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마약
마티의 집에서 지낸 지 2주 정도 지닜을 즈음, 난 이미 그곳에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가끔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런 시골에 무엇하러 왔냐고 물으면 특별할 거 없이 그냥 여행 와서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워낙에 볼거리도 없고 관광지도 아니니 별안간 동양인의 등장에 그들도 의아해했을 것이다. 나의 일상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요가를 하고 때에 맞춰 밥 해 먹고 오후에 아들과 함께 마트를 가는, 정말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마티는 항상 정해진 시간에 합주 연습을 하러 나갔고 간호사인 칼도 일하느라 바빴다. 가끔 저녁에 모여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칼과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친누나가 이곳에 휴가를 올거라며 네가 괜찮다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안 그래도 두 남정네와 지내다 보니 여자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터에 너무나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스웨덴에서 사귀게 될 첫 여자 친구라니! 생각해보니 두 남자가 아니라 아들까지 세 남자와 살고 있는 중이었다. 수다를 떨 여자 친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칼은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누나가 오면 우리 다 같이 사우나에 갔으면 하는데, 어때 너도 같이 갈래?"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다. 핀란드식 사우나로 호숫가 옆에 작은 오두막 안에서 몸을 데우고 밖으로 나가 호수에서 수영을 하는 그 사우나.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고 칼도 좋아하며 나갔다.
얼마 후 2층에서 마티가 내려오더니 내 맞은편에 앉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말을 꺼냈다.
"칼한테서 너도 사우나 갈 거라는 얘기 들었는데 정말 갈 거야?"
"응, 갈 건데 왜?"
"하하 그래? 그런데 너 정통 스웨덴식 사우나가 어떤지는 알고 있는 거지?"
무슨 말일까. 내가 티브이에서 봤던 그게 다가 아닌가. 난 내가 알고 있는 대로 그에게 설명했다.
"맞아. 그렇게 하는 건 맞는데 사실 정통적으로 우린 수영복을 입지 않아"
"그럼? 뭐 입고하는데?"
"아무것도 안 입지." 장난기가 얼굴에 가득했다. 그 말에 난 잠시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머뭇거리는 나를 보며 그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물론 우리 중에도 발가벗는 걸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사람들은 안에서 수영복을 입기도 해. 내 친구 티아도 종종 그래. 그리고 널 위해서 칼과 나도 타월쯤은 챙겨갈게"
"그래? 고맙네. 그럼 뭐 나도 수영복 챙겨 왔으니까 그걸 입을게."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낯이 뜨거웠다. 그리고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아니, 그럼 가족끼리도 다 발가벗고 하는 거야?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이랑 다 발가벗고?"
"그럼 당연하지. 우린 어릴 때부터 다 같이 사우나를 하니까 커서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아들과 나는 맨몸을 보여줄 수 있다 당연히. 하지만 내 부모님과 그럴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뭔가 불편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내가 어릴 때 나도 아빠와 목욕을 했을 것이다. 어린 나를 아빠가 목욕을 한 번쯤은 시켜줬겠지. 그럼 우린 언제부터 서로의 맨몸을 보이는 게 부끄럽다고 여기게 된 걸까? 크면서 부모와 멀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게, 그리고 우리네보다 훨씬 더 빨리 자식을 독립시키고 본인의 인생을 꾸려가는 이 외국인들이 가족끼리 저렇게 격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찌 보면 더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운 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마티는 이따가 사우나로 오겠다며 연습을 하러 나갔고 칼은 아들과 나를 데리고 먼저 사우나 장소로 향했다. 차로 한 10분쯤 가다가 갑자기 어느 집에 차를 대고선 내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집에 있던 자전거를 꺼내더니 상태를 점검하고 한 대는 본인이, 한 대는 나에게 타라고 주었다. 일단 핸들을 잡기는 했는데 이건 뭐 굴러가기는 하나 싶을 정도로 낡고 심지어 브레이크도 없었다. 그는 페달을 뒤로 돌려 바퀴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바로 출발했다. 정말 엄청 당황했다. 까치발을 해도 땅에 닿지 않는 높이에 페달을 뒤로 돌려 브레이크를... 뭐 어쩌라는 건지. 하지만 망설일 새가 없었다. 그 고물 자전거 뒤에 내 아들을 태우고 씽 달려버리는 그를 따라 나도 서둘러야 했다. 도로를 몇 미터 지나자 그는 자전거를 세우더니 곧 숲으로 들어갔다. 자갈밭에 자전거를 끌고 가던 그가 다시 올라타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이 자갈밭을 자전거로 달리라고? 이건 뭐 산 넘어 산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쌩쌩 달리는 그를 놓칠까 나도 안간힘을 써서 달렸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결국 눈앞에 그가 사라졌다. 두 갈림길에 다다랐을 때 난 자전거에서 내려 숨을 고르는데 갑자기 저기서부터 공포가 엄습해왔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 바람 소리만 윙윙 들렸고 세차게 흔들리는 나뭇잎이 꽉 찬 나무로 둘러싸인 한가운데서 나는 처음으로 거대한 자연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없이 작은 존재의 나를 느꼈다. "칼-...... 진아-......" 목청 힘껏 부르고 잠시 귀를 기울이는데 들려오는 건 여전히 바람 소리뿐이다. 그리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더 지체할 수가 없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오른쪽 길로 내달렸다. 거의 울음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뻔하는 걸 숨이 차서 내뱉지 못했다. 간절히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무작정 달렸더니 저 멀리에 오두막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사람의 움직임이 보였다. 아들과 칼이었다. 난 뭐 거의 울상을 하고 그에게 다가가 버럭 화를 냈다
"그렇게 먼저 가버리면 어떡해! 나 정말 무서웠다고! 그리고 네가 내 아들을 태우고 가니 내가 정말..."
그는 미안한 얼굴로 내 어깨를 다독이다가 한 마디 던졌다.
"저기, 여긴 자연이야. 전혀 두려울 게 없는 곳에 있는데 뭘 그렇게 무서워해.
우린 자연 안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사실 나를 위협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 거대한 자연을 온몸으로 느낀 게 처음이라 그 경건함에 놀란 것이었다.
칼은 사우나로 들어가 잠시 안내를 해주고 다시 밖으로 나와 마른 나뭇조각을 최대한 모아 오라고 일렀다. 주변에 작은 나뭇가지들이 널려있어 금방 많은 양을 모아 왔다. 그리고 오두막 뒤로 가서 벽에 쌓여있던 장작을 도끼로 패기 시작했다. 몇 개 하다가 도끼를 나에게 건넸다. 안에 난로를 확인해야 한다며 나에게 장작 패는 것을 맡기고선 떠났다. 졸지에 난 난생처음 장작을 패야 했고 해 보니 나름 잘했다. 장작과 아까 모아둔 마른 나뭇조각들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칼은 장작을 난로 안에 넣고 나뭇조각들을 불쏘시개로 써 금방 불을 지폈다. 그는 또 나에게 불이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며 벽에 걸린 온도계를 가리켰다.
"지금 50이라고 되어있지? 이게 70까지 올라가도록 만들면 돼. 난 지금 누나를 데리러 갈 거니까 넌 그동안 계속해서 그 온도를 유지시켜 놔야 해"
20분쯤 지났을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칼과 누나가 온 것이다. 아무도 없을 때 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사우나 안에서 긴장하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발 누나도 수영복을 입었기를... 잠시 후 그녀와 칼이 사우나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그녀는 수영복을 입고 있었고 우린 반갑게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칼은 하의에 타월을 두르고 있었다. 우리는 열기가 가득한 사우나 안 벤치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순간에도 난 손을 어디에 둘 지 몰라 안절부절못했고 티를 안 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은 못 참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한국식 찜질방과는 비교도 안되게 높은 온도라 아들에게는 뜨거웠을 것이다. 셋이 남아 조용히 앉아있는데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잠시 뒤 문을 열고 마티가 들어왔다. 그는 말없이 조용히 자리를 잡아 몸을 뉘었다. 칼이 일어나 아까 떠 두었던 물을 바가지로 퍼서 난로 위에 데워진 뜨거운 돌 위에 뿌렸다. 촤아- 하고 연기가 금방 실내를 채웠고 순간 열기가 확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온몸에 땀이 맺히더니 서서히 몸을 타고 떨어졌다. 후아- 하고 숨을 내쉬는데 몸이 땅바닥으로 꺼지는 줄 알았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더니 점점 숨이 가빠졌다. 다들 몸을 뒤척이더니 눈을 마주쳤다가 무슨 신호를 건네받은 양 다 같이 일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제일 먼저 나간 마티와 칼이 덱을 걸어 돌렀던 타월을 잡아채 던지더니 바로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 뒤로 칼의 누나가 뛰었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물속에 온전하게 떠 있는 걸 확인하고 내가 조심스럽게 덱에 연결된 바를 잡고 천천히 물속으로 내려갔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몸을 풍덩 담갔다가 머리를 젖혀 몸을 물 위에 띄웠다. 귀가 잠겨 찰랑대는 물소리만 들렸다. 호수에 그대로 비추던 하늘이 내 눈앞에 장황하게 들어왔다. 정말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먹먹하게 아무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 하늘과 물,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내가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물에서 각자 천국을 만끽하고 다시 물 밖으로 나가는데 처음처럼 두 남자가 먼저 바를 붙잡고 계단을 올랐다. 발거 벗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오히려 그 상황에 그게 더 어울려 보였다. 그렇게 사우나에서 몸을 데우고 다시 호수에 뛰어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사우나에 앉아 또다시 열을 올리는데 갑자기 몽롱함을 느꼈다. 정적을 깨고 칼이 말을 꺼냈다.
"아, 점점 몽롱해진다. 넌 어때, 괜찮아?"
"안 그래도 나도 점점 몽롱해지고 있어. 근데 기분 좋아."
"하하 너도 이제 이 맛을 알았구나! 그래서 스웨덴에선 사우나를 건강한 마약이라고 하지."
마약이라... 해 본 적은 없지만 술에 취한 느낌을 아니 어느 정도 상상이 되었다. 정신이 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몸이 나른해지고 알 딸 해지는 게 마치 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건강한 마약이라는 말이 적합했다.
잠시 후 칼이 천천히 노래를 읊기 시작했다.
"썸- 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 웨이- 업 하이..."
마티가 손을 타닥거리며 박자를 더했고 에바도 손으로 무릎을 토닥토닥 쳤다. 나의 손가락도 박자를 맞춰 움직이며 우린 다 같이 함께 몸으로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자전거를 빌렸던 그 집의 주인은 이 사우나를 함께 사용하는 회원 중의 한 명이었다. 마을에 사우나 회원을 만들어 열쇠를 나누어 갖고 자유롭게 사우나를 이용할 수 있다. 올 때마다 장작을 조금씩 패서 벽 한편에 쌓아두어 떨어지게 않게끔 유지하는 게 이들의 규칙이었다. 그래서 다음 사람이 왔을 때 편안히 사우나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런 심플한 방식을 보며 그들 간에 작고 진한 신뢰가 느껴졌다. 후에 난 스웨덴에 올 때마다 사우나를 즐겼고 더 이상 수영복을 입지 않게 되었다. 거리낄 거 없이 모두 자연의 일부이고 서로를 평가할 어떠한 요소도 없다. 온전한 나와 너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