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P.M. (5)

다시 절망. 그리고.

by 맨모삼천지교

매일은 조금씩 서서히 변해갔다. 따뜻해지는 날씨만큼, 좁은 길에서 타인을 마주치면 굳은 얼굴로 멀찌감치 피하던 사람들의 행동과 표정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음.. 어쩌면, 마스크 너머의 보이지 않는 표정을 나의 기분을 발판 삼아 그렇게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한동안 바쁘게 날아들던 각 회사들의 파산 선고에 대한 뉴스 대신, 신규 채용을 진행 중이라는 Linked in의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스티브와의 이별에 연이은 해고까지, 한방 먹은 나의 사고체계 역시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장 잔고가 모래시계 대신 도시에서 견딜 수 있는 날을 알려주고 있었기에 다시 일을 시작하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가던 결정을 해야 했다. 다시 채용이 급격히 시작된 분야는 대부분 시급 20-40불 정도의 캐셔나 레스토랑 서버 같은 일용직들이었지만, 눈이 빠지도록 사이트를 뒤지던 중 전에 같은 팀에서 일하다가 동시에 실업자가 된 닉에게서 연락이 왔다. 뉴욕시 내의 공원들에 대해서 홍보 및 마케팅의 프로모션 디자인을 하고 있는 작은 에이전시에서 집에서 재택으로 웹디자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 웹디자인이라고는 학교에서 했던 것이 전부고, 프로모션 툴 제작 관련 오더 시에만 기억을 더듬어하던 것이 다이고.. 거의 공공사업 같은 내용이다 보니 시급이 후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이 상황에 못할 것이 뭐 있겠나 싶어 이력서를 내고 미팅을 했다. 다행히, 아주 난이도 있는 디자인을 원하는 것은 아니고, 오더가 주기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당장의 커리어 공백을 이어갈 수는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회사 측의 채용 확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날 오후.

미네소타에서 생긴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의 경찰에 의한 사망사건에 대한 보도와 함께 이에 대한 현장 영상이 SNS를 타고 퍼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이 어이없는 상황을 두고 미네소타 주를 시작으로 시위와 소요도 시작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그리고, 대답을 주기로 한 회사에서는 아무 소식 없이 연락이 없는 채 뉴스와 함께 하루가 저물었다.

02-curfewfaq-jumbo.jpg @Todd Heisler/The New York Times

그리고 이틀이 지나며 도시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바이러스로 늘 조용하던 집 앞의 작은 골목은, 낮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Black Lives Matter피켓을 들고 행진을 하고 저녁에는 인종과 목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무리가 , 늦은 밤까지 크게 노래를 틀어놓고 소리를 지르거나, 불꽃놀이를 하는 등 소란으로 가득했다. 마치 언제 그렇게 조용했었냐는 듯이 번지는 소동속에도 경찰은 오지 않았다.

다른 의미로 다시 집 안에서 밖의 변화를 살피려 애쓰는 중, 다시 핸드폰의 긴급 알람이 울려왔다.


뉴욕시에서 알려드립니다.
저녁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오전 5시까지 뉴욕시 전체 통금을 시행합니다.
이에 적극 협조 부탁드리며,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943년에 시행된 이후 처음이라는 뉴욕시의 통금.

밤이면 화려하게 불타오르던 도시가, 지금은 이제 불을 꺼야만 한다고, 집에만 머물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통금 시간을 넘기고도 브루클린 브릿지를 건너는 시위대들의 모습이 인근에 사는 친구들의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것을 보며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은 꽤나 오래갈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을 거둘 수가 없었다.

2020_cs_gf_tsempty.2e16d0ba.fill-661x496.jpg 통금 시행 둘째 날. 저녁 시간에 텅 빈 거리 @C.S. MUNCY / GOTHAMIST

피켓을 들고 Black Lives Matter를 외치는 평화로운 시위대와 다른 성격의 '폭도'들은 뉴욕의 밤을 꺼진 조명들 대신 불태워주었다. 통금 시간이 저녁 8시로 당겨진 것도 이들의 혁혁한 공이라 할 수 있었는데, 매일 자고 일어나면 여기가 털렸다, 저기가 박살 났다...라는 이야기들이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창을 채워갔다. 특히, 소호 쪽에서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던 미나로부터 전해져 온 사진은 모두를 경악하게 하고도 남았다. 불타고, 박살난 유리와 전시된 물건들까지 모두 털려나가 넝마주이가 된 소호의 풍경은, 과연 우리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맨해튼의 보석 같은 거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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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모삼천지교


그리고 그 와중에, 진행 중이던 회사와의 인터뷰는 무기한 중지되었다.

'하긴, 지금 마스크를 쓰라는 공공디자인물을 만드는 것을 준비할 상황이 아니겠지...... 바이러스를 지나왔더니, 이제 또 다른 나락인가.'


폭도들로부터 매장이 훼손당하지 않도록 문을 닫아걸고 나무판자를 덧대는 상점들은 그래도 빠른 대처를 할만한 인력과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곳들이었다. 그렇지 못한 곳들은 겨우 물건만 빼내 오는 것이 다였으니까. 주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허술하게 문을 걸어 잠근 채로 그대로였던 동네 델리는 바로 옆 정원용품을 판매하는 할아버지께서 간신히 사람을 불러다 가게를 막아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나마 문을 열고 야외에서 Take out으로 조금씩 음식을 판매하기 시작했던 식당들도 하나같이 문을 걸어 잠그고 더 숨어들었다. 정말이지 이제는 보고 싶지 않아 뉴스를 꺼도... 창 밖에 조금씩 달라지는 내 눈앞의 작은 상점들의 변화가 고스란히 지금의 뉴욕의 현재를 이야기했다.



그렇게 또 무기력하게 실내에 갇힌 채. 열흘이 지났다.

그 사이 무기한 인터뷰 프로세스를 중지한다는 에이전시에서는, 중단했던 인터뷰를 빨라야 7월에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그때도 가능할지 물어왔다.


'7월이라.

원래대로라면, 스티브의 롱아일랜드 집에 가 있을 예정이었던 여름의 정수리인 인데...

7월의 나는 어디에 있게 될까.

도시는 더 나아지게 될까.

나는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내일은 또 어떤 하루가 될까....

더 나을까.

더 나쁠까.'


복잡한 마음과 불안이, 그리고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이 오가는 와중에... 스티브의 전화가 떠올랐다. 집안에서 최소한의 외출만 하고 지내고 있는 와중에, 어이없게도 그간 해야했지만 못했던 많은 일들을 숙제하듯 하나씩 해결해버렸었다. 창고 같던 집을 정리하고 사람 살게 된 것부터, 한 번은 해봐야지 했던 베이킹도 도전해보고.. 늘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내려 마시던 커피도 직접 그라인더에 갈아 마셔보기도 하고. 갑자기 생겨버린 시간 속에 소소한 생활 속의 버킷 리스트들을 달성 중이었다. 그런데 그 리스트 하단에 계속 남아 있던 '내 짐 찾아오기 from 스티브'는 계속 순위가 밀리고 밀리며 리스트 내에 남아 있는 중이었던 것.


그리고 문득.

당장 내일도, 그다음 달도 어떨지 모르는데... 하루라도 빨리 리스트에서 그 이름을 덜어내 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나야. 내일 짐 가지러 갈까 하는데. 롱 아일랜드 집 주소 다시 보내줄래. 몇시즈음 픽업 가면 되는 지도 알려주고.]

메시지는 전송이 되었다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없었다.


전화를 하려 이어폰을 끼니, 왠지 모르겠지만 쿵쿵 거리는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네, 스티브 씨 전화입니다."

"어...아..저 스티브...가 없나요? "

"예, 지금 치료중이라서요. 누구시라고 전해드릴까요?"

"네. 저..아니에요.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분명 그의 어머니는 아닌데...나이가 든 여성의 차분한 목소리.

그리고 [치료중]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맴돌았다.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여기저기 작게 다치기는 했지만, 무던한 성격과 달리 운동 신경은 기민한 터라 크게 다치지는 않았었는데.

'비서인가?? 뭐지.......'


잠시 후 전화가 다시 울렸다. 그였다.

"아, 미안. 문자 지금 봤어. 편한 시간 아무때나 오면 돼. 종일 집에 있으니."

"알겠어. 굳이 얼굴은 안봐도 되니 짐 그냥 앞에 둬. 바로 픽업만 해서 올테니."

"..............알겠어."




실로 오랜만에 Uber(우버- 공유형 콜택시) 를 불렀다. 앞좌석과 뒷좌석을 비닐막으로 완전히 가린 차를 타고 보니 내가 지금 바이러스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 매우 실감 났다. 단 한 톨의 바이러스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기사의 노력도 가상했지만, 덕분에 나도 좀 안심하고 갈 수 있다는 생각도.



[지금 출발해. 정문 안쪽에 짐 내놓아 줄래.도착하면 문자할테니 문 열어줘]

얼마만에 타는 택시인지. 한시간을 가는 동안 익숙했지만 낯설어진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창문을 내려보았다. 보고 있어도 진짜 같지 않은 풍경들. 날씨는 이제 완연한 봄으로 접어들어 유리창에 비치는 터키색의 하늘이 시원하고 날씨만큼 사람들도 거리에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 아래 보이는 나무판들은 아직 이 소요가 끝나지 않았다 외치고 있는 듯 했다.

주석 2020-07-28 001242.jpg @맨모삼천지교

한참을 달려 저 멀리 그의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낮은 돌담 끝에 있는 정문앞에 내려서니 미리 이야기한대로 철문 안에는 박스 두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미리 보내두었던 문자가 무색하게 철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도저히 꺼낼 수가 없어서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버 기사에게 잠시만 시간을 좀 달라 이야기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 저기, 문이 안열려있어서 박스를 꺼낼 수가 없어."

" 문이 고장났어. 내가 갈게."


툭 끊어진 전화에 어이없어 하고 있는데, 정문 안쪽 길 끝에 위치한 집 안쪽의 현관 문이 열리더니...예상 못한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휠체어에 앉은 채,

날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익숙하지 않은 몸놀림으로 힘겹게 바퀴를 굴리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

그리고 분명히 있어야 할 다리의 자리에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는 듯 한 느낌의 헐거운 바지... 몇 번의 움직임에도 목 끝 까지 새빨개 져서 지금 안간힘을 쓰고 있음이 역력한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다리의 힘이 탁 풀려 버렸다.



- 다음 이야기는, 8월 첫째주에 게재됩니다.-




안녕하세요:)

맨모삼천지교입니다.

7월 24일 5편을 올리겠다고 뻔뻔하게도(--;;;) 게시를 해놓고는..더위를 심하게 먹고 몇일을 누워지낸 덕분에...늦어버렸습니다.


혹시나 기다리셨을 분들께는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 보고 드리고.

안 기다리셨으나 어쩌다 보신 분들께는 앞의 (1)화 부터 돌아가서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다....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진짜 다음주에 올라올 예정이라고 소심하게 남겨봅니다.


3월을 배경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벌써 6월까지 흘러왔네요.

스티브는 왜 휠체어에 앉게 된 것일까요. 애니는, 애니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함께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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