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에 처음 시작한 신춘문예 도전이 서른 중반이 되어서도 도전 단계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참 필요했는데요
그 값이 너무나 필요했습니다
등단 작가라는 이름값과 당선이 가져다주는 글값이 너무나 필요했습니다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당선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죽하면 길거리에 나가 매값이라도 벌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사실은요 나는 내가 말이 쉬운 사람이라는 걸 아주 잘 압니다
말이 쉬워 글을 쓰겠다 했으니 말 다 했지요
나는 내가 꽤 비겁해 보이기도 합니다
필요하다 말만 할 뿐 얻겠다는 마음이 부족했고 매값이라도 벌고 싶다 말만 할 뿐 누군가 오냐 잘 됐다 하며 뺨을 내놓으라 말하면 수줍은 듯 볼을 가리고 뒷걸음질 쳤을 겁니다
신춘문예에도 그러한 글을 냈습니다 비겁하게 뒷걸음질만 치는 사람의 이야기를요
올해의 신춘문예 역시 제 차례는 아니었습니다 아마 저보다 그것이 더 필요한 사람의 차례였겠지요
제 차례는 언제쯤이나 오는 걸까요
참 모를 일입니다
일 년에 고작 한번 뒤집을 수 있는 패이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백지의 번호표를 들고 사람으로 가득 찬 병원 대기실에서 이름이 불릴 때까지 감기라도 옮을세라 숨을 참는 기분입니다
언젠가는 진주같이 품어만 두었던 글들이 꿰어지는 날이 올까
모르겠습니다
31일도 1일도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이고 내일이라 말할겁니다
무엇을 참는 지도 모르고 그렇게
이 공간을 통해 이 글을 읽는 이들이라도 덕분에 좋았다 하기를 바라며 글을 올립니다
종이학
황동 덩어리들이 전해 용액 안에서 울렁거린다.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전기를 흘려보내 플러스 극과 마이너스 극을 충돌시키면 누런 황동 덩어리의 표면에 금과 은이 달라붙는다. 흙바닥에 굴러다닐 것만 같던 고철 덩어리들이 그렇게 어느새 번쩍이는 장신구가 된다.
싼값에 비싸 보이는 형상이 오래가도록 하려면 니켈을 섞어 도금을 해야한다. 니켈은 인체에 좋지 않지만, 유독성의 기준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물질이라 도금 업계에서 흔하게 사용하고 있다. 민감한 사람은 흔히 쇳독이라 부르는 증상이 나타나 살이 붉게 부풀어 오를 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런 거려니 하며 몇 번 살을 긁고 말 것이다. 사람의 맨살에 닿는 물건이라면 모름지기 안전해야 하지만 많은 이들은 겉에 보이는 것만 원한다. 그 얇고 얇은 금과 은이 오랫동안 벗겨지지 않는 것을 원한다. 물론 싼 값에 말이다.
ALL NICKEL FREE. 미국에서 아이들을 위한 장신구 사업을 운영한다던 클라이언트는 10만 개의 목걸이를 주문하며 내게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회사는 무無니켈 도금을 요구해 놓고 감히 저렴한 가격을 강요한 미국 거래처가 괘씸하다며 당해도 싸다는 듯, 기준치 이상의 니켈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말하고야 말았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빛나는 거짓으로 덮인 표면 안에 있는 누런 진실을 미국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하였을 뿐이다. 우리의 실수로 네가 원하는 것과 다른,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물건이 생산되었다며 말이다. 그날 얼굴도 본 적 없는 미국인은 내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말했고 나와 10년도 넘는 세월을 함께한 상사는 내게 왜 그 사실을 알렸는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를 믿고 물건을 사 가는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말한 것 뿐이었다. 미국 어딘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10만 명의 어린이들이 쇳독을 앓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도저히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늘 정직한 도금을 고객들에게 제공해 주겠다는 직업의식 따위는 가진 적도 없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회사는 내 자리를 복도에 가져다 놓았다. 그곳은 회사의 유배지였다. 10층. 화장실로 들어가는 좁은 복도 벽에 붙어 있는 흰 플라스틱 책상. 한 시간을 앉아 있기에도 벅찬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 세 개. 그중 하나가 내 것이었다.
"비어 있던 하나가 이제야 찼네"
공 과장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내게 농담을 건넸다.
"정숙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복도에 손을 모으고 서 있던 경비가 다가와 공 과장에게 따가운 눈치를 준다. 유배된 이들은 스스로 회사를 나갈 때까지 이곳에 갇힌다. 9시부터 6시. 하루 중 9시간의 감옥 생활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다. 화장실을 가던 직원들도 떠들썩하게 다가오다가 우리 뒤를 지날 때면 애써 목소리를 낮춘다. 헛기침을 하는 이도, 말없이 어깨를 두드리는 이도, 작게 킥킥대는 이도 있다. 뒤통수가 녹아내리는 기분을 견디며 눈앞의 하얀 공책 한 권을 바라본다.
9시간을 내리 버틴 죄수들은 차례로 회사에서 나와 각자의 길을 간다. 나야 이제 첫날이라지만 공 과장과 김 주임은 이미 한 달 넘게 이런 생활을 해왔다. 특히 젊은 혈기를 가진 김 주임은 슬슬 인내심이 바닥에 이르러가는지 위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공 과장과 김 주임은 술이나 한잔하자며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정해진 일정을 수행하기 위해 작은 미소로 제안을 거절했다.
갈 길이 바쁘다. 나는 1년 전 그 사건이 발생한 후부터 퇴근 후 그냥 집으로 향하는 법이 없다. 은평구의 암자에 들른 뒤 고양시의 납골당을 들른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할머니가 말없이 내미는 전단지를 받는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손가락 두 개를 펴 할머니에게 보여준다.
"오늘도 고맙네"
할머니는 내 손가락을 보곤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확인한다. 아는 얼굴이네. 그런 표정으로 전단지를 한 장 더 내민다. 날이 추운데 괜찮으시려나. 걱정스러우면서도 그저 고개만 끄덕한 뒤 길을 나선다. '오늘도 건강하게' 헬스장의 글자는 시끄럽게 오늘을 살아가라 말한다. 오늘도 살아있기에 죄인이 된 기분이 드는 나는 버스가 정거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황급히 전단지를 반으로 접는다. 숨소리로 가득 찬 서울의 버스는 불안과 공황을 불러일으킨다. 그럴 때면 오늘을 살아가라 소리 지르는 전단지를 접고 또 접어 종이학을 만든다. 종이의 형태를 바꾸는 것에 집중해 세상을 벗어난다. 죄인. 나는 1년 전 꼭 이맘때 딸을 먼저 보낸 부모가 되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하다 못해 오늘부로 회사로부터도 죄인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이대로 더 살아간다면 또 누구에게 죄인이 될까.
어렵게 가진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섣불리, 원한 적 없음에도 생긴 아이였다. 아내와 나는 친구였고 술에 너무나 취했었다. 딱 하룻밤이었는데, 딸이 찾아왔다. 우린 어렸고 또 어설펐다. 그렇기에 결혼을 했고 딸을 얻었다. 가족이란 외형을 얻으면 실수가 계획으로 바뀔 것만 같았다. 실제로 얼떨결에 찾아온 아이는 가족이란 껍질 안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도금된 황동 따위가 아닌, 금덩어리 그 자체가 되었다.
나는 아이에게 네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황동에 무엇을 씌우느냐에 따라 금이 되고 은이 되듯. 그러나 아이는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본인의 겉을 얇은 금과 은으로 씌우는 것이 아닌, 씌워진 도금을 벗겨내고 황동 같은 자신을 드러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아이는 자신과 제일 친한 친구의 손을 잡고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마음과, 실제 모습과, 둘의 관계에 대해. 친구는 아이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아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날을 마무리하였고 다음 날 학급 내 모든 친구들은 아이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이는 자신의 섣불렀던 말을 후회했다. 아내는 걱정을 했고 나는 별일 없을 것이라 말했다. 아이는 학교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실에 나오지 않기로 결정했고 또 어느 날은 밥을 먹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1년 전 어느 날 아이는 결국 세상에 남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지금도 아이의 그 선택이, 아이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선택들이 무척이나 섣불렀다고 생각한다.
아내 또한 섣부른 아이의 섣부른 엄마답게 섣부른 선택을 했다. 그녀는 내게 이혼 서류를 가져왔다. 나는 이유를 물었고 그녀는 출가를 하겠다 말했다.
우리 세 가족은 그렇게 말을 잃어버렸다. 아이는 말을 할 세상을 잃어버렸고 아내는 말을 할 이유를 잃어버렸으며 나는 말을 할 사람을 잃어버렸다. 나는 순순히 그녀와 이혼을 해주었고 그대로 출가길에 나선 그녀는 1년의 수행 끝에 서울의 작은 암자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퇴근을 하자마자 그녀가 머무는 암자로 향한다. 대문 앞 쓰레기통에 버스에서 접은 종이학을 버리곤 대웅전으로 들어가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한다. 절이라곤 명절날 웃어른께 또 결혼식 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양가 부모님께 한 기억밖엔 없는 사람이지만 어설프게나마 그렇게 세 번의 절을 한다. 절을 끝내고 나면 부처님의 금빛 얼굴과 몸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저 도금 아래엔 무엇이 머물고 있을까.
암자를 나서는 데 익숙한 얼굴이 비질을 하며 다가온다. 그녀의 끝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잠시 내게 멈췄다가 대나무비에 벗겨져 가는 흙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나는 산속에서 사슴이라도 발견한 듯 행여나 도망갈세라 겁을 내며 그 자리에 가만 섰다. 얼마 전 처음 그녀를 마주했을 땐 머리카락이 없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반갑지 않은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그저 조용히 그녀와 나 사이에 멍청히 떠다니는 나눌 수 없는 말들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녀의 가슴에는 탄 것도 아닌, 그렇다 하여 멀쩡하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색의 나무판이 걸려있다. 장작으로 쓰이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아궁이 근처에 누워있다가 몸만 그슬린, 하등 쓸데없는 때가 탄 그런 나무 색. 그리고 그 나무판 위에는 더 진한 색의 글자가 적혀있다. 묵언. 그곳에 새겨진 글자가 그녀의 외면을 구실 좋게 만든다. 너는 묵언의 벽 뒤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만을 하며 암자를 나선다.
어느새 하늘은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검게 타버렸다. 세상은 어둠으로 덮었으나 버스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오늘을 짊어지고 가득 들어차있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종이학을 접고 납골당에 도착한다. 로비의 쓰레기통에 종이학을 버리고 딸아이가 있는 캐비닛 앞에 선다. 딸아이의 뼛가루가 담겨있는 매끈하고 단단한 도기 항아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이를 이대로 놔두는 게 맞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든다. 답답하지 않을까. 세상에 남고 싶지 않았던 아이니까 세상에 흩어져 더 작고 작은 가루가 되어 세상에 남지 않도록, 세상 그 자체가 되도록 해주는 게 맞는 것 아닐까. 그와 동시에 이 가루를, 딸아이의 뼛가루를, 그 뼛가루가 담겨있는 도기 항아리를, 내 딸과 같이 바라보는 것이 맞는 것일까. 하며 고개를 젓기도 한다. 아이에게 직접 무엇을 원하느냐 묻는다면 아이는 뭐라고 할까. 이젠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무엇이라 답할지 상상도 잘 가지 않는다. 아이의 성격이 어땠더라, 아이의 목소리가 어땠더라.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어쩌면 공황을 피하기 위해 버스에서 접어대는 종이학처럼 그저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이곳을 찾는 것뿐인 걸까. 지금의 나는 제정신이긴 한 걸까.
"이거 잘못 버리신 거 아닙니까?"
침묵으로 정돈된 복도를 거친 목소리가 흩트린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나는 눈도 없는 종이학과 눈을 마주쳤다. 납골당의 미화원인 듯한 아주머니가 검지와 엄지로 종이학의 날개 끝을 잡아들고 팔락거린다.
내가 괜찮다는 듯 손바닥을 펴 올리자, 아주머니는 답답하다는 듯
"예?"
하고 또다시 침묵을 깨트릴 뿐이다.
나는 마지못해 미소를 지으며 그 종이학을 받아 든다. 너를 어찌해야 할까. 내게 수상한 눈초리를 끈적하게 붙여놓곤 등을 돌려 멀어져 가는 아주머니는 연신 중얼중얼 쉰 소리를 낸다.
나는 검지와 엄지로 종이학의 날개를 비벼 핀 뒤 딸아이가 담긴 항아리 옆에 가만 놔두었다. 다음에 보자. 그 말 대신.
"오늘은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
회사 내에 회식 공지가 전달되었다. 이례적이게도 유배지의 우리들까지 전원 참석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박 부장은 친히 우리에게 다가와 한 명씩 어깨를 짚으며 말을 전달했다.
"너희들도 예외 없어"
유배지의 동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눈을 마주친다.
"자네들은 아무래도 어색할 테니 조금 늦게 와. 내가 알아서 분위기 다 풀어놓을 테니까. 6시. 회사 뒤에 금성 알지?"
박 부장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곤 사무실로 향했다.
"자네들도 갈 거지?"
"네. 이거 왠지 느낌이 좋아요"
박 부장이 일으킨 소란의 틈을 타 공 과장과 김 주임은 입을 연다. 그들의 시선을 받은 나는 어깨에 남은 박 부장의 손자국이 간질거려 거절할 새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오늘은 전단지를 못 받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의 공책을 한 장 찢었다. 오늘은 마구잡이로 색이 칠해진 헬스장 전단지 대신 회색 줄이 죽죽 그어진 흰색의 종이학을 접는다.
7시가 다가올수록 공 과장과 김 주임은 잔뜩 긴장한 듯 의미 없이 다리를 떨어대고 손가락으로 죄 없는 책상을 두들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긴장만큼이나 커다란 기대도 함께 품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상기된 표정과 살짝 말아 올려진 입술 끝이 말하고 있다.
우리 셋은 사무실의 불이 꺼지고도 한참을 더 복도에서 서성이다가 회사를 나와 금성으로 향했다. 금성은 중식당으로 이 회사 직원들의 점심 식사와 회식 자리를 책임져왔다. 금성의 대문 앞 붉은 레드 카펫이 오늘의 주인공이 왔다는 듯 길을 안내하고 조잡한 금색 플라스틱 용 두 마리가 대문을 떠받들고 있다.
"예 몇 분이세요"
"저 성남 도금 예약이요"
"아, 왜 안 오시나 했어요"
우리는 고개를 좌우로 저어가며 금성의 내부를 시선으로 훑는다. 몇몇 테이블이 달그락거리며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뿐 회사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다.
"자네 박 부장님한테 전화 좀 해봐 응?"
김 주임은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가 다시 떼어내 손가락으로 화면을 훑기도 한다.
"안 받아?"
"네…. 박 부장님도 안 받으시고 다른 사람도…."
"저기…. 저희 예약 메뉴 준비 다 해놨는데요. 회식 진행하시는 거 맞죠?"
카운터에서 우리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장님이 종종걸음으로 나와 공 과장 앞에 섰다. 공 과장은 엄지와 검지로 눈썹을 조여 매듯 만지더니 다시 고개를 든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준비하신 것들 계산하면 얼마 나오나요?"
사장님은 금방이라도 화를 낼듯한 표정으로 대답 없이 뒤돌아 주방으로 들어간다. 주방 안에서 몇 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와, 투정을 부리는듯한 목소리와, 또 화를 내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사장님이 아닌 요리복을 입고 있는 주방장이 터벅대며 걸어 나왔다.
"지금까지 준비한 것만 계산하시면 50만 원은 나오겠는데요. 이것도 성남 도금이니까 많이 깎아드린 겁니다"
공 과장은 덩치 큰 주방장의 흔들리지 않는 눈을 피하더니 우리의 표정을 좌우로 살핀다. 이내 그의 손이 나와 김 주임의 어깨에 오른다.
"어쩌겠냐. 응?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 말고 일단은 먹자고"
공 과장은 우리 둘을 떠밀며 자리로 나아간다.
"사장님 여기 50만 원은 계산할 테니까 준비된 요리나 좀 내주세요. 저희만 식사하고 갈게요. 소주도 좀 주시고요"
나는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 종이학을 매만진다. 공 과장과 김 주임의 시선을 살핀 뒤 꺼내서 어디 구겨지거나 찢어진 곳은 없는지도 확인한다.
공 과장과 김 주임은 아무런 말 없이 눈앞의 수저만을 바라봤다. 그 사이 사장님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수육과 깐풍기를 내온다.
"식사도 드려요?"
나는 고개를 저었고 공 과장은 잡탕밥을, 김 주임은 쟁반짜장을 시켰다.
우리는 말 없이 서로의 잔을 술로 채우고 연거푸 마시고 또 먹기 시작했다. 특히 공 과장은 방금 완주한 마라토너가 물을 비우듯 그렇게 소주를 마셔댔다.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응?"
"제 말이요 차라리 자르기나 하던가.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건지… 이유라도 알고싶어요"
나는 빈 술잔 안에서 울렁거리는 나를 바라본다. 황동색 얼굴이 이리저리 일그러진다. 사실 우리는 모두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다. 성희롱과 하극상 그리고 비밀 유출. 모두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여 갖고 있던 것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미 모든 것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또 빼앗긴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말을 아끼고 있다. 마치 그 말을 뱉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감출 수 있다는 듯.
"너희들도 말이야, 응? 너희들은 젊은이들이니까 말이야…."
공 과장은 어느새 웅얼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긴장할 만큼 강하게 테이블에 손을 올린 뒤 비틀거리며 자리에 섰다.
"과장님 어디 가시게요? 도와드려요?"
"됐어 인마! 오줌 누러 가는데 도와주긴 무슨"
공 과장은 김 주임의 손을 밀어 치우곤 뒤를 돌아 문밖으로 나간다. 그가 붉은 카펫을 밟으며 멀어진다.
"과장님…. 과장님은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나는 김 주임을 바라보며 입술을 좌우로 찢는다.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그렇다고 무표정도 아닌. 그래서 그 무엇도 아닌 그런 표정을 짓는다. 김 주임은 한참 동안 한숨과 푸념을 반복하며 울상을 짓는다. 김 주임의 서러움은 그의 개인사까지 토해내게 했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들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암자와 납골당의 쓰레기통 속 비스듬히 누워있는 종이학을 떠올린다.
"아 진짜 공 과장!"
김 주임은 갑자기 무엇인가 알아차렸다는 듯 전화를 걸어댄다.
"과장님 공 과장 도망갔나 봐요. 아,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나는 말없이 입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맛있게 드셨어요?"
사장님은 무표정인 듯 웃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민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좌우로 찢었다. 그녀에게 카드를 건네주곤 김 주임과 눈을 마주친다. 그만하고 좀 가자. 그 눈빛이 들리기라도 한 듯 김 주임은 멋쩍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팔에 살짝 손을 올리며 잘 먹었다 인사하곤 붉은 카펫을 밟고 나가 담배를 물었다.
"어라 과장님 한 잔 더 안 하시고 그냥 가시게요?"
김 주임이 뒤에서 소리친다. 나는 그저 손을 한번 들어 올려 보이고 택시를 타러 큰길로 걸어 나갈 뿐이다.
출근 시간으로부터 삼십 분이 지난 뒤 나타난 박 부장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다른 직원들도 원래 출근 시간보다 삼십 분가량 늦게 출근했다. 이 회사는 늘 그랬다. 회식을 하고 나면 직원들을 배려한답시고 다음 날 출근을 삼십 분 정도 늦춰주곤 했다. 그날은 유독 화장실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시선이 뒤통수를 얼마나 많이 핥아댔는지 머릿속이 다 축축할 정도였다. 우리 셋은 모두 얼굴이 달궈진 채로 넥타이도 느슨히 풀고 단추도 두어 개 풀어 연신 셔츠 깃을 잡고 흔들며 하루를 보냈다.
어제 버리지 못한 여분의 종이학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두 장의 전단지를 받아 든다. 버스에 타 종학을 접는다. 암자 앞 정거장에서 내린다. 대문을 들어서며 속주머니에서 학을 꺼내 들었다. 공책으로 접은 깨끗한 학이 손에 집힌다. 나는 잠시 그 부드러운 학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속주머니에 넣고는 전단지로 새로 접은 형형색색의 뻣뻣한 학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대웅전을 들리고 도금된 부처님을 바라보고 흙바닥에 발자국을 남긴다. 그날따라 유독 바람이 거세다. 아내는 보이지 않고 텅 빈 공간을 암자의 풍경소리와 목탁 소리가 채울 뿐이다. 그 오롯이 혼자 존재하는 듯한 소리들을 들으며 다시 버스를 타고 종이학을 접고 한참 창밖을 바라보다 납골당에 들어섰다. 딸 앞에 가 선 나는 캐비닛 속 무언가가 눈 끝을 간지럽히는 걸 느낀다. 종이학이 바뀌어있다. 분명 끝부분이 찢어져 흰색 종이 가닥이 너덜거리고 요란한 원색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종이학이었는데. 깔끔한 학종이로 접은 종이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헬스장 전단지와는 다른 균일한 그러데이션 색깔이 눈을 편하게 만든다. 나는 그것이 실로 쌓아 올린 공예품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럽게 끄트머리를 집어 들어 올렸다. 왼 손바닥을 펴 그 위에 올려보기도 한다. 배에 있는 네 개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간지럽힌다. 나는 종이학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변해가는 그러데이션 색깔을 바라보다 이내 속주머니에 넣고는 노트로 접은 종이학을 캐비닛에 올려놓는다.
"젊은 아가 왔던데"
납골당을 나서던 내 발을 미화원 아주머니의 말이 붙잡는다.
"학이요. 잠깐 봤는데, 누가 놨나 궁금해하시는 것 같길래. 둘이 무슨 장난을 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보기좋으네"
언젠가부터 나는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텔레비전부터 켰다.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터지고 번지는 불빛을 온전히 맞다가 소파에서 잠이 들곤 했다. 오늘은 들어서자마자 거실의 불을 켠다. 소파가 아닌 식탁 앞에 앉은 나는 그러데이션 색상의 종이학을 꺼내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쓰다듬어 본다. 양손으로 종이학의 머리와 꼬리를 잡아 내리고 접힌 날개를 펴 내린다. 몸통을 앞뒤로 눌려 펴고 납작해진 종이학의 배를 열어젖힌다. 그렇게 종이학은 다시 정사각형의 학종이가 된다.
정성스럽게도 접었다.
날 선 선들이 이리저리 뻗어있다. 접은 이가 종이를 한번 한번 접을 때마다 손톱으로 꼼꼼히 눌러 미는 장면이 보인다. 얇고 길쭉한 손가락. 그 끝은 매끄럽고 부드럽고 또 봉긋하게 살이 올라 있기도 하다. 나는 그 향기 나는 지문과 유치한 색이 칠해진 손톱이 지나간 선 위에 나의 손가락을 올린다. 그 선을 따라 내 몸을 싣는다. 손가락이 가늘게 터진 흉터를 따른다. 손가락 끝이 기분 좋게 간지럽다. 종이를 들어 올려 코끝에 가져다 대보기도 한다. 종이의 냄새가 원래 이리도 달았던가. 낡아진 흉터를 따라 다시 종이학을 접어본다. 얇고 길쭉한 손가락이 스치고 문지르고 눌렀듯 나도 나를 묻힌다. 다시 완성된 학은 무척 후줄근하여 금방이라도 온몸의 흉터가 찢어질 듯하다. 학의 등과 배에 있는 가운데 꼭짓점은 마치 몇십 년은 지난 듯이 헐어 구멍까지 나고 말았다. 종이학에 바람이 든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누운 자리 머리 옆에 종이학을 올려놓았다. 바람이 통하기 시작한 학이 나를 바라본다. 오늘은 텔레비전에서도 낡고 부드러운 빛이 흐른다.
그날은 꿈을 꿨다. 학교 교실을 바라보는 꿈. 내가 누구인지 또 그 교실이 딸이 다니던 곳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교실 곳곳으로 커튼을 따라 바람과 햇빛이 흐른다. 오른편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가 칠판과 책상을 번갈아 바라본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정적을 깬다. 아이는 기지개를 켜듯 몸을 퍼 올린 뒤 고개를 뒤로 돌리려 한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파도치고 얼굴이 보이려는 찰나 잠에서 깨고 말았다. 눈을 뜬 나는 밤새 나의 잠을 기다린 학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회사에 나가 출근 카드를 찍고 화장실도, 사무실도, 그렇다고 복도도 아닌 곳에 있는 흰색 플라스틱 책상 앞에 앉는다. 그저 통로일 뿐인 그곳에서 어제와 같은 사람들과 같은 시선을 받으며 같은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때 내 앞으로 종이 뭉치가 톡 하고 떨어진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공 과장을 바라본다. 공 과장과 김 주임은 잠시 시선을 모았다가 다시 내게로 보낸다. 마구잡이로 구겨진 종이를 편다.
'종이학 좀 접어봐 우리도 보면서 따라 접게'
참으로 유치한 행동 속의 유치한 메시지다. 그 내용을 본 나는 어제의 교실을 떠올렸다. 콧바람이 들고 나며 얼굴의 긴장을 누그러뜨린다.
"어라?"
내 표정을 본 공 과장이 참지 못하고 소란을 떤다. 우리는 고개를 돌려 경비원을 살핀 뒤 다시 시선을 모은다. 내가 행동을 하면 그들이 따라나선다. 석 장의 종이가 차례로 찢긴다. 종이는 반으로, 또 반으로 접혀 정사각형의 모양으로 변하고 모서리는 손톱으로 몇 번이고 눌려 날카로워진다. 흉터가 아닌 잘려 나갈 끝이 생긴다. 접힐 준비가 끝난 종이는 세모로, 또 네모로, 이어서 마름모꼴이 되었다가 날개가 생기고 머리와 꼬리가 생긴다. 내가 종이학의 날개를 양쪽으로 잡아 펴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각자의 날개를 펴고 등과 배를 부풀린다. 소년같이 웃는 그들의 얼굴이 화장실 앞 어두운 벽 위에 색을 드리운다.
공 과장과 김주임은 그날부터 열심히 종이학을 접기 시작했다. 때아닌 겨울비가 요란하게 반복된 탓인지 전단지를 나눠주는 할머니가 며칠째 보이지 않았기에 나도 그들과 함께 종이학을 접었다.
그러던 어느날 과하게 검은 그림자가 통로 위 조명을 가렸다.
"너희 뭐 하냐?"
박 부장은 양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고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우리 셋을 번갈아 바라본다.
"너희 지금 무슨 초등학교 공작 시간인 줄 알아? 월급 줘가면서 일하라고 앉혀놨더니 종이접기를 하고 자빠졌네"
공 과장과 김 주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들은 반 정도 완성된 종이학을 양손으로 지그시 눌러 가린 채 시선을 가라앉혔다.
"이리 내"
박 부장의 손이 우리의 사이로 들어온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손에 자신의 것을 올려놓지 않는다.
"이리 내라고! 귀들 먹었어?"
우리 셋은 각자의 종이학을 조심스럽게 박 부장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나머지 둘과 달리 내 것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완성된 종이학이 박 부장의 손바닥 위에 올라앉자, 그는 종이학과 내 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그 손을 힘껏 모아 주먹을 쥐고 만다.
"너희 오늘까지 시말서 써와. 그리고"
박 부장은 고개를 돌려 경비원에게까지 눈을 흘겼다.
"너도 돈 받고 일하는 놈이면 일을 좀 잘해야 되지 않겠냐?"
"죄송합니다!"
경비원의 힘찬 사과가 회사 복도를 이리저리 튀어 다닌다.
박 부장이 혀를 차며 자리를 뜨자 공 과장과 김 주임은 재빨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각자의 속주머니에서 학을 하나씩 꺼내 내게 건넨다.
"이거 종이접기 가르쳐 준 값으로 쳐. 어렵게 숨긴 거야. 알지?"
공 과장과 김 주임은 박 부장의 질타에도 자신만의 웃음을 짓는다.
"정숙하십시오"
경비원이 달아오른 목소리를 내뱉는다. 나는 경비원을 잠시 쳐다보곤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공 과장과 김 주임을 보며 웃음을 주고받았다.
"이따위로 써서 반성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겠어? 다시 써와"
박 부장의 괴롭힘에 발목이 잡힌 우리는 각자 8장의 시말서를 쓰고 찢었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납골당은 이미 닫았을 시간이었기에 평소보다 느긋하게 회사를 나섰다. 눈이 온다. 흐린 회색 도심에 흰 재가 쌓인다. 오늘도 할머니를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다. 버스 밖 풍경이 눈에 씻겨 나간다. 전기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가 다시 움직이려 서행할 때마다 딸랑거리는 암자의 풍경 소리가 울린다.
암자에 도착한 나는 대문 앞 쓰레기통에 종이학을 버리려다 말고 가만 섰다. 그동안 버린 것들은 늘 내가 접은 것이었고 남이 접어준 것을 버려 본 적은 없었다. 별것 아니지만 누군가 내게 준 것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에 아내가 대나무비를 든 채로 서 있었다. 그녀의 목에는 여전히 묵언을 알리는 나무판자가 매달려 있다. 눈을 마주친 것은 처음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평소 그녀와 눈을 마주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말을 걸어볼까. 엉엉 울게 되지 않을까. 손을 잡아도 될까. 안는 건 안 되겠지. 일련의 생각들이 흘려보낸 뒤 나는 두 손을 합장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내의 눈이 잠시 동그래졌다가 버스 안에서 바라본 창문처럼 젖어 들어간다. 그녀와 나는 눈을 맞으며 각자의 손을 모아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잠시 주춤했다가 손바닥을 내어준다. 나는 그녀의 손바닥에 종이학 하나를 내려놓았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살짝 미소 짓는다. 나는 다시 한번 합장 인사를 한 뒤 뒤돌아 암자를 나선다.
집으로 온 나는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그러데이션 색상의 종이학을 집어 들고 소파에 앉았다. 학은 오늘 나를 기다렸을까. 내 투박한 학이 놓여있지 않아 실망하지는 않았을까.
나는 회색 줄이 그어진 종이학을 그러데이션 색깔을 가진 종이학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두 학이 옆으로 기울면서 서로의 날개 끝이 맞닿는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그대로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이른 출근 시간 때문에 원래도 새벽에 일어나야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나는 딸아이의 방에 들어가 그동안 한 번도 만진 적 없는 서랍과 공책들을 열고 젖혔다. 그 위에 쌓인 먼지가 손에 묻어 답답한 느낌이 든다.
아이의 공책과 참고서들이 빽빽이 들어찬 책장 끝에서 편지지 묶음을 발견했다. 묶음의 배를 엄지로 가볍게 잡아당기며 편지지들을 넘긴다. 어떤 글도 쓰여있지 않다. 아이는 이 편지지를 사용해 누구에게 무슨 글을 쓰려고 했을까. 어떤 그림을 제일 좋아했을까. 나는 편지지를 한 장씩 넘기며 그곳에 새겨진 풍경들을 살피다가 바다가 새겨진 장에서 손을 멈췄다.
아내와 나 그리고 딸. 셋이 강릉 바다에 놀러 갔던 기억을 그 편지지에서 발견한다. 발가락 사이로 차오르는 간지러운 모래와 끊이지 않고 들려오던 파도 소리. 그리고 아내와 딸의 각기 다른 손의 감촉. 기념이라며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사 들고 뛰어노는 아내와 딸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마구잡이로 찍다 보니 어느새 필름은 한 장이 남아있었다. 바다에 들어가 파도와 첨벙대는 딸, 조용히 해가 지는 쪽으로 향하며 바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던 아내. 나는 둘 사이에 서서 고개를 앞뒤로 돌리다가 한 명의 사진을 찍었다.
조용한 새벽, 모두가 잠든 밤, 어두운 방 안에서 바다 무늬의 종이학을 접는다. 두 개가 아닌 하나의 종이학을.
회사 분위기는 며칠 전 사건 이후로 더욱 안 좋아졌다. 경비원은 우리의 바로 뒤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감시의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공 과장은 공책을 쓰다듬다가 울상을 지었고 김 주임은 허공을 바라보다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는 반투명한 대리석 벽을 바라보며 얇고 길쭉한 손가락을 상상했다. 그러데이션 색깔의 종이학을 접는 그 손가락을 세며 또다른 하루를 버텨낸다.
오늘도 할머니가 없는 빈 거리를 지나 버스를 탔다. 버스는 익숙한 정거장의 이름을 알린다. 나는 벨도 누르지 않고 그저 창밖만을 바라보며 그곳을 지나친다. 처음부터 정차 벨을 누를 생각은 없었음에도 마치 제때 벨을 누르지 못해 내려야 할 곳에서 억지로 내리지 못한 듯한 감정이 차오른다.
납골당에 들어서며 학교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상상한다. 그러고 보니 딸아이의 학교 종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벽을 돌아 봉안당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딸아이의 캐비닛 앞에 누군가 서 있다. 앞뒤로 왼발을 옮길 때마다 가볍게 팔락거리는 교복 치마. 교복 재킷에 가려져 있지만 한눈에 봐도 얇은 팔. 길고 검은, 너무나 건강해 기름기마저 도는 생머리를 가진 누군가 캐비닛 속 종이학을 매만진다.
풍경소리가 들린다. 종소리가 아닌. 암자의 대문을 지나 곳곳으로 스미는 바람에 흔들리는. 도금된 부처님의 빈 속을 울려대는.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황급히 뒤로 돌아섰다. 주머니에 곱게 모셔 온 종이학이 구겨져라 몸을 거세게 좌우로 틀어가며 달린다. 목과 가슴이 달궈지고 찢어질 때까지 숨을 헐떡댄다. 정거장에 서 있는 버스가 보인다. 숨이 한계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세게 발을 구른다. 정거장으로부터 막 출발하려는 버스의 몸통을 연신 때린다. 맨손으로 철판을 구기기라도 하려는 듯 세게.
"멈춰! 멈추라고!"
억지로 숨을 들이켜고 내쉬어가며 악다구니를 질러댔다. 버스는 내 발악이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그대로 손에서 떨어져 나간다. 찬바람에 한참을 스친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온다. 그때 날카로운 쇳소리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버스가 멈춰 선다. 다시 한번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려가 버스에 올라타자, 기사는 질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겨울임에도 온몸에 열이 뻗치고 땀이 흘러 전기가 흐르는 듯 간지럽다. 팔 하나 굽히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벗는다. 한풀 한풀. 땅바닥에 닿을세라 조심스레 옷을 챙기지도 않고 무작정. 흐려진 차창 너머 거리가 들썩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