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작년 7월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작년 7월까지 딱 1년을 꾸준히 채우다가, 바쁘다는 핑계로 다섯달을 멈췄다. 하루를 돌아보고, 주 단위로 일정을 체크하고, 한 달 한 달 곱씹어 나가는 시간이 모여 회고가 되는 것을 알았다. 저번달 부터 다시 쓰기 시작한 일기를 올해는 끊기지 않게 쓰고 싶다. 지난 1년을 돌아본다.
1월
개인사업자로 등록한 관계사의 첫번째 일 -- 랄라스윗의 리릭비디오, 늦어버렸나 -- 을 작업했다. eeht 계정으로 올리던 유튜브 영상을 보고 연락을 주었다. 친구와 작업했던 시계 사진을 오픈했다(사진 1). 일기를 돌아보니 잎새가 자주 아팠고, 나는 사업의 방향을 잡느라 애썼다. 올해의 작가 김보영을 만난다.
2월
첫번째 뮤직비디오 작업을 보고 두번째 뮤직비디오 작업을 요청받았다. 동거인이 친구들에게 받은 생일 축하 영상 메세지를 편집하느라 사흘동안 야근을 했다. 그때 녹음된 사와의 목소리를 아직까지도 알람으로 쓰고 있다. 잎새는 두번째 레고를 샀고, 둘 다 각자 다른 이유로 울었다. 2월 6일 일기에는 한 문장만이 쓰여있다. "Don't reinvent the wheel."
3월
개인전 포스터를 작업했다 -- 쿄 작가의 Find the unimaginable. 제주도에 이주한지 1년 8개월이 지났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썼다. 다큐멘터리 Quincy에 나온 윌스미스의 인터뷰 장면을 적어두었다. Quincy called me. He said, "What are you doing?" I said. "Well, you know, we're touring." He said, "Okay. Well, I want to pitch your future to you." 너의 미래를 제안하고 싶다는 말은 얼마나 위대한가. 도서관 다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달의 책에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가 오른다.
4월
서울에서 홍 부부를 처음 만난다. 제주도에 사는 동안 가장 자주 간 장소는 천지연 폭포가 된다. 아직 4월이지만 올해의 책, 올해의 작가, 올해의 모든 것을 김보영 작가가 차지한다. 쿄 작가의 전시 A Certain Warmth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올해의 그림책 <L부인과의 인터뷰>를 만난다. 내가 나로 있기 시작했다.
5월
아이러니하게도 판데믹 덕분에 NT에서 공개한 <프랑켄슈타인>을 볼 수 있었다. 매일 매일 달라진다 포스터를 디자인 하는 와중, 인생을 뒤집어지게 만들어 줄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다(사진 1). 제프 베조스의 2016년 주주서한을 반복해서 읽었다. 이 시기에 자주 만나던 사람 중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금이야 놀랄 일이 아니지만, 그때의 내게 말해주면 크게 놀랄 일이다.
6월
홍의 전화를 받고, 일주일 뒤 서울에 올라간다. 첫 피티을 시작으로 대표님에게 피티, 집에서 피티, 밥 먹으며 피티, 여기서 피티, 저기서 피티, 피티가 이어졌다. 돕는 사람에서 만드는 사람이 된다. 볼링장의 노래를 고르고, 메뉴판을 바꾸고, 사람을 알아간다. 초등학생과 노는 법을 배운다. 우당탕탕 스페어룸 사업기 1화, <갑자기 볼링장이 생겨버렸다>를 올렸다.
7월
볼링장 브랜드 디자이너에서, 볼하우스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에서, 스페어룸 대표까지 이야기가 진행된다. "대표"라는 직함을 소화하는데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소비 될 줄 이때는 모른다. 볼링장 인테리어 작업을 위해 매주 서울에 오갔다.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1달을 살았다.
8월
볼링장 공사를 시작한다. 일정을 맞추고, 기한을 정하고, 작업을 병행하는 과정 속에서, 앞에 놓여있는 일을 하나씩 처리하기도 하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진 자격증을 손에 들고 우두커니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동거인과의 스페어룸 공동 창업이 결정된다. 일기 쓸 시간이 없어졌다는 핑계로 일기를 미루기 시작한다.
9월
볼하우스 한남이 오픈했다. 제주도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남동에 이사를 왔다.
10월
볼하우스 한남을 운영한다. 정해진 게 없는 곳에서 정해가는 일을 한다. 모르던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 동료가 늘어난다. 밤산책을 다니고, 술을 다시 좋아하게 된다. 세 달 동안 장을 한 번도 보지 않을 줄 이때는 모른다. 서울을 좋아하게 된다. 서울을 아주 아주 좋아하게 된다.
11월
볼하우스 한남을 경영한다. 어떤 일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되고, 몰랐던 실수가 뒤늦게 드러나기도 한다. 19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1.5단계로 인해, 레인에서의 "음식 및 주류 섭취가 금지" 되었다. 24일에는 2단계가 된다. "9시 이후 영업 금지"가 추가 되었다.
12월
11월부터 사회적 거리두기가 상향될 때 마다, 실내체육시설에는 하나씩 둘씩 제한이 생겼다. 12월 5일에는 실내체육시설에 대한 "집합 금지"가 시행된다. 볼하우스 한남이 멈췄다. 스페어룸이 달렸다.
2020년은 엄청난 한 해였다. 작년 1년 동안 겪은, 정확히 말하자면 6월부터 겪은 반년 동안의 시간이 이전의 시간을 모두 합친것 보다도 컸다. 무엇이, 어떻게, 왜 엄청난지 잘 적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올해를 적당히 설명할 방법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회고를 적고 있는 12월 31일까지도, 대표, 회사, 경영이라는 단어를 소화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릴 줄 몰랐고, 여전히 소화가 되지 않은 부분들에 놀란다. 내가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단어들은 얼마나 많을까.
있는지도 몰랐던 것들을 알고 났더니, 모르던 나를 벌써 잊어버렸다. 모래알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사람부터, 모래밭의 차이를 가르쳐주는 사람, 그리고 해변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다. 감사하다는 단어의 무게를 올해 처음으로 알게 된 것만 같다.
모래밭에 나가는 일이 아침마다 기다려진다.
올해만큼 내년을 기다려본 적이 없다.
개인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especiallywhen/
볼하우스 한남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bowl.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