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나
지금 지내고 있는 아파트 옆집에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두 번째로 그녀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 물었고 며칠 안에 나의 작업물을 그녀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이곳에 친구가 없어 힘들겠다며 나를 자주 데리고 다니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어제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본인의 친구 하나가 이번에 개장하는 뮤지엄에 디렉터를 맡게 되어 저녁 오프닝에 자신을 초대했고 그곳에 나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처음엔 가지 않으려고 했다가(눈이 내렸다)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최대한 있는 옷 중에 괜찮은 걸 골라 입었다. 집에 빗 하나도 없어서 결국 옆집에 사는 그녀에게 빗까지 빌려 머리를 정돈하고 준비를 마친 뒤 그녀의 집으로 갔다. 함께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 그 뮤지엄에 도착했다. 800년 전에 지어졌다는 성을 최근 6년이 걸려 재정비를 하고 오늘 처음 개장하는, 꽤 큰 행사라 아마 다음 날 신문에 기사가 날 거라고 그녀가 말했다.
아, 그녀의 이름은 마리나, 79세의 나이지만 매주 토요일마다 길거리에 데모를 하러 나가는, 행동력 있는 여성이다. 나를 데리고 다니겠다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은 이곳에서 처음이다.
궁전이라고 해야 되나, 뮤지엄이라고 해야 되나?
입구를 지나 조금 걸어가니 성 앞에 넓은 정원과 그 뒤로 비엔나의 오래되고 새로 지어진 색색의 여러 건물들의 전경이 펼쳐졌다.
맨날 좁은 빌딩 속에 있다가 탁 트인 공간에 오니 짜릿했다. 그리고 궁전도 정말 말 그래도 아름다웠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유럽의 건물들은 내 눈에 보기에 좋다.
이국적인 그 맛이 항상 그림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맡기고 마리나의 친구라는 디렉터를 만났다. 잠시 얘기를 나눴는데 지난주 내내 서울에 있다가 이틀 전 오스트리아로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본인이 이곳에서 맡은 책임은 마케팅이고 한국에 한 패션디자이너가 이번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모티브로 컬렉션을 할 거라 자신을 초대했다고 했다. 그는 휴대폰으로 지난 서울 위크에 있었던 이상봉 FW 컬렉션 쇼를 보여주었다.
한국은 그들에게 좋은 고객이라고 했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으며 계속해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한국인으로서 듣기에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대화를 하는 동안 마리나는 나를 바라보며 매우 뿌듯해했고 어서 나를 그 디렉터에게 소개하기를 원했다. 내가 망설이자 그녀가 적극적으로 나 또한 아티스트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며 꼭 이메일로 그에게 나의 그림을 보내라고 그가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차마 알겠다고 대답을 못하는 나를 보며 마리나는 그에게 독일어로 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로 알아들었다.
자존감이 낮은 상태라 자신을 제대로 볼 줄 모르니 그녀를 이해하라고.
나의 이런 상태는 저번에 내 남자친구를 통해 충분히 들었고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고 나서도 난 그녀의 반응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구나 누군가의 그림을 보면 칭찬을 하는 게 예의이고, 설령 그녀가 내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뭔들 소용이 있으랴. 사실 어떤 기회가 생길 거라는 기대를 크게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디렉터에게 내 그림을 선뜻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다른이 도 아니고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등 (내가 아는 이름은 이 둘밖에 없다) 거장들의 작품 전시를 기획한 자에게 나의 그림을 보여주라니, 솔직히 창피하다.
오프닝으로 긴 연설을 마치고 로비에 내려와 공짜 샴페인을 마시며 마리나와 낄낄대며 웃었다. 이런 작은 행복을 누리는 걸 공감하는 마리나가 있어 고마웠다. 샴페인을 마시다가 마리나는 자리를 떠나며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후 나에게 선물이라며 책을 사 왔다. 이 뮤지엄에 관한 한국어 소개책자를 건넸다. 이전에도 그녀는 나를 데리고 여러 전시회를 돌면서 매번 한국어 설명지가 있냐고 묻고 다녔었다. 다행히 이곳에 한국어 가이드가 있었고 이걸 주는 그녀의 눈빛도 행복해 보였다. 참 고마웠다
잠시 후 디렉터가 우리를 데리고 전시장으로 올라갔다. 내 생에 처음으로 거장들의 실제 작품을 보는 순간이었다. 전시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그녀는 대뜸 그 시절 건축 스타일과 그 배경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난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눈에 호강이었다. 시간이 늦어 이번 금요일에 와서 다시 둘러보기로 하고 우린 밤 9시가 넘어서 그곳을 떠났다.
로비에서 부케를 훔쳐와 내게 건네는 마리나는 오늘 너무 즐거웠다고 고맙다고 했다.
너무도 평범하고 교육을 받지도 않았다는 그녀가 어떻게 이 디렉터와 친구가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자기도 모르겠단다. 마리나에게 이 오프닝에 대한 연락을 받고 남자친구는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다른 핑계를 대서 미안하다고 거절했다. 이미 거절한 상황에서 나도 그의 의견을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니 그가 없이 나만의 생활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내가 져버리는 것 같아 그 자리가 불편하더라도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 혼자 가겠다고 했다. 그 차림으로 가면 창피할 거라며 내 조거팬츠를 가리키며 웃는 그에게 적어도 재킷 하나는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가방 깊이 처박아둔 립스틱을 바르고 마리나에게 빗을 빌려 머리를 만졌다.
지난 동행에서 그녀와 카페에서 잠시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내게 경제적인 부분을 어떻게 충당하고 있냐고 물었고 난 씁쓸한 표정으로 내게 가장 큰 고민거리이며 빨리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스스로가 경제적 책임을 갖고 있는 건 “자유”라고 표현했다. 그 말에 백 프로 공감하며 나는 크게 웃었다. 그날 내가 사기로 한 커피 값을 그녀가 내겠다고 하는 그녀가 귀여웠다. 그리고 꼭 내가 돈을 벌 수 있도록 최대한 돕고 싶다고 했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너, 본인 자신을 위해서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