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광기어린
응급실에서 엄마가 나의 손을 잡고 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재수... 하고 싶으면 해..." 그 말에 얼마나 기뻤던지. 다행히 다른 특별한 조치 없이 나는 병원에서 그날 바로 퇴원했다. 월드컵의 열기가 여전히 남아있던 그 해 겨울, 대한민국의 고3 수험생들은 그 미친 광기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능 당일, 시험을 마치고 괴성을 지르며 친구들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이전의 삶은 이 날을 위해 길러진 거나 다름없다. 답안지가 떴다는 소식을 듣고 다들 벌렸던 입을 다물고 각자 무거운 걸음으로 헤어졌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긴장하며 채점을 하던 나는 점점 가슴이 쿵덕쿵덕 빠르게 뛰었다. 마우스에서 손을 떼자마자 호흡이 더욱 가빠졌고 점점 거칠어졌다. 갑자기 손가락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펴지지 않았다. 그대로 의자에서 쿵 떨어져 아빠 등에 업혀 응급실로 실려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모아 온 나의 통지표를 보면 장래희망에 '디자이너' 아니면 '화가'라고 쓰여있다. 워낙에 먹고살기 바빴던 부모님은 자식의 진로를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고 알아서 잘하겠거니 했던 터라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에 있었지만 이에 대한 특별 교육을 받지 않았다. 고3이 되었을 때, 친한 친구가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는 자신의 꿈을 위해 정규 코스를 밟기로 한 것이다. 부러웠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그 친구는 자기가 다니던 미술학원에 내 얘기를 했고 나는 장학생으로 그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단 몇 개월 만에 입시 미술을 준비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다른 친구들이 지원할 학교의 실기시험 종목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이제 막 선 그리기를 시작했고, 석고상을 백번도 넘게 그렸을 그들 옆에서 난 처음 아그리파의 두상을 그렸다. 그렇게 석고상 두 번, 수채화 한 번을 마치고 바로 옆 반으로 옮겨 대학 실기 시험을 위한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수능 점수가 평소에 치렀던 모의고사에 비해 평균 100점이나 떨어졌다. 결국 지원했던 대학에 다 떨어졌고 엄마는 재수를 원하면 하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재정적으로 지원해주겠다는 말은 안 했다. 기대도 안 했기 때문에 앞으로 할 일을 알아서 만들어가야 했다. 이듬해 3월이 되자 미술학원은 다시 입시의 열기가 슬슬 달아올랐다. 재수학원 대신 고3 때 들었던 인터넷 강의를 재수강해서 들으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오전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에는 미술학원에서 실기 준비를 했다. 작년에 함께 입시를 준비하던 동지 몇몇이 강사로 옆 반에서 2학년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어느 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학원 선생님들 회식 자리에서 내 얘기가 나왔는데, 결과가 안 좋았고 더는 장학생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니 내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친다'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더 이를 악물게 되었다.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려 학원비를 충당했고 미술학원에서 가장 늦게 남아 선생님들이 퇴근한 후에 내가 열쇠를 챙겨 문을 잠그고 밤늦게 집에 갔다. 입시미술의 피크인 겨울방학 특강 시기가 돌아왔다. 수능 시험을 마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실기시험 준비에 돌입한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실제 시험 시간에 맞춰 4시간씩 모의시험을 매일 두 번 치렀다. 작은 학원이라 학생 수가 많지 않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루 종일 함께 지내면서 서로에게 경쟁상대이자 협력자가 된다. 서로의 그림을 평가하고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도와주면서 함께 각자의 꿈에 도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다. 교실에는 밥솥과 김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선생님은 우리가 시험을 보는 동안 밥을 한솥 해서는 김을 말아 산더미처럼 쟁반에 쌓아 올렸다. 땡 하면 다 같이 몰려들어 다 닦이지 않은 손으로 김밥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모두 나를 보고 어김없이 웃는다. 유독 나만 얼굴에 항상 까만 파스텔이 잔뜩 묻어 별명이 광탄 소녀였다.
디자인, 예술대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수능이 끝나고도 이렇게 큰, 어쩌면 수능보다도 더 중대한 시험이 남아있다. 주제가 뭐가 나올지 몰라 최대한 많은 소재를 다루어야 하고 주제에 대한 해석력도 길러야 한다. 색채 도구도 전문가처럼 다루게끔 계속해서 연습하고 부족한 걸 잘하도록, 잘하는 건 최고가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긴장감이 떨어졌다 싶으면 선생님의 매질도 기꺼이 감당했으며 매보다도 무서운, 그림에 대한 지적 또한 눈물을 꾹 참고 들어야 했다. 집에 갔다가 다시 오는 시간이 아까워 그 차가운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누웠고 머리가 깨질듯한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 수능 과목을 하나씩 맡아 서로에게 선생이 되었고 가끔씩 찾아오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의 방문에 반가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알기에 서로를 격려했다.
초긴장 상태로 다들 눈을 똑바로 뜨고 칠판의 하얀 초크를 바라본다. 주제가 나왔다. 젠장. 이 학교가 미쳤나 보다. 주제 밑에 한 줄이 더 쓰였다. '파스텔 금지'. 조용한 탄성이 들리고 누군가는 벌써 도화지에 연필을 대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 학교의 실기 과목에 대한 재료로 많은 학원에서 파스텔을 사용했다. 나 또한 들고 간 재료가 연필과 파스텔뿐이었다. 망했다. 아이디어 스케치를 마치고 도화지에 구도를 잡아 모든 스케치를 마치고 잠시 멍하니 앉았다. 어쩌지? 옆의 경쟁자들은 수채화 도구를 꺼내 칠을 하고 있고 콘테나 색연필이 놓여져 있기도 했다. 좀 더 둘러보니 절망하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나와 같은 상황이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쓸 걸 알고 재료 제한을 두었다는 건 이 학생의 위기상황 대처를 보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래도 파스텔을 썼다는 건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선택했다고 평가하지 않을까? 단 1초가 아까운 시간에 벌떡 일어나 파스텔 뚜껑을 열었다.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선생님의 얼굴이 스쳤고 지난 시간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거의 울먹이며 파스텔을 벅벅 가는데 감독관이 내 앞에서 잠시 멈췄다. "어? 파스텔 쓰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어떡해요 가져온 게 이것밖에 없는데" 괜히 그녀에게 짜증을 냈다. "그럼 아예 채점 대상에서 배제될 수도 있어요."말하며 정말 걱정하는 듯 한 눈길을 보내며 지나갔다. 그녀도 알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이 날을 위해 준비했는지.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종이를 들어 파스텔을 털어냈다. 조심스럽게 깎아 연필심이 길게 나오도록 만든 후 천천히 망에 대고 갈았다. 파스텔 대신 연필로 채색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 배경을 깔고 섬세한 부분은 연필심을 뾰족하게 해서 묘사했다. 처음으로 흑백 그림을 그렸다.
강당에 디자인과의 모든 학생들이 모였다.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일 것이다. 그동안 입시에 찌든 티를 다 벗지 못했다. 시험에 관한 얘기, 어디서 왔냐는 인사말, 학원에서 지냈던 얘기 등 강당 안에 웅성대는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 모두 각자의 역경을 헤치고 다음 꿈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다들 각자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이곳에서 또다시 경쟁해야 할지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전에 무슨 있었든 간에 지금 이 순간 공평한 위치에서 시작을 밟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