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가 커피 캡슐이 다 떨어지다니, 얼음까지 다 컵에 넣고 물까지 부어놨건만 시키는 걸 잊었나 보다. 캡슐이 없음을 절망하며 얼른 인스턴트커피를 탄다. 이러나저러나 먹으면 똑같은 커피이니 상관없다. 지금 필요한 건 카페인이지 캡슐커피냐 인스턴트커피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말이다. 얼른 물을 조금 끓인 다음 커피를 녹이고 얼음물에 부었다. 한입 들이키고 둘째를 바라보니 티비보다가 잠든 얼굴이다. 꼭 아빠들처럼.
얼른 안아서 안방에 눕혀놓고, 컴퓨터를 켠다. 큰애는 축구 학원에 보냈다. 오 30분이나 남았어. 나는 감탄하며 운동하고 돌아올 큰아이를 기다린다. 식기세척기랑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명쾌하게 들린다.
큰아이가 풀고 있는 문제집이 끝이 보인다. 어째야 한담.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다른 문제집을 직접 보고 살래? 아니면 같은 문제집인데 이거 윗단계로 살래? 묻자마자 큰아이는 알아서 사라고 한다.
보러 가자고 하는 건 질색인가 보다. 네가 풀 문제집인데 그렇게 질색팔색 하면 어쩌자는 거야. 다다다다 잔소리하려던 입을 꾹 닫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하지 않기로 한다. 그래 뭐 윗단계로 사면되지. 잔소리할게 뭐가 있어.
어려우면 안 풀면 그만이지 뭐. 쿨하게 수긍하며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나와 아들은 생각보다 문제집은 심각하게 보진 않는 터라 한 회사가 마음에 들면 그 회사 것만 산다. 마치 한 작가가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모든 책을 한 번씩은 사서 봐야겠다는 마음처럼. 웬만해서 잘 풀면 바꾸지 않는다.
문제집 여러 권 바꿔봤자 아무 소용없다.라는 생각이 아들과 일치해서 그럴지도 모르고, 사실 좀 귀찮은 것도 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는 의외로 통하는 편이다. 아니면 아직 저학년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고학년이 되면 아예 안 할지도?
인스턴트커피도 훌륭하군. 나는 커피를 홀짝 마시며 생각한다. 그래, 인스턴트커피는 노벨상감이지. 커피를 어느곳에서나 손쉽게 타 먹을 수 있다니. 이건 엄청난 발전이야. 뭐 이런 생각도 하면서 마신다.
찬양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두고, 커피를 찬양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인가. 게다가 집도 고요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빙 둘러진 장난감 통을 보고 있기만 하며 마치 남의 아이를 보듯이 기분 좋은 얼굴로 바라본다. 까짓 거 지금 안 치운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볼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미니멀하고 깨끗하게 살기로 했는데, 금세 마음이 변했다. 좀 더러워도 사는데 문제없고, 물건 떨어지면 초조하니 몇 개 정돈 쌓아놔도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사람 마음이 쉽게 변해요. 나는 나를 너무나 잘 안다.
맞다. 한번 다짐하고 실천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같이 실천하고 실패하고 또 실천하는 사람도 있는 거지?
근거도 없는 맹랑한 이유를 대며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거지 뭐.
오늘 사온 배변패드를 보며 웃는다. 사 올 때는 무거워서 이걸 왜 내가 대체 마트까지 가서 사온 거냐며 큰애한테 엄마는 바보인 것 같다고 이걸 인터넷으로 시키면 될걸 왜 꾸역꾸역 사 오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할 땐 언제고, 그새 몸이 편해지니 양면 색종이 뒤집어지듯 마음 색이 그새 바뀌어서는 그래 다 필요하니 사온 거지 당장 떨어져서 없으면 어쩔 건데? 라며 속마음으로 말한다.
하루 만에 오는 이 편한 온라인 쇼핑 시대에 걸맞지 않은 마음이라니. 한참을 뒤떨어져 살고 있군.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뀌는 이놈의 마음이. 웃긴다.
이게 다 작은애가 잠들어서 그런 거지. 갑자기 잠들어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몸이 그새 편해졌네? 허허.
타다다다. 타자 치는 소리가 호쾌하고 즐겁다. 원래 잠들지 않았으면 같이 문제집 사러 나가자는 핑계라도 대고 또 나가볼까 했는데, 마트에 다녀온 게 피곤했는지 잠들어버렸다. 마음 같아선 같이 잠들고 싶기도 하다가도 큰아이가 왔을 때 못 깰까 봐 자는 건 하지 않기로 한다.
땀을 흘리면서 달려올 큰아이가 보고 싶기도 하고, 점점 쪼그라지는 내 마음은 큰아이가 금방이라도 올까 봐 쿵쿵 대기도 한다. 엄마들은 대부분 아이가 올 시간이 되면 초조해지고 막 그렇다. 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나름 긴장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다. 웃으면서도 쪼여지는 이 마음. 어디 둘 곳이 없네. 그렇게도 생각이 드는 이리저리 복잡 미묘한 심정이다.
아, 축구 끝났다는 카톡과 함께 그저께 주문한 책도 온다는 문자도 핸드폰 화면에 뜬다.
이제 오는구나. 싶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쿠르르릉. 천둥도 치려는지 멀리서 들려온다.
아이가 도착하기 전에 비가 너무 많이 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새 식기세척기도 다 됐다는 알람이 들린다. 뭐야 이거 다 짠 거야?
나는 이 기가 막힌 타이밍이 웃겨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정말로 어쩔 줄 모르겠는 표정이다. 비록 거울은 안 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