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 ‘나는 오늘’
이선과 연희의 이야기.
이선이 일하기 시작했다는 독서실은 지하철역 출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몫이 좋은 곳이라고 했다. 3개 노선이 지나고 있어 연희의 집에서는 지하철로 한 번에 닿기 좋았지만, 여러 노선이 지나는 만큼 수많은 계단들을 거쳐야만 바깥공기가 코에 닿는 곳. 그래서 이선을 만나러 나가는 길에는 구두보다는 운동화를 택해야 했다.
여전히 추위가 코끝을 스치는 2월의 토요일. 곧 생일인 이선에게 주말인데 어디라도 좀 다녀올 시간을 낼 수 있냐 물을까 잠시 했지만 오래 준비한 중요한 시험이 코앞이라는 것도, 지금의 삶에 여유란 사치스러운 단어처럼 느껴질 이선의 상황을 알기에 말을 꺼내지 않았다. 추운 날씨지만 미세먼지를 뚫고 꽤나 오랜만에 나온 햇살에 다들 어디론가 놀러 가는 것 같은 잔잔한 흥분이 깔려있는 토요일의 지하철역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와 달리 거의 한 달여 만의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연희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개찰구를 나와 이선의 집 방향으로 난 출구를 찾아 길고 가파른 에스컬레이터를 두 번을 타고, 또 눈앞에 펼쳐진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이선이 알려준 독서실의 이름을 되뇌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매 번 지나다녔지만 존재조차 몰랐던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낡은 건물들과는 다른, 마치 헌 옷더미에 잘못 버려진 새 옷처럼 매끈한 외형을 뽐내는 신축빌딩의 3층에 이선이 말했던 독서실의 간판이 보였다. 왜 이런 건물이 있는 걸 몰랐을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연희는 이내, 저소득층의 임대주택이 즐비한 이 동네의 지하철역을 나와 걸어갈 때면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은 채 그저 고개 숙여 빠른 속도로 이선의 집을 향해서 걸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오래 기억에 담아두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 스쳐 지나갈 동네라는 듯이 그 어떤 것도 눈에 담지 않으려는 채 말이다.
동갑인 연희와 이선의 삶은 불과 몇 년 전까지는 크게 다르지 않은 궤적을 지나고 있었다. 학원 친구가 같은 대학을 진학하면서 연인이 되는 흔한 서사를 지났고, 전형적인 공대생인 이선과 여성 치고는 꽤나 무던한 연희의 성격은 다른 듯 잘 맞았다. 그 흔한 밀당 한번 없이, 큰 싸움도 하지 않고 지내는 둘을 보며 주변 사람들은 천생연분이라 말했다. 그렇게 같이 학생이라는 시기를 지내며 함께인 대학 졸업 이후의 미래를 조금씩 그려가던 두 사람의 삶이 다른 색을 띠기 시작했던 것은 작년부터였다.
군 제대 후 복학을 바로 하지 못했던 이선의 상황과 먼저 입사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연희 사이에 미묘한 건조함이 감돌기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이선도, 연희도 해본 적이 없었다. 늘 함께인 미래를 그렸었으니까. 하지만 처음엔 그저 학창 시절의 연장선상처럼 생각한 회사는 연희에게는 상당히 버거운 그 어떤 것이었다. 학교에서 익숙해진 게임의 룰들 - 정해진 수업을 성실히 듣고, 과제를 잘 해내면 좋은 성적을 받는 - 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이건 새로운 룰로 시작해야 하는 아예 다른 게임이었다는 것을 입사한 지 오래지 않아 바로 알게 되었다. 입사 첫날, 아버지의 친구인 임원분이 반갑게 연희를 불러 격려하는 것을 본 사람들을 통해 퍼져나간 연희에 대한 입소문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연희의 성격과 어우러져 뒷배가 든든해 차갑고 건방지다는 소리로 진화해 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아버지가 누구시다더라, 어느 집 딸이더라...라는 식으로 그 무게를 더해 갔다. 금세 관심이 식으리라 생각한 것이 큰 오산이었다는 건 입사 후 1년도 더 지나 지나 있었던 회식자리에서 처음 뵙는 옆 부서의 부장이 내민 술 한잔에 걸쳐진 취기 어린 한마디로 알아버렸다.
“아, 서연희 씨를 이렇게 보네! 캬. 명문대 생이 좋긴 좋구먼? 근데 집도 잘 산다며?!”
보이는 지표만으로 사람의 행불행을 점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연희가 토로하는 고민들은 그저 배부른 계집의 타령정도로나 들린다는 것을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관심을 포장한 시기와 질투로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들 때면 이를 어루만져 준 유일한 이가 이선이었기에, 어이없던 회식자리가 파하고 당장 이선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선 역시 같은 시기 그의 인생에 생기리라 상상해 본 적 없는 상황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집으로 향해야 했다. 그렇게, 상처가 생기고 아물지 않은 채 또 상처가 나는 날들이 늘어가고 있던 연희였다.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며 남은 대학 기간에 대한 계획을 세우던 이선은 아버지가 해외 출장지에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브라질까지 달려가야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의 앞에 남은 것은 보호자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해진 아버지와 한 순간에 삶의 나락으로 떨어졌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려 집을 나간 어머니, 그리고 사업을 정리하고 집을 팔아 간신히 청산한 빚더미 후 남은 18평짜리 빌라 한 칸이 전부였다.
불과 1년 반 사이에 소용돌이치듯 휘몰아친 삶 속에서 '오늘만 버티자.'를 끝도 없이 되뇌며 버텨온 이선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곁에서 묵묵히 곁에 있어준 연희는 이 모든 암흑 속에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삶이었다. 유려한 말이나 위로가 아니라도, 몇 마디 쓰지 않은 설명에도 먼저 '괜찮아?'라는 말을 건네며 먼저 이선의 마음을 살피는 연희가 있었다. 이선이 이 모든 상황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시험은 세 달 후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딘가를 오가는 시간이라도 줄여 진득하니 앉아서 집중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이선 었기에 얼마 전부터 고등학생 과외도 줄이고 주말에는 집 근처 독서실의 사서로 근무하기 시작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얼씬도 해본 적 없는 독서실에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찾아간 독서실이었는데, 그 안쪽의 작은 사서실에서 언제 연희가 오는지 기다리며 바깥을 내다보던 이선이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뛰어나왔다.
"연희야, 춥지! 점심 안 먹었지?"
"응. 배고프다... 오늘 이상하게 춥네. 기온은 높다고 했는데."
"얼른 들어가자. 여기 근처에 중국집이 맛있는 데가 있다고 하셨는데.. 중식 괜찮아?"
"아.. 으응. 좋아. 나 마침 짜장면 먹고 싶었어."
"오케이! 이쪽으로 들어와. 여기는 독서실 안이랑 다르게 사서실이라 난로가 있어."
"아.. 으응."
이선을 따라 들어간 곳은 복도를 향해서 나있는 작은 창문이 딸린 세 사람이 앉으면 꽉 차는 크기의 작은 사무실이었다. 유리창 바로 앞에는 커터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녹색의 보드가 깔린 책상이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서류 더미와 학생들이 놓고 간 참고서 같아 보이는 여러 책들, 그리고 벽에 붙어 있는 '절전'이라는 표시가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벽에 붙어 있는 달력 속의 X표시와 o 표시들이 독서실의 운영일과 휴일을 나타내고 있는 듯했는데, 이 모든 것들의 안에 있는 이선의 모습이 낯설어 자꾸 쳐다보게 되는 연희였다.
"여기서 종일 있는 거야?"
"응. 오늘은 마감이 아니라서, 이따가 6시 즈음 가도 돼."
".. 아... 조용해서 공부는 잘 되겠다."
"응. 사서일도 생각보다 크게 할 일도 없고, 괜찮아."
"나도 노트북 가져와서 옆에서 같이 일할 것을 그랬나 보다."
"아냐. 여기 사장님이 또 친구 데려오는 건 잠깐은 괜찮은데 오래 있는 건 학생들 보기 좀 그렇다고 주의하라더라고. 뭐, 학생들 보기에는 연애하는 것도 부럽다나 뭐라나."
"아냐, 그냥 해본 말이야. 나도 너랑 밥 먹고 나서 집에 가서 좀 쉬려고."
잠시 후, 마치 미리 만들어두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건물 아래층의 중국집에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다. 옷도 기계도 별다른 욕심이 없지만 맛집 탐방을 다니는 것이 낙이었던, 그래서 맛이 좋다는 레스토랑을 알게 되면 연희를 데리고 가거나, 혼자라도 가게 되면 꼭 포장을 해와서 연희 손에 쥐어주던 이선이었다. 덕분에 음식은 그저 생명연장의 수단 정도로 여기던 연희도 이선 덕분에 먹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었다. 그래서였을까. 배달온 음식은 그런 둘의 입에 맛있을 리가 없는 그저 달고 짠맛의 짜장면과 맵고 짠맛의 짬뽕이었다. 듬성듬성 당근과 양파가 보이는 와중에 간간히 떠있는 완두콩이 색을 맞추는 중인 탕수육의 소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연희는 바로 어제도 회의실 가득 차려야 했던 저녁이 생각났다. 입사한 지 3년 차지만 여전히 팀의 막내인 연희가 저녁 6시가 되면 야근을 준비하며 하고 있는 매일의 루틴 중 하나는, 야근 예정인 인원을 확인하고 저녁 메뉴를 정해 팀원들이 선택한 메뉴를 주문하고 이를 받아서 잘 차려두는 일이었다. 열명도 넘는 사람들 모두의 취향을 맞추어 선택할 수는 없었기에 연희가 만든 것도 아닌 음식에도 괜스레 짜증을 내며 먹는 사람은 늘 있었다. 그 짜증마저 익숙해져 그저 버텨야 하니 먹는다 생각하며 입안으로 욱여넣던 어제의 까칠하던 탕수육이 고스란히 생각나는 딱 그저 그런, 정말이지 뻔한 맛이 넌덜머리 났지만, 지금의, 오늘의 이선이 할 수 있는 제안의 전부가 이 짜장면과 짬뽕이라는 것도 너무 알고 있는 연희였다.
"맛있다. 여기."
"입에 맞아? 나도 오늘이 이틀째 출근인데 처음 시켜 먹어봐. 독서실 사장이 하도 맛있다길래 너 오면 한번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지. "
"응. 괜찮네. 얼른 너도 먹어"
짜장면을 한 입 물고 짬뽕 국물을 한 입 마신 이선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시험 얼마 안 남았다...?"
"응. 그렇네."
"공부는 잘 되어가?"
"해봐야지. 잘 되어야지...."
말끝을 흐리는 이선을 보며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조심스러운 연희였다. 때로는 응원도 짐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여기 독서실 사장이 s 대라고 엄청 좋아하더라고. 그래서 뽑았다나 뭐라나. "
"s대랑 독서실 일이 무슨 상관인데?"
"뭐, 아무래도. 고등학생들이 많으니 입구에 좀 이름 알만한 대학교 학생이 앉아 있는 게 안심이 된다 그런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뭐 나야, 쉽게 구해서 좋았지 뭐."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찰나, 독서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속의 상대가 독서실 사장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런저런 지시사항을 전달받으며 재빠르게 메모를 적어 내려가는 이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희의 눈에 빛바랜 바짓단이 눈에 들어왔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둘이 함께 처음 쇼핑했던 날 샀던 바지였다. 분명 그 당시에는 꽤 인기 있던 바지였는데 어느새 유행도 지나고 바지의 색도 패턴도 모두 허물어져 있었다. 그 옆에 걸려있는,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패딩의 등에 적힌 다큐멘터리 채널의 이름을 바라보며 '저 다큐멘터리 채널은,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되고 있는 걸 알까.' 같은 생각을 하며 있노라니 이선이 전화를 끊고 자리로 다가왔다.
"... 온도 낮추어야 한다고. 아침에도 이야기하시더니 또 전화하셨네."
"온도?"
"응, 독서실은 너무 따뜻하면 다 졸아서 안된다고, 좀 낮게 유지해야 한다면서 까먹지 말고 보일러 끄라고."
"하하. 일리 있네. 다 자면 안 되니. 근데 나처럼 추위 많이 타는 사람은 안 되겠다 여기."
"지금 추워? 잠깐만 올릴까?"
" 아냐, 나 이제 가야지."
"아냐.. 잠시라도. 조금만 더 있다가 가."
괜찮다는 손사래에도 굳이 온도를 조금 높이는 이선을 보고, 일어나려던 연희는 조금 더 머무르기로 했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그.. 그 차장이랑은 잘 해결되었어?"
"아.. 그거, 그거 벌써 한참 전에 해결되었지. 괜찮아."
"그게 벌써 좀 되었나? 아.. 내가 정신이 없다. 미안."
"아냐. 시험 얼마 안 남았잖아.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네 공부에만 집중해."
드문드문, 끊어졌다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은 얼핏 보면 오랜만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들 같기도, 또 얼핏 보면 오래된 노부부의 대화 같기도 했다.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오래지만, 또 서로가 낯선 사람들의 대화처럼 현재에 있지 못하고 겉도는 대화 속에서 연희는 어딘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가봐야겠다며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연인이 되기 전에도 늘 부탁하지 않아도 집 앞으로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던 이선이었다. 하지만 독서실 문 앞까지밖에 나올 수 없는 이선을 두고 혼자 지하철역으로 걸어오는 오늘, 바람이 세게 불어 눈이 시려서인지 연희의 눈에 자꾸 눈물이 맺혔다. 사실 오늘 연희에게는 이선에게 전하려 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전하지 못하고 돌아온 이야기를 마음으로 매만지며 '오늘은. 오늘은 아냐.'라고 되뇌었다.
그날 저녁, 잘 시간 즈음 전화가 울렸다. 연희는 화면을 바라보다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이선은 짜장면을 먹고 너무 졸음이 쏟아져 깜빡 졸았는데 독서실의 온도를 올려둔 채로 잠이든 바람에 학생들을 모두 재워버렸다고 말했다. 저녁 교대를 하러 온 사장님이 노발대발하셔서 아무래도 이달이 지나면 잘릴 것 같다고 해탈한 듯 웃는 이선의 말에 연희도 같이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이 웃음도 오래지 않아 짧은 침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별것 아닌 이야기로도 한참을 웃으며 밤이 새는 줄 모르고 떠들었던 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지면서도, 전화기 속의 이선이 이런 기분을 알아챌까 마음이 쓰였다.
'오늘 말 안 하길 잘했어. 다음에. 다음번에....'
꺼내지 못한 말을 접어 넣고,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니 청명한 겨울의 달이 떠있었다.
언젠가. 아직 연인이 아닌 친구였던 이선과 연희는 서로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날이 있었다. 이선이라는 이름 속의 '선'은 [아름다운 옥 선]이라는 한자를 쓴다고 했다. 남자이름에 자주 쓰지 않는 한자인데, 할아버지가 그런 이름을 지어준 것은 '아름답다'라는 말속에 흔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쁘거나 보기 좋은 모양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답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라 했다. "나답게, 내 멋대로 살라고 붙여주셨대."라며 웃던 이선의 모습을 보며 연희는 사랑을 결심했었다. 왜인지 이 사람 곁이라면,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어서 그랬을까. 그날, 서로의 이름을 한자로 하나하나 함께 써 보며 다른 빛이지만 함께 어우러질 어느 날을 그려보고는 했었다. 둘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 할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밝고 예뻤던 그림을 따라 웃던 청춘이었고 사랑이었던 시기. 둘 사이 그런 시간이 흘러 멀리 지나가고 있음을 먼저 알아버린 연희는 자꾸만 달빛에 눈이 시려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