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배웅이 생각났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돌릴 때까지 지켜보던 엄마의 눈이 걱정스러운 마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엄마의 얼굴이 낯설어 한참을 기억 속에서 지워낸다. 엄마가, 많이도 늙었다. 나는 그 당혹스러움이 곤란해져서 울고 싶기도 했다. 두 아들이 뒷좌석에 타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펑펑 울었으리라.
단수가 시작된 월요일이었다. 얼른 채비를 끝내고 아이들과 친정으로 향했다. 8시간이나 이어지는 단수 공사에 도저히 밖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던 나는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갔다. 다행히도 엄마가 쉬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본 엄마와 아빠는 손주 둘을 보며 활짝 웃었다.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멀게 느껴졌던 친정이라 자주 방문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고달프게 사는 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직장이라도 다녀서 갈 때마다 용돈이라도 조금씩 손에 쥐어드리는 딸이 되지 못해서 죄송스러운 적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가 내가 가장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때였다.
오랜만에 본 엄마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직장 얘기와 코로나 이야기. 친척의 이야기까지. 보따리장수가 와서 보따리를 바닥에 펼쳐놓듯 엄마의 이야기가 한 움큼 한 움큼씩 나올 때마다 엄마의 삶이 조금씩 보였다. 내가 최근 보지 못했던 엄마의 근황들은, 그 어떤 얘기들보다 재미있었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말이 많았던 사람이었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에 비해 아빠는 오히려 말수가 적어진 편이었다. 손자들을 좋아라 하는 아빠는 아이들에게 서투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나에게 욱하던 아빠는 손자에겐 욱하지 못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실제로 내가 경험하고 있었던 현장이었다. 나는, 아빠를 미워했지만 동시에 닮아가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내게는 아빠의 유전자가 존재함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아빠의 사랑방식은, 나의 사랑방식과 닮아감을, 나는 오늘 체감했다.
그렇게 손자들을 좋아하던 아빠는 늦게 일을 나가셨고, 엄마는 나에게 기어코 저녁밥까지 지어서 먹인 다음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끊임없이 해주려고 했다. 점심을 차려준 엄마는 과일을 깎고 먹이면 옥수수를 쪘고, 옥수수를 먹이고 나서 둘째를 재웠고, 아이들이 배고프다 해서 빵을 꺼내 잼을 발랐고, 강판에 감자를 갈아 이 더운 여름에 감자전을 했다. 엄마는 쉬는 날에, 나와 아이들로 인해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미안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재우기 전 엄마가 싸준 반찬 두 가지를 보면서 또 눈물을 쏟을 뻔했다. 전에 맛있다고 한 깻잎무침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미리 싸 뒀던 거다. 말로 하지 않지만 서투른 방식으로 엄마는 자신의 딸을 묵묵히 챙기고 있었다. 나는, 정말 울고 싶었다. 그건 눈물로밖에 표현이 되지 않는 애달픈 마음 같았다.
사이드 미러로 비춰본 나의 엄마 얼굴이, 정말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살다 보니, 보게 된다. 서글퍼진다. 젊었던 나의 엄마도 세월 앞에서는 약이 없었다. 그때의 엄마도, 지금의 엄마도, 나의 엄마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엄마를 보는 나의 마음도 세월을 먹은 것 같았다. 나도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는데도.
친정에 괜히 갔다. 이렇게 주룩주룩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끄적이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지 않고 울 일도 없었을 텐데. 자꾸만 엄마 얼굴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