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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ILLUSTRATOR May 31. 2022

외도

세컨드가 될 수는 없어

영화가 끝나고 나와 혼자 길을 걸었다. 대낮에 종로 거리엔 사람들이 북적였다.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치며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하고 말했다. 그녀의 손에서 작은 인공눈물 병을 건네받아 가방에 집어넣었다. ". 감사합니다." 다시 길을 걸으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갈대밭에서 해맑게 웃으며 춤을 추는 엄마의 몸짓, 그리고  배경음악이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에 돌았다. 나의 옷차림이 가벼워 그랬는지 나는 정류장에 서서 그녀처럼  움직이고 싶은 몸을  참고 발끝으로 리듬을 타다가  웃었다. 버스가 다가오자 총총 뛰어올라탔다.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쏠리는  신경 쓰였지만 태연한 , 까슬한 나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오래 지나지 않아 산울림 소극장 정류장에 내려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그의 작업실로 향했다. 온종일 그와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고 다음  아침,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는 오늘 오랜만에 본가에  거라고 했다. 그와 일찍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미뤄두었던 작업에 다시 손을 대느라 분주했다. 이따금 그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고 저녁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아무리 집에 간다지만 연락은   있지 않나? 그리고 잠시 스치는 무언가가 나를 감쌌고 가봐야겠다는,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작이 아니길 바랐지만 오늘이 그날이 되기를 원한 것도 있었다. 계속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버스 안에서 가는 내내 여러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불안한 마음에 계속 마른 손을 만지작 대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달려 그곳에 다시 도착했다. 가뿐 숨을 몰아 내쉬고 천천히 이층 계단을 올라 머뭇거리다가 외부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에 나는 초췌했다. 이게 맞는 걸까?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어찌 됐든  여기까지 왔고 확인을 해야 했다. 작업실  앞에 멈춰 가슴을 부여잡고 문쪽으로 몸을 기울여 서서 귀를 갖다 댔다. 음악소리가 들리고 말소리도 웅성웅성 들렸다. 누군가 안에 있다. 나의 심장은 거의 튀어나올  빠르게 뛰었고 주저앉을 뻔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입술을 깨물며 문을 두드렸다. 이내 말소리가 멈추더니 조용하다. 더욱 떨리는 손으로 다시 노크를 했고, 문이 열렸다. 그녀였다. 그동안 그를 만나면서  가끔씩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 언젠가부터 그의 관심이 줄어 서운한 마음이 생겼을 테고 불안했을 거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당연히 외모도  신경 쓰게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이 뒤엎여졌다. 오랜만에  그녀의 모습은 전에 학교에서 보았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검정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던, 남자애 같던 그녀가 아니다. 머리를 길러 파마를 했고 옷도 여성스럽게 변했으며 교정기까지 끼고 있다. 오히려  쪽이 훨씬 피폐한 모습이었다. 삭발머리에  긴팔 티셔츠, 몸에  붙어야  미디스커트는 허리를 남아돌았고 맨다리에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지내셨어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떻게..."  여자가  말을 하는 동안 문틈 사이로   그와 함께 보냈던 공기를 맡았다. 누구야 하며 나온 그는 나를 보고 당황한 기색으로 다급하게 여자 친구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 일이 있어서  거야, 내가 얘기할게,  들어가 있어." 문을 닫고 그는 양팔을 허리 주춤에 올리고 고개를 위로 젖혔다가 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몸을 가만히  놔두고 계속 이리저리 흔들어 대며 매우 초조해 했다. 눈에 힘을 주어 말하는 그의  끝이 흔들리는  보였다.  맘에 들었던 얼굴이, 항상 확신에  있던  얼굴이 초라해 보였고 긴장한 나머지 본모습을 쉬이 드러내는  꼴이 너무나도 지질해 보였다.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제발 돌아가라며 애원하는  하지만 날카로운 그의 말을 무시한  나는 돌아서서 문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려고 하자 그가  손을 막았다. "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 내가 그동안 말했잖아. 여자 친구는 모른다고." 그래서  열어야 했다. 문을 열자 그녀가  맞이했고  신발을 벗어 맨발로  공간에 들어갔다. ", 정말 어쩐 일이세요? 그런데 무슨  좋은  있어요? 얼굴이  좋아 보여요..." 어떤 대꾸도   없었다. 차가운 바닥에 발을 떼고 테이블 앞에 서서 잠시 멍하니  공간을 다시 느꼈다. 어젯밤 내가 머물렀던  상태.. 그대로인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고 슬픔이 밀려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의 렌즈 세척액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없이  집어 가방에 넣었다. 대접할  딱히 없다며 그녀는 물을 내오면서 나를 마치 손님 대하듯 했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계속 서성거리다가 창문을 열어 담배를 피웠다. 그런 그를 보고 그녀가 말했다. "오빠 담배   피우잖아,  그래" 여태까지 내가  중에 인간이 보일  있는 가장 초조한 몸짓이었다. 테이블 맞은편 쪽으로 돌아와 여자 친구의 옆에 앉으려는 그에게 나는 대뜸 일어나 물컵을 들어 그의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 입을 열려고 했던 것이 나도 모르게 손이  앞섰다. 화들짝 놀라며 그의 옷에 물을 닦아내는 그녀의 모습에 화가 나고 한심했다. 그녀를 찌릿 째려보고 돌아서 천천히 걸어 신발을 챙겨 신고 나갔다.  이름을 부르며 그가 다급하게 뒤쫓아 따라왔다. "따라오지 , 씨발새끼야!" 큰소리로 소리치며 후다닥 계단을 뛰어내려와 택시를 잡아탔고 그제서야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대학 시절 내내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울타리가 있었다. 늘 한결같은 남자 친구의 보호 안에서 난 사랑을 듬뿍 받는 여자였다. 어느 날 나는 그 울타리 틈새로 다른 세계를 보았고 겁도 없이 훌쩍 넘어버렸다. "언제 여자 친구한테 말할 건데? 난 이미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지금 난 그럴 수 없어. 두 번이나 여자 친구한테 상처주기 싫다고" 이 와중에 그녀를 감싸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 날 만나지 말랬더니 그것도 못하겠단다. 그래도 곧 헤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감히 나를 본인의 세컨드로 두겠다는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거다. 전 남자 친구가 생각났다. 그를 생각하니 이 상황이 더 말도 안 되었다. 그에게 난 언제나 우선이었다. 그런 나를... 그 어마어마한 사건 이후, 난 다시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놈에게 연락을 했지만 그쪽에서 연락을 피했다. 어느 날, 샤워를 하던 중에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내 앉았다. '내가 여태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속에서 무언가가 훅 빠져나간 후 큰 공허함을 느꼈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에 피눈물 흐른다는 말을 실감했다.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던 날, 내 앞에서 눈물을 훔치는 그에게 난 한마디 위로도 하지 않았다. 멀찌감치 서서 집으로 들어가는 내 모습을 몰래 보는 걸 봤음에도 내 마음은 동요하지 않았다. 대가를 단단히 치르리라. 이후에 난 그놈이 여행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우주를 폭파시키려 했던 내 모든 것이 사라졌다'라고.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내 인생에 그때만큼 열정이 요동치던 시기는 없다. 내 안에 끌어 오르는 걸 어떻게든 표출해야 했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작업 스타일에 대한 동경심도 있었다. 그의 삶 속에 한 부분이 되어 함께 공유하고 성장하기를 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말 그와 연인이 되었다면 난 아마 크게 실망했을게 뻔하다. 비현실적인 나의 망상에 그를 끌어들였고 계속해서 꿈을 꿨던 것이다. 마침내 빵 하고 터져 저 멀리 어둠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 그냥 허망한 꿈.



나른한 공기가 도는 날이었다. 방에서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던 중에 거실에서 들려오는 티브이 말소리에 심장이 뛰었다. 거실로 나가 티브이 앞에 서서 화면에 나오는 그를 보았다. 해외봉사 단체에 참가한 사람들 중 그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자막에 그의 이름이 떴다. 마지막 메일에 내가 했던 어떤 말이 떠올랐다. '네가 정말 그 사람들을 돕고 싶으면 네 작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그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게 나을 거 같다'라고 했던 말이 그의 가슴을 찔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따라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어 거실 바닥에 나뭇잎의 그림자가 드리워 흔들리고 있었다. 난 짧게 미소를 머금었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안고 나와 집을 나섰다. 몇 해가 지나 한 친구를 통해 그의 소식을 들었다. 아는 지인과 같이 우연히 함께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고. 오랜만에 보는 자리에서 서로의 근황을 묻다가 그가 얼마 전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됐고, 묻지도 않은 말에 요새 와이프랑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을 했단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내 이름을 들먹이며 "걔는 잘 사나?"라고 혼잣말처럼 하는걸 친구가 들었다고 했다.

"아, 저는 여자 친구가 있긴 한데 지금 우린 사이가 별로 안 좋아요."                                                   

똑같은 레퍼토리. 끝까지 개새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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