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유일한
남자에게 여자는 여러 면에서 약한 존재로 그의 보호를 받는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남자에게 의지하고 그의 보호 안에서 안정을 느낀다. 그런 여자가 아들을 갖게 되면 입장이 바뀐다. 여자는 처음으로 자신보다 약한 남자를 보호하고 통제하게 된다. 아들은 여자가 통제할 수 있는 첫 남자이다. 그래서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20대 때 연애할 때엔 남자 친구가 사실 별로 무겁지 않은 나의 핸드백을 대신 들어주었다. 아이를 낳고 차가 없어 혼자 지하철을 타고 친정에 갈 때 나는 아기를 실은 유모차를 번쩍 들어 계단을 올랐다. 빼빼 마른 몸에 그런 기운이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배고파서 울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지하철에서 잠깐 내려 웃통을 까고 젖을 먹였다. 아이가 배고프다는데 어쩌겠나 그럼. 내 아들은 우유병 젖꼭지도 안 빨았다. 그런 그 녀석이 얼마나 컸는지 요새는 엉덩이도 못 만지게 한다. 내심 많이 서운하지만 아들이 자라는 만큼 나의 마음은 자라지 못하는 것 같다. 아기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에게는 아가 둥둥이다. 동네에서 나는 젊은 엄마였다. 아들 또래 엄마들은 대게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나는 그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놀이터에 가면 아이들을 놀리고 엄마들은 벤치에 앉아 함께 모여 수다를 떨었지만 나는 아들의 유일한 친구여서 그 녀석과 바쁘게 뛰어노느라 항상 정신이 없었다. 내성적이라 친구들 사이에 끼기를 부끄러워하는 아들을 위해 나는 기꺼이 로보카 폴리의 친구 로이, 카봇의 친구가 되었다. (주인공은 항상 자기 차지다.)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정말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때는 하나도 창피할 게 없었다. 길을 가다가 아들이 꽃을 꺾어 나에게 들이민다. "엄마 꽃 좋아하잖아" 고맙다고 웃으며 받았지만 사실 나는 꽃을 좋아하지도, 아들에게 좋아한다고 말 한적도 없다. 자기 혼자 엄마는 꽃을 좋아하는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작고 앙증맞은 손으로 개미를 가리키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얼굴, 별거 아닌 거에 열심인 그 모습을 보면 '흐뭇한 엄마 미소'가 절로 나온다. 아이를 키우면서 덕분에 나는 잊고 살았던 많은 부분을 상기시켰다. 까먹었던 동요도 다시 부르고 잊어버렸던 크레파스의 부드러운 질감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아들이 8살이 되었을 무렵, 단 둘이 해외여행을 떠났다.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엄마인 나는 조금 낮아지고 아들은 조금 어른스러워진 모습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가 되었다. 의지할 데라곤 서로밖에 없었다. 여행을 오지 않았더라면 못 보았을 녀석의 새로운 모습을 참 많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아들은 나에게 참 솔직하게 말한다. 자기가 보기에 엄마는 조금 예쁘지 않고 그런 부분이 마음에 든다며 꼭 자기 스타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느 날은 길을 가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예쁜 구두 사지 마, 엄만 약간 낡은 운동화, 그게 어울려." 자기가 봐도 내가 화려한 스타일이 아닌가 보다. 자신의 시선에서, 자기의 생각을 나름대로 표현하는 게 너무 예쁘다. 이 녀석도 언젠가 크면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겠지 상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때 나도 질투를 할게 될까? 언젠가 시어머니가 되면 그때의 나는 어떨까? 결국에 나도 '그런' 시어머니가 될지 궁금하다. 이래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나보다.
아들이 제주도에 왔을 때, 한 시간이 넘게 버스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언젠가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말을 꺼냈다. "아들아, 엄마랑 아빠랑 이혼했어. 너도 엄마 아빠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알지? 그런데 지금 오히려 엄마는 아빠가 더 친구 같아서 편해." 별 말 안 하고 넘어가는 듯했는데, 바닷가에서 놀던 중에 갑자기 이 얘기를 꺼냈다. "엄마, 근데 아까 이혼했다고 했잖아. 그냥 다시 이혼 안 하면 안 돼?" 마음이 아팠다. "응 하기 싫어. 엄만 이대로가 좋아." "그래? 그럼 됐네" 단념을 하겠다는 건지 엄마가 행복하면 자기도 만족한다는 뜻인지 모르겠지만 이기적인 나는 그 말에 안심했다. 그리고 그 후에 더 이상 그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내 아들은. 지금은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지만 언젠가 녀석이 사춘기가 되었을 때, 혹시라도 나에 대한 원망을 할까 봐 정말 많이 무섭다. 나도 겪어보지 않은 부모의 이혼에 대해 마음이 어떨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행복해도 백 프로 완전히 즐거울 수 없는 이유. 자식은 부모에게 그런 존재인가 보다. 결국엔 나도 살아야지, 나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 이렇게 지내고 있지만 글쎄,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시간이 더 지나 봐야 알 것 같다. 어머니와 함께 살 때 있었던 일이다. 아이와 놀아주다 남편이 잠이 들었다. 남편의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어머니가 너무 귀엽지 않냐며 사진을 찍으라는 것이었다. 마지못해 찍기는 했지만 너무 소름이 돋았다. 내게는 아무 생각 없이 자빠져 자는 한심한 모습이 그녀에게는 그저 사랑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우습게도 그 마음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아기 때부터 지금 어느 순간에도 한 번도 남자가 아니라 내 손이 언제든 필요한 모자란 인간. 그게 엄마에게 아들이다. 조금 있으면 공부에 열심일 테고 친구와 갈등을 겪고 사랑에 아파도 할 녀석. 그놈의 성장이 기대가 되고, 그걸 지켜보며 내게 가끔씩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좋겠다. 요즘 아들과 통화를 하면 아이폰을 다루는 게 나보다 훨씬 낫다. 전혀 모르던 기능들을 아들은 마음껏 편하게 쓴다. 벌써 내가 나이가 든 티가 나지만 은근히 안심이 들기도 하다. 주위에 결혼해서도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그들의 삶이 좋은 면도 분명 있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말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결혼을 안 하더라도 아이는 한 번 낳아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너무 쉽게 말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너무 겁을 먹지 않아도 좋다. 힘든 점 물론 많이 있지만 인생을 배우는 데 가장 득이 되는 교본은 육아라고 생각한다. 아들을 키우면서 나도 성장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라지만 자식은 그걸 뛰어넘는 존재이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가 아닌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일을 겪게 하고 때로는 나를 무너뜨리기도,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의 화를 내게 하는 때도 있다. 그리고 나를 누구보다도 대단한 존재로 느끼게 하고 사랑을 받고 나누는 법, 어릴 때 배우고 잊고 살았던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행해야 할 기본적인 규율을 가르치면서 나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세상에 물들어 때가 끼었을 때 다시 한번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기회이다. 사람은 매번 잊는 존재이고 또 잊어야 새로운 걸 받아들인다. 나의 한 번뿐인 인생을 다채롭게 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천륜을 저버리지 않는 선에서 자식에게 독립심을 키워주는 건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한다. 방관해도 좋다. 그를 너무 간섭하지 않고, 넘어지는 순간에 눈 딱 감고 뻗치려는 손을 참고, 다시 일어나면 크게 칭찬해 주는 것. 그리고 다시 자신의 길을 가려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응원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게 나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영원한 나의 짝사랑 나의 아들, 아기코끼리에 털 났냐고 물으면 질색을 하는 녀석이다. 내 티셔츠 안에서 놀던 아기가 이렇게 많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