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화면을 응시한다. 어쩌라고 아침부터 컴퓨터를 켠 건지 모르겠다. 기분은 가라앉는다. 대체적으로 기분은 늘 가라앉아있는 편이다. 언제 들뜨기 시작했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늘은 학교 재량 휴업일이라 큰애는 쉰다. 쉬는 날을 마음껏 즐기기라도 하듯 게임패드를 들고 게임에 몰입하는 큰애는 서서 티비 화면을 뚫어져라 본다. 나는 별 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큰애가 하는 게임을 볼 때도 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큰애는 와서 다정하게 설명해 준다. 이 다정한 남자.. 근데 나 설명 같은 거 들어도 잘 몰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말해줘도 몰라.. 라면서 속으로만 말한다. 겉으론 알아듣는 척한다. 그래야 계속 말해주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다이어리가 그렇게 사고 싶다. 오래 쓰지 못할걸 알면서도. 뭐 한 달 다이어리 이런 거 얇은 거 없나. 그러면 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1년짜리는 부담스럽고, 6개월짜리도 너무 길다. 그냥 얇은 거. 구구절절 안 쓰고 감정 상태만 쓸 수 있는 그런 다이어리 말이다. 저번에 책방 갔을 때 살까 말까 하다가 그건 표정까지 그려야 해서 그런 부담스러움에 안 샀는데, 그냥 살걸 그랬나 싶다. 감정을 제대로 보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나 지금 이렇구나. 이래서 기분이 상하구나. 나 지금 이렇구나. 그래서 기쁘구나. 하는 연습말이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좋아하진 않지만 비껴가는 건 영 내 스타일과는 안 맞았다. 부딪혀보고 정면으로 돌파해야 감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애매모호한건 이제 질색이다. 이도 저도 아닌 이런 거는 인생도 이도저도 아니게 흘러가게 두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대체적으로 삶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딘가로 흘러간다. 시간이, 하루가, 그렇게 흐른다. 그건 마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벌써 오후 4시가 된 기분이랄까.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스타벅스에서 사 온 얼그레이 티 라테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또 사 먹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이걸 적어두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다. 잊기 전에 적어둬야 다음에 참고하지.라고 생각하며 메모할 다이어리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핑곗거리에 불과하고, 그냥 사고 싶은 거겠지 뭐. 이유가 필요할까.
현명한 소비습관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본다. 현명한 건 너무 어렵다. 어떻게 해야 현명해지는 걸까. 나는 그렇게는 잘 못할 것 같다. 소비에 현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 반칙이다. 물건이 주는 기쁨의 행위에 굳이 현명이라는 단어를 붙여야 하는가. 심지어 마스킹 테이프 하나를 사더라도 그런 식으로 사야 한다면, 문구류를 파는 상점들은 망할지도 모른다. 원래 제일 쓸데없는 게 제일 귀여운 법이지. 나는 현명한 소비 습관은 가지기는 힘들 것 같다. 귀여운 것들이 가끔은 삶을 살아내는 힘을 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귀여운 것들이라. 어감이 좋네.
꼭 모던한 것이 아니어도 질리지 않는 것들이 있지. 그게 바로 취향 아닐까.
어쩌면 가라앉은 기분이 귀여운 걸로 조금이나마 연해진다면, 삶의 시간도 막연한게 아닌 아주 조금은 풍요롭게 지나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