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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ILLUSTRATOR Dec 27. 2022

노르웨이로 떠난 사연

두 번째 프로젝트

지난 프로젝트를 마치고 여행에서 돌아온 리니아와 나는 다음 프로젝트를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 우리의 영역인 ‘디자인’이었다. 그중에 둘 다 관심이 있었던, 혹은 몸 담갔던 분야인 ‘옷’ 쪽으로 풀어보기로 했다. 여기서 우리 서로가 취향이 달랐다면 함께 하기 어려웠을 거다. 하지만 내가 대학을 마칠 무렵 ‘패션’을 떠나려 했던 분명한 이유를 듣고 리니아는 매우 공감하며 자신도 비슷한 이유로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그 시절 그 생각을 가졌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다. 그냥 겁 없이 달려들었어야 하는데 난 그 시절에도 너무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대학 4학년 때, 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었다. “패션은 의심이 드는 순간, 그 세계를 떠나야 한다.”라고.

나에게 들었던 가장 큰 의심은 이게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것과 ‘내 가족도 함께 공유할 만한 것이냐’라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후자에 대한 회의감이 커져갔다. 학교에서 그렇게 멋진 척 다하고 마치 곧 유명 디자이너가 될 것 같은 꿈에 한창 부풀었다가 막상 집으로 돌아오면 그때의 내 모습은 어디 가고 창조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진짜’ 내 현실에선 난 그냥 가난한 집 둘째 딸에 불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무슨 걸림돌이가 된다고,,, 더 정직하게 말하면 그 시절 난 용기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패션은 스스로 최면을 걸지 않으면 오래 끌고 가기 힘든 분야라고 생각한다. 즉, 자신을 믿고 내 취향이 뛰어나므로 사람들도 나를 칭송할 것이다라는 자신감 없이는 도전적인 디자인을 창조해내기가 힘들다. 굳이 패션을 예로 들었지만 모든 예술 분야가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예술이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는 창조자들의 그런 끊임없는 자기 최면=노력이 공들여 나온 결과물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고, 그게 꼭 많은 사람을 타깃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입맛의 사람들이 있기에 나의 취향을 좋아해 주는 소수의 사람들과의 소통으로도 충분한 걸 나는 그때 깨닫지 못했다. 그 시절 나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부분은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내 가족들과 나의 작품을 가지고 함께 공감할 수 없다는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난 그때 패션을 ‘우리들만의 축제’로 여겼다. 그리고 왠지 잘난척하는 모습 같아서 싫었다. 그렇다. 난 쓸데없이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면 간단히 패션이 별로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 맞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사실 난 치장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화장도 고등학교 시절, 한창 놀 때나 해봤지 이후로는 잘하지 않았다. 옷도 청바지가 제일 편하고 가끔 멋을 부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이제 없어졌다. 요즘은 그런 열정이 다시 생겼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잠시 반짝할 무언가를 만들기보다는 오래 둘수록 멋이 더해지는 무언가를 만드는 게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이 많아질수록 결국엔 시작이 어려워진다. ‘반짝’이라도 한 결과물을 가지고 다음번에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을 지레 겁먹고 물러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리니아의 생각이 궁금했다. 나와 전반적으로 비슷한 결을 가진 그녀가 만들고자 하는 ‘옷’이란 어떤 콘셉트를 가지고 있을까. 이번에도 그녀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녀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핸드프린팅’이었다. 옷을 가장 창조적인 방법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방법. 정말 세련된, 정제된 디자인의 옷이 아니라 옷을 매개로 ‘예술’을 하겠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쉽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함께 고민했다. 사실 저번에 리니아가 서울에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이 프로젝트를 생각하고 있었고, 광장시장을 돌면서 소재를 찾고 있었다. 최대한 100% 자연소재로 만든 패브릭이어야 하고 디자인은 심플할수록 좋았다. 리니아는 옷의 형태를 재단하는 ’패턴‘을 전문적으로 배운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녀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인 것이, 복잡하고 너무 세부적인 라인보다는 가장 간단하고 사이즈도 넉넉해서 누구나 입을 수 있는 편한 옷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사실 우리 둘 다 전문가가 아니기에 만들 수 있는 디자인에 한계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모토는 ’ 애쓰지 말자 ‘였다. 특별한 누군가를 위한 옷이 아니라 누구나 사입을 수 있는 디자인에 우리의 그림이 그려진 독특한 옷을 만드는 작업을 즐기면서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제작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 한가지, ’ 제로웨이스트‘를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공정 과정에서 남는 원단을 버리지 않고 작은 아이템을 만들기로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날, 원단 가게에서 적당한 천을 사고 패브릭용 물감을 사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이 한 번의 실험을 통해 우리는 다음단계에 필요한 것을 계산해야 했다. 같이 작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난 이 한 번의 경험으로 한국에서 나머지 작업들을 준비해야 했다.


그럼 우린 이 옷을 만들어 결국 어느 시장에 내놓을 것인가. 바로 노르웨이 ‘크리스마스마켓’이었다. 그녀의 남자친구인 시몬은 노르웨이인이다. 둘이 함께 가정을 이루어 스웨덴에서 살고 있지만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그들은 노르웨이에서 시몬의 가족들을 만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러다가 리니아가 한 크리스마스마켓에서 물건을 팔기 시작했고 벌이가 너무 좋아서 이후로 죽 이어왔다고 했다. 그녀가 팔았던 아이템은 바로 주얼리였다. 이 또한 그녀의 사정이 있었는데, 20대에 만났던 남자친구와 우연히 인도에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서 주얼리를 사 왔고 이를 시작으로 스웨덴에서 판매를 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초반에 그렇게 물건을 떼오다가 몇 년 후에 회사를 만들어 인도의 한 공장을 사들여 자체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사업을 이어오다가 어느 날 직접 공장에 찾아갔고 그곳에서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목격했다. 그녀는 공장 관계자에게 그 아이들이 받는 수입과 불공정한 처우를 받고 있는 그들의 상황을 자세히 듣고 바로 사업을 접었다고 했다. 이후에 그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남은 주얼리들을 어쩌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시몬을 만난 후 노르웨이에서 우연히 팔기 시작했다는 사연이었다. 노르웨이는 사실 지리적 조건으로 매우 척박한 나라였는데, 오일을 발견 한 이래 최근 최고부자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많은 스웨덴 사람들이 노르웨이에 돈을 벌러 이주한 사례가 많다고 했다.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에 임금이 높은 반면 물가도 비싸고 특히 수공예 제품은 아무리 비싸더라도 사람들이 흔쾌히 지갑을 연다는 것이다. 이 또한 리니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것이다. 아마 관심도 없었겠지만... 하지만 난 이렇게 세상을 조금씩 알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고 나를 움직이게 하는 굉장한 연료가 됨을 많이 느낀다.


스웨덴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혼자 많이 바빴다. 알아본 결과, 원단의 가격이 스웨덴보다 한국이 훨씬 저렴했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판매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곳에서미리 프린팅을 해서 가져가야 스웨덴에서 함께 옷을 만들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옷을 아얘 만들어 갈까도 생각했지만, 내가 그 많은 원단에 언제 그림을 다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제작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후로 내가 할 일이 정말 많았다. 원단을 찾아다녔고, 패브릭 물감을 사서 원단에 그려보고 말린 후 세탁 후에 프린팅이 지속해서 남아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 큰 원단에 한 번 망치면 끝이기에 붓질을 한 번 할 때마다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직접 패턴사를 찾아다녔고, 그에게 샘플 제작을 맡겼다. 이 한 벌을 가지고 스웨덴에서 더 많은 시험을 해봐야겠지만 우리가 의도했던 대로 가장 간단한 디자인에 넉넉한 사이즈로 제작 기간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옷의 패턴을 자르고 남은 원단은 사각으로 잘라 마른 라벤더 잎을 넣어 작은 쿠션모양의 방향제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3개월 후, 원단을 가득 싣고 희망도 실어 나는 다시 스웨덴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2018년의 여름이 매우 뜨거웠다면 그 겨울은 내 생에 가장 추운 겨울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겨울에 북유럽, 그것도 노르웨이라니!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헸던가. 나의 무식함이 또 한 번 나를 모험으로 내몰았고, 그곳에서 난 정말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담았다. 그리고 끝까지 미련으로 남았던 ‘패션 디자이너’에 대한 아쉬움을 날려버린 궁극적 원인을  찾았고, 겸허하게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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