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ho Sep 13. 2017

어쩌다 홍콩

Accidental Hong Kong

출장이 잡혔다. 출발 사흘 전 급하게 항공편 예약을 마치고서 호텔을 알아보니, 원하는 위치의 숙소가 모두 동나 있었다. 그리하여 비즈니스 트립에 묵은 숙소의 이름은 판다 호텔(pandahotel.com.hk). 어쩐지 잘못 들은 것만 같은, 친숙한 그 이름 뜻 그대로의 호텔이었다. 봉제 인형 가득한 숙소에서 묵은 나흘간의 기록이다.

가기 전에 알아둔 정보라고는 유심 사는 법과 허유산의 망고 쥬스가 전부였다. 반환된 지 스무 해가 지났는데, 아직도 영국령이라 생각하고는 하루 전에야 비자 관련 서류를 찾아보았다. 쓰이는 통화도 모른 채 얼마 되지 않는 한도의 신용 카드 하나 들고 떠났다.

마음 놓고 공항에 도착해,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안심은 얼마나 소중한가. 들어가기 전에 하나, 들어가서 하나 있는 파리 크라상을 출국 중에 매번 들린다. 치즈 스콘과 버섯 포카치아를 좋아합니다.

오랜만에 국적기를 타니 엔진은 거대했고 날개 끝도 접혀 있지 않았다. 놀란 가슴으로 보낸 문자에 전국적기 관계자가 가슴을 쳤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서류 작업 마치고 경유도 최저가도 없이 마음껏 가족 할인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눈물을 흘려봤지만 — 이미 한 퇴사는 어쩔 도리가 없다.

서울보다 높은 온습도에 훌쩍 지친 채, 현금으로 살 수밖에 없는 대중교통 카드를 위해 한화 오만원을 환전했다. 구글 맵을 켜고 지하철을 타며 호텔 향해 나섰다.

덮쳐온 색에 어쩔 줄을 몰랐다.

색이 마를 일 없는 도시였다.

버스에서 내려 호텔 입구에 도착하니 어린아이들의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로비에는 분홍색 미니에 사람만 한 판다 인형이 둘 자리 잡았고, 벽면 곳곳에서 희고 검은 얼굴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출장길의 시작이다.

배 채우기 좋은 적당한 장소도 미리 찾아놓칠 않아, 색 가득한 도시를 둘러보러 나갔다. 어쩐지 허름한 국숫집에 사람이 많아 일단 들어갔더니, 어떤 언어도 통하질 않아 손과 눈으로 메뉴를 주문했다. 옆 자리의 아주머니가 안쪽으로 들어오라 손짓했고, 메뉴와 함께 제공되는 음료수를 추천해 주며, 발행하지 않으려는 주인에게 손으로 쓴 영수증까지 받아 주셨다. 아무리 좋다 말해도 전해지지 않는 나의 맘을 쌍따봉으로 대신하니, 엄지의 위력은 어디서나 통했다. 두유 들고 빵끗 웃고 가게 나섰다.

미팅 위해 길을 걷고 걸었다. 역 근처에 있는 근사한 컨퍼런스 호텔과 판다 이름 붙인 관광객 가득 찬 호텔 사이에는 창들이 가득했다. 빨래가 진을 쳤고, 간판이 반짝였다. 사생활의 경계를 찾을 수가 없는, 누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분명한 도시였다. 20층에 묵고 있던 그는, 공항에서 마을버스로 왔다는 말에 놀라워했고, 이 거리를 걸어왔다는 말에도 놀라워했다. 편견을 가지게 만드는 감탄사를 삼키며 회의를 진행했다.

밤늦은 회의가 끝나고 택시 잡아 떠났다. 고층에서 보았던 불 꺼진 거리가 무섭게만 느껴졌는데, 술 취한 아이들이 신사역과 다를 바 없었다. 구시렁 거리며 시끄러운 말투로 알아듣지 못할 광동어 내뱉는 기사가 더 무서운 것도 서울과 다를 바 없었다. 도착지는 판다 호텔. 가로등은 꺼져있었다.

다음날 아침의 창 밖 풍경.

그리고 매일의 창 안 풍경.

일터에는 회장님의 클래식/슈퍼카 콜렉션이 스물여덟 대 자리했다. 년도 별로 색 다른 포르셰가 입구를 맞았고, 페라리 F40와 메르세데스 190SL, 콜벳 스팅레이, 재규어나 람보르기니가 구석을 차지했다. 기묘한 일터였다.

상하좌우 어디에서 보아도 판다 하는 판다 호텔, 내일이면 안녕, 안녕.

정신없이 지나간 사흘간의 여정을 마치고, 마지막 날 오후에야 잠깐 시간이 비어 시내 한 번 나섰다.

한적한 동네를 찾았다.

에그 베네딕트가 먹고 싶어 찾아간 장소(Classified, Wan Chai)였는데, 메뉴의 버거 사진을 보고는 멈출 수가 없었다. 광고 사진과 다를 바 없는, 시킨 보람 있는 모양새였다. 조금이라도 수제를 표방하는 버거집을 들릴 때마다, 함께 나온 감자튀김을 포크로 찍으며 발리를 떠올린다. 나는 더 이상 후라이를 곁들이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버거와 감자는 한 몸, 둘이 함께 있을 때야 완성되는 메뉴였다. 이곳의 버거는 4점, 후라이는 2점이었다.

Colours of Hong Kong — Monocle Shop, Hong Kong

이 사진의 등장인물은 모두 열둘, 주인공은 모두 열두 명이다. — Omotesando Koffee, Hong Kong

일이 9할을 차지한, 그리하여 관광 누릴 새 없었던 홍콩은 지나가는 풍경 만으로도 지나온 도시들과 다른 냄새를 풍겼다. 구룡성채가 공원으로 바뀌었음에도, 독립을 주장할 필요 없는 많은 양의 구룡성채들이 도처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근사한 장소들이 그들을 온몸으로 막고 있었다. 이 도시를 언젠가 다시 오겠구나, 그런 이야기를 했다. — Elephant Grounds, Starstreet 

남은 현금은 32센트. 가져가도 짐이고, 버리자니 범죄고,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가져가시라, 필요하지 않느냐 철판을 몰수하고 질문 건네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거절이었다. 한국 돈으로 46원. 피곤에 쩔어있는 외국인의 제안을 수락하기에 터무니없는 그 돈은, 결국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공항 바닥에 놓고 왔다. 게이트가 열렸고, 출장이 끝났다.


인스타그램: instagram.com/especiallywhen

작가의 이전글 참, 결혼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