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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ILLUSTRATOR Jun 10. 2022

아빠의 직업

독고다이

그놈의 가정조사문...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학기 초에 매번 저걸 받았다. 이 종이가 나는 그렇게 싫었다. 남의 가정조사를 왜 하는지, 우리 엄마 아빠의 직업이랑 학력을 왜 알아야 하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시절 어린 내가 봐도 이건 대놓고 학생을 차별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로 보였다. 누군가는 드디어 담임선생님께 나의 부족한 점을 받쳐줄 든든한 배경을 은근히 알려줄 기회였을지 모르지만 내 어깨는 또 축 처진다. '부'의 직업란에 알아서 쓰면 될 걸 괜히 한 번 아빠에게 확인한다. "아빠, 뭐라고 써?" "건축업이라고 써. 아, 됐다 그냥 노동이라고 써, 막노동. 그게 더 정확하지 뭘." 바닥에 누워 종이에 받아쓰던 나는 지우개로 지웠다가 다시 적었다. 아무래도 '건축업'이 더 좋게 들렸다. 이러면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뭐 그렇게 먼 얘기도 아니고. 가정조사문을 제출하고 나면 그 후로 며칠간 담임선생님의 반응을 살폈다. 이제 어떤 편견을 가지고 나를 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나를 부엌으로 불렀다. "오늘 너희 학교에서 우편물이 왔어. 네가 쓴 원고문을 선생님이 보냈더라. 지금 아빠가 그거 보고 있는데 한 번 가봐." 얼마 전 학교에서 글짓기 시간에 '아버지'를 주제로 원고지에 글을 썼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조금 열린 방문을 밀어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아빠가 내 책상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원고지를 넘기는데 울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때는 가정조사문 말고도 육성회비 면제를 받으려면 가계 수입이 얼마인지 적는 등 가정형편이 좋지 않다는 증명서를 작성해서 내야 했다. 딸 셋 중에 유독 나한테만 이걸 시키는 게 불만이었는데, 엄마는 네가 그래도 제일 말을 잘하니까라고 했지만 난 내성적이고 그런 아쉬운 말을 잘하지도 못하는 성격이다. 반에서 말썽을 자주 일으키던 친구들의 부모님이 선생님이나 사업을 하는 걸 알고 나서 왠지 주눅이 들었다. 대학에 가서도 난 잘 지냈지만, 가족 얘기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면 자리를 피했다. 그럴 때마다 평소에 명랑하던 나의 모습과 괴리감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시어머니를 처음 뵈던 날, 줄곧 두려워하고 있던 질문을 받았다. '아버지가 무슨 일하시냐?''라고. 아빠가 더 좋은 직업을 가졌더라면, 우리 집이 더 잘 살았더라면 내가 덜 무시 받았을까 하는 생각도 당연히 자주 들었다. 좋아하던 남자가 자기는 이제 머리 쓰는 일이 진절머리가 나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몸 쓰는 막노동을 하고 싶다고 말 한 적 있다. 그놈은 당연히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가슴이 콕 찔려 순간 화가 났고 마음이 아팠다. 머리 쓰는 직업이 아니라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 인생의 막장에 다다랐을 때 세상의 눈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막무가내 정신을 가지고 밑바닥에서 시작할 수 있는 일. 그 일이 아빠에겐 평생 직업이었다. 아빠가 총감독해서 지은 다세대 주택의 분양 하우스를 오픈하던 날, 아빠는 날 그곳에 데려갔다. 집을 다 둘러본 후 아빠는 거실 창문을 열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물며 내게 물었다. "아빠가 집 지은 거 보니까 어떠냐?" "대단해. 집 이뻐" "그렇지? 네가 그림 잘 그리는 건 다 아빠를 닮아서야." 안 쑥스러운 척 말하는 아빠에게서 처음으로 '자부심'을 보았다. 본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그리고 딸에게 그걸 솔직하게 말했다는 사실에 정말 고마웠다. 아빠는 어릴 때 동네에서 알아주는 유능한 녀석으로 증조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형편도 넉넉한 편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노름과 풍기 문란으로 가계가 기울었고, 세상 물정 모르던 할머니는 울기만 했단다. 다섯 남매 중 장남이었던 아빠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빚을 다 갚았을 무렵 할아버지는 또 다른 빚을 얹어주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난 아빠가 단 한 번도 할아버지의 눈을 마주치며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자기도 자기 아빠한테 잘하지 않으면서 굳이 우리보고는 잘하라고 하는지 그게 불만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입관식을 하던 날, 온 가족이 모여 있는 가운데 아빠와 고모의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결국 아빠는 평생을 묵혔던 분노를 터뜨렸다. 그간의 한이 목구멍을 타고 울먹였다가 찡그리는 표정과 함께 있는 힘껏 터져 나오기를 반복했다. 누구도 아빠를 말릴 수 없었고 눈치만 봤다. 결국 입관 치르는 걸 제대로 다 보지 못한채 언니와 나, 동생 그리고 엄마는 차에 올라탔다. 무거운 공기 속에 차는 덜컹거리며 논밭을 달렸다. 한참 지나던 도중 아빠는 갑자기 차를 세웠고 핸들을 부여잡은 채 엉엉 울었다.


내가 아이를 낳자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잊어버렸던 아빠의 미소를  아이를 키우면서 다시   있게 되었다. 아빠는 손주들을  예뻐한다.  녀석이 점점 크면서 좁은 우리 집이 불편해지나 보다. 은근히 가기 싫다는 투를 비추면 나도 모르게 애를 다그친다. 생각해 보면 나도 시골에 가는  즐겁지만은 않았다. 어떻게든 이사를 하였으면 하는 마음에 엄마한테 가끔 물어보지만, 엄마도 같은 희망 사항일 뿐이다.   안에 재개발이 들어갈 거라는  염두에 두고  집에 아직 10년이 지나도록 살고 있다. 아빠는 언제 팔릴지 모를   벽에 소나무 판자를 대고 천장을 뜯어 높게 만들어 마치 펜션처럼 만들어 놓았다. 아들과 친정에 가면 저녁때쯤 먼지 구덩이가  아빠가 퇴근해서 들어오신다. 이제는 허리도 약간 굽었고 머리칼은 시멘트 먼지만큼 하얗게 셌다. 일부러 말을  하고 가는 이유는 손주를 보고 놀라 반가워하는 아빠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다. 멀끔히 샤워를 마치고 나와 식사하고 나면 티브이를 보고 있는 아들을 불러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한참  둘은 양손에 과자가 잔뜩  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아직도 내가 가면 용돈을 주시고 "나중에 아빠가    때가 되면 그때 네가 아빠 줘라." 하고 말씀하신다. 와이프    제대로 안사줬어도 딸들 먹고 입히는 데에는 후했더라고 엄마가 말했다. 딸이 셋인  부끄러워 멀찌감치 떨어져 다녔고, 무슨 말만 하면 결국 흥분해 버리는 다혈질에, 세상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그렇게도 많은지, 아빠는 독고다이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하며 살았다. 얼마  입양된 동생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번째로 아빠가 우는  보았고 가족 중에 혼자만 유일하게 그녀와 꾸준히 연락하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놀던 동네 친구가 한 날 나오지 않았다. 자전거가 너무 타고 싶어 그 친구의 집에 찾아갔지만, 학원에 가고 없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친구의 엄마께 자전거를 빌려 타도되겠느냐고 물었고 아주머니는 잠시 들어오라며 같이 갔던 친구와 나를 집안에 들였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 얘기를 한참 하셨는데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무릎을 꿇고 앉아 들었던 걸 생각하니 그 자리가 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날 자전거를 잘 타고 돌려주었고 다음부터 그 집에 자전거를 빌리러 가지 않았다. 노을이 지는 저녁, 밖에서 한창 노는데 저 멀리 아빠의 하얀 트럭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아빠!" 하고 크게 소리치며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웃으며 내린 아빠는 트럭 뒤를 가리켰다. 형광 노랑의 자전거가 실려있었다. 언니가 아빠가 다 같이 타라고 사준 걸 왜 자꾸 '네 자전거'라고 부르냐고 따지는 말에 대꾸는 안 했지만, 아직도 기억한다. 조작되었을지도 모르는 내 기억에 그 즈음은 내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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