화들을 다시 읽어보고,또 읽어주며 매우 오랜만에 만난 애꿎은 선배를 붙들고 왜 그런지 짐작이 가냐 묻는 연우였다. 본디 그처럼 속내를 터놓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거늘, 이국에서소수인으로 살게 되는 사람들 사이에만 알 수 있는 갑작스러운 허심탄회함. 이런 연서의 고민을 들은 선배가 말했다.  

 

"음.........연서야. [시절인연]이라는 말, 알아?

수인이와의 인연은 그냥 보내줘.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어. 상대는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인데, 내 가슴에는 피가 철철 흐르는 경우 말이야. 던진 적도 없는 화살에 혼자 쓰러진다고 해야 하나. 내가 그런 적이 있었거든.

재작년에 남편이랑 너무 심하게 안좋은 시기가 있었어. 진짜 이혼을 하냐 마냐...하면서, 양가 부모님이 다 오시고 서류도 썼었다? 근데, 딱 그즈음 동문회가 있었는데, 마침 내가 우리 기수 대표를 할 때라 안 나갈 수도 없는 거야. 어쩌니... 나가야지. 뭐, 얼굴도 말이 아니었지. 근데 그래도 가야하니 갔는데, 너 진희 알지?"

"진희선배요? 알죠. 근데요?"

"진희가 그날 딱 내 앞에 앉았는데, 남편이랑 어디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하는 거야. 진희네 부부 금슬 좋은 거야 뭐 익히 알고 있었는데... 그날은 그게 정말 곱게 안보이더라고. 너무 짜증이 나서 듣고 있지도 못할 기분이라 어렵게 나간 자린데 일찍 돌아왔어. 문제는 내 마음인데, 어이없게 원망이 그리로 향하더라니까?"

"....."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내가 그러고 나니, 혼자 마음이 불편해서 진희를 못 보겠더라. 어쩌면 진희는 아마 아직도 모를 거야. 근데 그때, 내 마음이 지옥이니 남들이 그냥 일상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전부 다 나에게는 나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그랬어. 대인기피증이 이래서 생기나 그 생각도 했으니까."

"어떻게...극복했어요?"

"집안일이 좀 수습되니 나아지더라. 그러니... 수인이도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야. 뭐 너희 둘의 이야기는 너희 둘만 알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선배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상기후로 5월에도 폭염이라는 싱가폴의 날씨에 가만히 보도블록에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비가 오려나 싶어 가지고 나간 우산을 양산처럼 들고 서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던 중 인스타그램의 알람이 울렸다. 매일매일이 서바이벌인 외노자의 삶이었지만 이국에서의 새로운 도전은 나름의 특별함을 공기처럼 깔고 있었고, 그저 잊지 말자는 생각에 기록하기 시작한 사진들이 꽤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어 의도한 적 없지만 꽤 많은 팔로워를 갖게 된 연서였다.


#해외, #싱글, #화려해 보이는커리어

이 세가지의 조합은 사람들의 선망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눈물이나 고생은 정작 본인만의 몫이었다. 메세지를 보낸 사람들을 살펴보다, 문득 수인의 계정이 궁금해졌다. 원래 SNS를 하지 않는 수인이었지만, 결혼 후 그래도 잠시나마 꽤 자주 포스팅을 올리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4년전 그 시기에 이미 중단되었지만. 지우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가장 마지막 포스팅은 결혼한 지 오래지 않아 남편과 다녀온 듯 한, 강원도의 한 뮤지엄에서 하고 있었던 전시의 사진이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All things change (모든 것은 변한다.)


연서의 인생의 암흑기, 예상에 없던 좋은 친구 수인을 만나 생각해 본 적 없는 우정과 위로를 받았다. 좋은 향기가 나는 공간에 오래 머무르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몸에 그 향이 배어나듯, 팍팍하고 날이 선 연서도 수인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오래되면 언젠가는 따스함이 진심으로 묻어나는 날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뛰어난 사람보다는 수인처럼 주변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 애쓰지 않아도 주변을 밝히는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싶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연서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수인은 알았을까. 다만, 가질 수 없는 꿈에 대한 포기가 빨랐을 뿐이라는 것도 수인은 몰랐으리라.

수인이 건넨 우정과 응원에, 시선 속에 깔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안쓰러움이었을까. 위로에는 슬픔의 위계가 존재했던 것이었을까. 그랬기에 연서에게 위로받는 것이 수인에게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변한 것은 둘의 마음일까, 관계일까, 상황일까.

아님..그 모두 다였을까.


이미 사라지고 잡을 수 없게된 우정을, 시기들을 아쉬워하는 연서의 앞으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근데도.

그렇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내가 보고 싶지 않더라도…나의 겨울에 함께 있어준 네가.

난 너무 그립구나.수인아.'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삼키고 삼켜보아도 허름해진 마음이 달래지지 않는 연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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