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다이
그놈의 가정조사문...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학기 초에 매번 저걸 받았다. 이 종이가 나는 그렇게 싫었다. 남의 가정조사를 왜 하는지, 우리 엄마 아빠의 직업이랑 학력을 왜 알아야 하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시절 어린 내가 봐도 이건 대놓고 학생을 차별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로 보였다. 누군가는 드디어 담임선생님께 나의 부족한 점을 받쳐줄 든든한 배경을 은근히 알려줄 기회였을지 모르지만 내 어깨는 또 축 처진다. '부'의 직업란에 알아서 쓰면 될 걸 괜히 한 번 아빠에게 확인한다. "아빠, 뭐라고 써?" "건축업이라고 써. 아, 됐다 그냥 노동이라고 써, 막노동. 그게 더 정확하지 뭘." 바닥에 누워 종이에 받아쓰던 나는 지우개로 지웠다가 다시 적었다. 아무래도 '건축업'이 더 좋게 들렸다. 이러면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뭐 그렇게 먼 얘기도 아니고. 가정조사문을 제출하고 나면 그 후로 며칠간 담임선생님의 반응을 살폈다. 이제 어떤 편견을 가지고 나를 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나를 부엌으로 불렀다. "오늘 너희 학교에서 우편물이 왔어. 네가 쓴 원고문을 선생님이 보냈더라. 지금 아빠가 그거 보고 있는데 한 번 가봐." 얼마 전 학교에서 글짓기 시간에 '아버지'를 주제로 원고지에 글을 썼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조금 열린 방문을 밀어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아빠가 내 책상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원고지를 넘기는데 울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때는 가정조사문 말고도 육성회비 면제를 받으려면 가계 수입이 얼마인지 적는 등 가정형편이 좋지 않다는 증명서를 작성해서 내야 했다. 딸 셋 중에 유독 나한테만 이걸 시키는 게 불만이었는데, 엄마는 네가 그래도 제일 말을 잘하니까라고 했지만 난 내성적이고 그런 아쉬운 말을 잘하지도 못하는 성격이다. 반에서 말썽을 자주 일으키던 친구들의 부모님이 선생님이나 사업을 하는 걸 알고 나서 왠지 주눅이 들었다. 대학에 가서도 난 잘 지냈지만, 가족 얘기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면 자리를 피했다. 그럴 때마다 평소에 명랑하던 나의 모습과 괴리감이 들어 마음이 불편했다. 시어머니를 처음 뵈던 날, 줄곧 두려워하고 있던 질문을 받았다. '아버지가 무슨 일하시냐?''라고. 아빠가 더 좋은 직업을 가졌더라면, 우리 집이 더 잘 살았더라면 내가 덜 무시 받았을까 하는 생각도 당연히 자주 들었다. 좋아하던 남자가 자기는 이제 머리 쓰는 일이 진절머리가 나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몸 쓰는 막노동을 하고 싶다고 말 한 적 있다. 그놈은 당연히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가슴이 콕 찔려 순간 화가 났고 마음이 아팠다. 머리 쓰는 직업이 아니라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 인생의 막장에 다다랐을 때 세상의 눈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막무가내 정신을 가지고 밑바닥에서 시작할 수 있는 일. 그 일이 아빠에겐 평생 직업이었다. 아빠가 총감독해서 지은 다세대 주택의 분양 하우스를 오픈하던 날, 아빠는 날 그곳에 데려갔다. 집을 다 둘러본 후 아빠는 거실 창문을 열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물며 내게 물었다. "아빠가 집 지은 거 보니까 어떠냐?" "대단해. 집 이뻐" "그렇지? 네가 그림 잘 그리는 건 다 아빠를 닮아서야." 안 쑥스러운 척 말하는 아빠에게서 처음으로 '자부심'을 보았다. 본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그리고 딸에게 그걸 솔직하게 말했다는 사실에 정말 고마웠다. 아빠는 어릴 때 동네에서 알아주는 유능한 녀석으로 증조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형편도 넉넉한 편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노름과 풍기 문란으로 가계가 기울었고, 세상 물정 모르던 할머니는 울기만 했단다. 다섯 남매 중 장남이었던 아빠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빚을 다 갚았을 무렵 할아버지는 또 다른 빚을 얹어주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난 아빠가 단 한 번도 할아버지의 눈을 마주치며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자기도 자기 아빠한테 잘하지 않으면서 굳이 우리보고는 잘하라고 하는지 그게 불만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입관식을 하던 날, 온 가족이 모여 있는 가운데 아빠와 고모의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결국 아빠는 평생을 묵혔던 분노를 터뜨렸다. 그간의 한이 목구멍을 타고 울먹였다가 찡그리는 표정과 함께 있는 힘껏 터져 나오기를 반복했다. 누구도 아빠를 말릴 수 없었고 눈치만 봤다. 결국 입관 치르는 걸 제대로 다 보지 못한채 언니와 나, 동생 그리고 엄마는 차에 올라탔다. 무거운 공기 속에 차는 덜컹거리며 논밭을 달렸다. 한참 지나던 도중 아빠는 갑자기 차를 세웠고 핸들을 부여잡은 채 엉엉 울었다.
내가 아이를 낳자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잊어버렸던 아빠의 미소를 이 아이를 키우면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손주들을 참 예뻐한다. 이 녀석이 점점 크면서 좁은 우리 집이 불편해지나 보다. 은근히 가기 싫다는 투를 비추면 나도 모르게 애를 다그친다. 생각해 보면 나도 시골에 가는 게 즐겁지만은 않았다. 어떻게든 이사를 하였으면 하는 마음에 엄마한테 가끔 물어보지만, 엄마도 같은 희망 사항일 뿐이다. 몇 년 안에 재개발이 들어갈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산 집에 아직 10년이 지나도록 살고 있다. 아빠는 언제 팔릴지 모를 이 집 벽에 소나무 판자를 대고 천장을 뜯어 높게 만들어 마치 펜션처럼 만들어 놓았다. 아들과 친정에 가면 저녁때쯤 먼지 구덩이가 된 아빠가 퇴근해서 들어오신다. 이제는 허리도 약간 굽었고 머리칼은 시멘트 먼지만큼 하얗게 셌다. 일부러 말을 안 하고 가는 이유는 손주를 보고 놀라 반가워하는 아빠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다. 멀끔히 샤워를 마치고 나와 식사하고 나면 티브이를 보고 있는 아들을 불러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한참 후 둘은 양손에 과자가 잔뜩 든 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아직도 내가 가면 용돈을 주시고 "나중에 아빠가 돈 못 벌 때가 되면 그때 네가 아빠 줘라." 하고 말씀하신다. 와이프 옷 한 벌 제대로 안사줬어도 딸들 먹고 입히는 데에는 후했더라고 엄마가 말했다. 딸이 셋인 게 부끄러워 멀찌감치 떨어져 다녔고, 무슨 말만 하면 결국 흥분해 버리는 다혈질에, 세상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뭐 그렇게도 많은지, 아빠는 독고다이로 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하며 살았다. 얼마 전 입양된 동생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세 번째로 아빠가 우는 걸 보았고 가족 중에 혼자만 유일하게 그녀와 꾸준히 연락하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놀던 동네 친구가 한 날 나오지 않았다. 자전거가 너무 타고 싶어 그 친구의 집에 찾아갔지만, 학원에 가고 없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친구의 엄마께 자전거를 빌려 타도되겠느냐고 물었고 아주머니는 잠시 들어오라며 같이 갔던 친구와 나를 집안에 들였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 얘기를 한참 하셨는데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무릎을 꿇고 앉아 들었던 걸 생각하니 그 자리가 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날 자전거를 잘 타고 돌려주었고 다음부터 그 집에 자전거를 빌리러 가지 않았다. 노을이 지는 저녁, 밖에서 한창 노는데 저 멀리 아빠의 하얀 트럭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아빠!" 하고 크게 소리치며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웃으며 내린 아빠는 트럭 뒤를 가리켰다. 형광 노랑의 자전거가 실려있었다. 언니가 아빠가 다 같이 타라고 사준 걸 왜 자꾸 '네 자전거'라고 부르냐고 따지는 말에 대꾸는 안 했지만, 아직도 기억한다. 조작되었을지도 모르는 내 기억에 그 즈음은 내 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