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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연 Jul 18. 2023

염색에 실패했다

염색이 망했다. 파란색 섞여 물들여달라던 머릿결이 밝은 오렌지빛에 가까운 갈색이 될 때까지 헤어디자이너와 나는 몰랐다. 그 정도로 밝아질 줄은.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원한 색이 안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된다는 디자이너의 말을 철썩같이 믿은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건지, 될 거라는 굳건한 자신감이 나온 디자이너의 마음이 강했던 건지 뭐- 여하튼 망했다. 


너무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다시 염색을 하러 오라는 말에 다음날 가서 밝은 머리를 겨우 어둡게 다시 뒤덮어 오긴 했지만 우리가 원한 색이 나오지는 않았다. 내 머리카락에 붉은기가 이렇게 많을 줄은 예상을 못했다고 했다. 보통 그 정도 파란색 염색약을 섞으면 컬러표에 나와있던 샘플 염색머리색이 나와야 하는 게 맞다고 했다. 본인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너무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는 디자이너 덕분에 나는 뭐 어찌 되었든 다시 해준다 했으니 됐다고 했다. 어떻게든 뒤덮인 머리색은 원하는 색까진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내 기준에선 밝은 머리색이고, 내 얼굴색과 그렇게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굴 탓할까. 우리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걸, 직접 해봐야 안다는 걸 깨닫게 된 경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뭐라 말할 수 있는 엄청난 자신감이 있는 여자도 아니다. 다시 해주겠다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 디자이너에게 뭐라고 해봤자 내가 얻는 이득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을 뿐. 


그리고 실은 그 처음 나왔던 머리색은 예뻤다. 요즘 나오는 드라마 여주인공의 머리색깔과 거의 흡사할 정도로, 내 머리가 길었다면 도전해 볼 만한 색이기도 했다(그만큼 여주인공이 아주 찰떡같이 소화한 머리색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 어울릴 줄은 몰랐던 색이기도 하다. 오렌지빛의 갈색이 그렇게나 안 어울리는 얼굴이었다니 나도 처음 알았다. 생각해 보니 파란톤도 헤어디자이너가 추천해 준 색이었는데, 아마 그 색으로 처음부터 잘 나왔다면 갈색이 안 어울린다는 걸 몰랐을지도 모른다. 역시, 뭐든 겪어봐야 아는 것이다. 가꾸는 것도 하던 버릇이 있어야 잘 되는지 안되는지 안다. 염색을 한 게 몇 년 만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가물가물하다. 많은 것을 잊어버리며 사는구나라고 깨달았다. 그렇게 사람은, 많은 것을 잊고 또 그런 채로 다시 시작하며 살아간다.



염색이 실패한 날. 징징거리며 남편을 들들 볶아댔다. 머리가 망했다고 이게 뭐냐며 애꿎은 남편만 붙잡고 얘기했고, 그나마 성공했다고 생각한 둘째 날엔 직접 원장이 와서 머리를 말려줬다.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머리를 적극적으로 말려주는 원장님의 손길에 굳어진 표정이 풀어지지 않아서 얼마나 민망하던지.

뭐 어쨌든 어둡게 다시 염색을 하긴 했지만 완전히 어두워지진 않았다. 워낙 밝은 톤으로 빠진 머리색은 흔적을 남기듯이 그렇게 뿌리에서부터 중간까지는 여전히 내 기준에선 밝은 머리색깔이다. 그래도 전보다 나으니 그걸로 됐다고 위안 삼으며 미용실을 나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시간이 어떻게든 흘러가고야 만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더 밝아진 톤의 머리색이 남겨져 있다. 허허. 웃어야 할지 따져야 할지 모르겠는 이 상황이 쉽지가 않다. 밝은 채로 살다가 더 더 완전히 밝아지면 그때 다시 어둡게 해야겠네라고 생각하며 거울을 뒤돌아섰다. 시간이, 어떻게든 흘러가고는 있었다.


그때쯤 되면 분명 또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지나간 과거는 들쑤시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라, 또 잊고 다시 하고 후회하려나. 나라는 사람은 참 이렇게나, 잘도 잊는다.


뭐든 잊고 싶은 기억 같은 종류들을 모아서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으레 그렇듯. 살아 나간다는 건, 생각보다 단순하고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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