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픈 손가락
드디어 엄마가 제주도에 내려왔다.
제주도에 내려와 산 지 2년 만에 엄마가 내 집으로 왔다. 혼자라면 못 왔을 엄마, 육지로 간 김에 엄마를 데리고 같이 제주도로 왔다. 마침 엄마가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터라 가능했다. 사실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엄마든 언니든, 가족들에게 내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딸이 혼자 내려와 사는데 어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냐는 응석은 우리 집에서 통하지 않는다. 너무도 쿨한 가족. 좋게 말하면 독립심 크고 강해 보이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내실이 굳건하지 않음이 바로 탄로 난다. 아픈 상처를 내 비치면 위로를 받음으로써 치유를 한 게 아니라 얼렁뚱땅 덮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렇게 자라다 보니 마음을 굳이 표현하기보다는 되려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상처를 위로하는 데에 서툴러졌다. 그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은 하지만 따뜻한 위로의 말을 내뱉기가 부끄러워 어깨를 토닥이며 이겨낼 수 있을 거라며 응원의 말로 어색하게 대처한다. 한 때는 엄마가 변화하기를 바랐다. 엄마의 대응이 너무 서투르고 그냥 마음 편한 대로 또 넘어가려고 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하나하나 꼬집어, 상대방을 헤아리라고, 좀 더 성의 있게 대해주라고 말했다. 여전히 엄마는 변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나의 그 어리석은 말에 동요하지 않아서.
타이밍이 어쩌면 이런 지, 하필 엄마가 내려오는 시점에, 내내 백수이던 내가 취업을 하게 되었다. 동네의 한 박물관에 청소를 맡아할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에 지원했는데 이튿날 면접을 보게 되었고 나는 엄마를 혼자 둘 수 없어 같이 갔다. 면접관이 나를 보며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없다고 했다. 이 일을 처음 해 보는 사람에게 일일이 알려 줄 수 없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저희 엄마가 청소 전문가예요, 이 일을 10년 동안 하셨어요."라고 말하자, 그의 눈빛이 바뀌고 걸음을 앞서 가더니 멈춰서는 본격적으로 일의 전반적인 요구 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장황한 그의 설명이 끝나고 내일부터 일을 시작해도 좋다고 했다. 엄마 덕에 그 일을 얻게 된 거나 다름없다. 다음 날, 엄마는 나와 함께 출근해서 청소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화장실 청소부터 바닥 청소, 요령을 부리는 방법까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 모르겠다. 고생해서 대학까지 보내 놨더니 당신이 하던 청소일을 하게된딸에게 엄마는 동지애를 조금이나마 느꼈을까 아니면 한심하게 생각했을까. 내가 일하는 시간에 엄마는 집 근처를 돌아다니며 고사리를 땄다. 길도 모르고 겁도 많아 멀리 가지도 못할 텐데 뭐라도 할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이 끝나면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을 모두 갔다. 힘들었지만 엄마가 제주도에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낼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나의 일상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동네에 꽤 유명한 카페가 있는데 가격이 워낙 비싸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이다. 이 날은 꼭 엄마를 데려가고 싶었다. 바다가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아 여행객의 마음을 누려보았다. 이렇게 엄마와 단둘이 오래 있어본 적은 처음이다. 친근하게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친구에게 하듯 대화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는데 얼마 전 집에 왔던 아들 얘기로 시작해서 지난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게 되었다. 나의 결혼 생활 얘기. 나한테 하지 않았던 시어머니와 통화로 했던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엄마 있잖아,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는 다 비슷한 애들끼리 모이잖아, 그래서 몰랐는데 대학에 갔더니 정말 여기저기서 모이다 보니 차이가 많이 나더라. 그래도 그때는 괜찮았어. 왜냐면 내가 잘하는 게 있으니까 다른 부족한 게 내 능력으로 충분히 커버가 됐거든? 근데 결혼하니까 그게 안되더라고. 거기선 내 능력은 필요도 없고 그냥 내 배경만 따지니, 내가 그걸 당해낼 수가 있어야 말이지. 안 그런 척 하지만 대놓고 우리 집 무시하는데 내가 뭘로 받아칠 수 있었겠어. 그렇게 상처받고 집에 왔을 때 내가 투정 부리면 아빠는 시어머니 아픈데 그래도 네가 잘해라 하고, 엄마랑 언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동안 그런 걸 왜 말 안 했어!" "그걸 어떻게 대놓고 말해! 엄마 아빠한테!" 우리 집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그 말들을 어떻게 부모님 가슴 찢어지라고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냥 내 방법대로 어릴 때부터 해오던 것처럼 짜증 내면서 시어머니가 이랬다 저랬다 불만을 얘기했었다. 막상 정말 나의 마음을 찢게 한 부모님을 폄하했던 시어머니의 차가운 말들은 가슴에 꼭 묻어버리고 다른 말만 했다. 그때마다 그래도 내 편을 들어주는 건 내 가족뿐이구나 라는 위로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공허한 마음으로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갔었다. 엄마는 내 말을 듣고 차마 말을 못 떼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마음을 쓸어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다 지나갔잖아 뭘..." 하고 말했지만 지금이라도 말하게 되어서 내심 속이 시원했다. 오랫동안 그 전쟁터에서 자존심을 꺽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했던 내가 떠올랐다. 엄마는 세 딸 중에 그래도 나에게 기대가 제일 컸다고 말했다. 그나마 내가 욕심도 있었고 욕심을 부린 만큼 성취하려는 마음도 있었기에. 엄마의 기대는 나의 임신 소식과 함께 무너졌고 딸은 엄마 팔자 따라간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내가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든 뭐든, 나에게는 엄마가 아픈 손가락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순수하고 어리석은 사람. 안타깝고 또 안타깝고 제일 지켜주고 싶은 사람. 자신이 아는 경계 안에서만 그 일상을 사는 사람, 나와 많이 다른 사람, 너무 달라서 멀게 느껴지는 사람. 내가 임신해서 홈플러스에 엄마를 보러 갔을 때, 엄마는 화장실 안 청소용품 칸에 들어가 커피 한 잔과 옆 매장에서 얻었다며 크레페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날 혼자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이 또한 엄마를 불쌍하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엄마가 오니 밥상이 달라졌다. 국에 마른반찬에 고기까지 올라왔다. 여기 와서 얼마 만에 집에서 고기를 먹는 거냐 묻는 말에 "음.. 완전 처음인데!"라는 나의 대답에 순간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봤다. 그 모습에 나 역시 눈물이 나올까 봐 눈을 피했다. 다음날 우린 같이 바닷가에서 소라를 따고 바지가 다 젖은 채로 먼 길을 걸었다. 시골에서 자란 엄마는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풀마다 이름을 알았다. 똑같은 초록 풀로 보였던 것들은 메밀꽃, 고사리, 감자, 무였다. 밤에 잠옷 바람으로 나와 앞집 할머니 댁에 열린 금귤도 몰래 땄다. (다음날 할머니께 이실직고했더니 괜찮다고 더 따가라고 하셨다.) 혼자 걷던 오르막을 함께 걸으며 세찬 제주도 바람에 불평했다. 엄마가 떠나는 날, 일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 버스 정류장에 와있으라고 일렀다. 공항에 도착해 예매한 표를 출력하면서 엄마에게 직접 해보라며 하나씩 알려주었다. 모르는 걸 피하려는 거 알기에 더 하라고 잔소리했다. 어려울 거라 괜히 겁먹지 말고 해 보면 별거 아니니 하나씩 다 해보라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엄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엄마, 이거 지나면 가방 검사하는 거야, 그리고 탑승구 번호 찾아서 가면 돼." 지금 보니 엄마가 더 애 같다. 다음에도 난 똑같이 엄마를 데리러, 배웅하러 공항까지 나올 거다. 혼자 알아서 하기를 바라기 싫고 엄마 마음이 불안하지 않게, 그리고 조금은 엄마가 즐길 수 있을 정도만 내가 옆에서 해주고 싶다. 내가 보려는 세상을 엄마가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같이 관심을 가지고 봐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