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다른 사람
대학로 민들레영토,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나는 먼저 도착해서 그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들이 있고 코너에 피아노 한 대가 있었다. 조용히 피아노 건반을 눌러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다. 어디에 앉을까... 가운데에 큰 나무 테이블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의자를 꺼내 앉았다. 겨울이었고 난 좋아하던 초록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분이 언제 오실지 몰라 먼저 음료를 시켰다. 커피를 시킬까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구르트를 주문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어떻게 생겼을까 혼자 상상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윽고 남자 친구가 어머니를 모시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했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상상했던 것보다 차가운 인상이었다 꼭 웃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반응에 나의 심장은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고 내 옆자리에 앉는 남자 친구를 보는 그분의 얼굴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나는 멋쩍게 요구르트가 담긴 긴 컵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무거운 정적을 먼저 깬 건 어머니였다. "그래, 내가 너희 때문에 살이 2킬로나 빠졌다. 대체 어쩌려고. 참"이건 분명 긍정적인 뉘앙스가 아니다. 모든 대화의 내용이 내 예상과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착각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마지막에 했던 그 말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존중한다. 그러니까 너희 엄마한테도 어서 이 사실을 알리고 다음에 너의 엄마의 생각도 들어봐야지 않겠니? 그 후에 더 얘기하든지 하자." 그리고 일이 있으시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배웅 나가는 아들의 얼굴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나는 임신한 사실을 안 이후 처음으로 낙태를 생각했다. 충동적인 선택이 맞다. 그 자리를 나와 나는 어서 병원으로 가자고 남자 친구를 부추겼다. 남자 친구는 나를 말릴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성신여대 근처에 있는 산부인과에 도착했다. 남자 친구의 손을 뿌리치고 안내대로 갔다. 하필이면 그 당시 정부의 지침이 까다로워져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주는 병원이 거의 없었다. 그 병원 역시 그랬고, 주변에 다른 병원을 찾아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사실은 수술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옆의 남자 친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이 모든 게 내가 결정할 사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다. 전화를 걸어 임신한 사실을 얘기하고 어머니를 만나 나눈 내용도 다 얘기했다. 엄마는 있다가 다시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었지만 곧바로 다시 전화가 왔다. "일단 병원에서 나오고 눈 많이 오니까 바람 쐬지 말고 택시 타고 지금 집으로 와." 병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가 남자 친구와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울구불며 결국 난 아기를 지우기로 결정했고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다.
임신 6개월이 되었을 무렵, 배가 제법 불렀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고 나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고무신 같은 신발을 신고 나갔다. 점심때쯤 식당에서 만나 우리는 불고기를 먹었다. 원래 고기를 안 좋아하는데 임신하고 식성이 바뀌었다. 그날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았고 그날 볼 수없던 미소도 보여주셨다. 그리고 며칠 전 꿈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나와 별거 아닌 일로 왜 그렇게 신경을 세우냐며 다 괜찮다고 말씀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나에게 전화하셨다고. 그해 겨울 나는 아이를 낳았고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있던 남자 친구와 나는 어머님 댁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으셨다. 그리고 다음 달에 아주버님의 결혼식이 이어졌다. 갑자기 나의 삶은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해가고 있었다. 나의 몸이나 정신 상태를 돌아볼 겨를 없이 하루하루를 마치 마쳐야 하는 숙제로 해치워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7남매 중에 여섯째, 여자 형제 중에는 가장 막내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녀는 평탄한 삶을 살았다. 장정한 두 아들, 취향에 맞게 살림을 꾸리고 가끔 취미생활도 하는 삶. 갑작스러운 남편의 부고로 홀로 되었지만 두 아들과 다시 안정을 되찾고 남은 인생을 즐기며 살고자 했는데 갑작스러운 둘째 아들의 결혼과 건강에 위기가 닥치면서 그녀의 삶은 녹록지 않게 변했다. 그 와중에 생판 모르는 여자애가 며느리로 들어왔고 갑자기 손주도 얻게 되었다. 그녀 또한 그 큰 변화를 감내하며 보내고 있었으리라. 나와 시어머니, 우리는 서로에게 갑자기 맞게 된 새로운 얼굴의 가족이었다. 자라온 가정환경도, 감수성도 관심사도 전혀 모르지만, 같이 한솥밥을 먹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대하며 지냈다. 하지만 하필이면 서로 예민한 시기에 별일을 별일 아닌 듯 대하는 건 가끔 보는 관계에서나 가능하지 매일 봐야 하는 상황에서 조심해야 할 선을 결국에는 넘고서야 만다. 아무래도 그 표현은 나보다는 어머니 쪽에서 자주 드러났고 어찌 보면 약자인 내가 그걸 감당해야 했지만 결국에는 나도 무너졌다. 엄마와 시어머니는 다르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안쓰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병을 앓고 계셨지만, 오히려 그걸 병기로 삼아 나를 고생시키려는 마음씨 고약한 여자로 가끔 보였다. 내가 이상한 건지 가끔 나에 대한 그녀의 질투가 느껴졌고 남편 앞에서는 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내게는 내보였다. 점점 나만 아는 그녀의 심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나에게 참 힘든 부분이었다. 분명 그녀는 환자이고 내가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의 의도와 욕심, 나에 대한 불만, 다른 가족에게 말하는 나의 불리한 점들. 아픈 시어머니를 미워하는 그 마음에 죄책감이 느껴졌고 이에 마음을 넓게 쓰려고 애썼지만 내 그릇이 그걸 다 담아낼 수 없는 크기였나 보다. 다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불만과 불평을 쌓아갔다. 얼굴을 대고 다 하지 못하는 말을 가슴속 깊이 묻었고 밥이 잘 넘어가지도 않아 점점 양이 줄었다. 아프신 어머님 덕에 집안에는 항상 한 명 이상의 다른 가족이 와 있었지만, 그중에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매일 밤 아이를 끌어안고 남편 몰래 훌쩍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다. 아이 산책시키러 간다는 핑계로 사실은 숨을 쉬려고 동네 카페를 매일 한 번씩 갔다. 그 한 시간이 내게 주어진 자유였다.
일 년을 버티다가 분가했지만, 어머님의 간섭은 끊이지 않았다. 그 덕에 남편과 나의 사이는 진작에 멀어졌다. 어느 날 정신과에 상담받으러 간 적이 있다. 그날 상담사 앞에서 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본인을 너무 보호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니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아프다고 해도 그분은 본인보다 어른이고 주위에 그분을 돌보는 다른 가족들도 많이 있고요. 하지만 본인에게는 지금 아무도 없는 것 같네요. 이런 상황에서 모유 수유를 하는 건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당분간 수유를 멈추고 약을 먹으면서 치료를 받는 게 좋겠어요." 그 이후 나는 나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내가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더 힘이 날 거 같아 아이를 위한 마음으로 엄마로서 강해져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다른 가족들이 보기에 쟤가 요새 뭔가 마음이 비뚤어진 것 같다고 느낄 만큼 나는 변해갔다. 무조건 수긍이 아니라 뭉그적거렸고 칼같이 거절하지 못해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비쳤다. 그리고 한 사건이 터진 이후로 난 시댁에 발을 끊었다. 실수로 그녀는 다른 가족 앞에서 나를 경멸하는 말을 내뱉었고 모두 당황한 상황에서 나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민망했다. 그날 우리는 광화문의 한 호텔 라운지에 있었고, 근처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갔던 나는 그곳에서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실내 수영장에서 웃고 떠들며 물놀이는 하는 그들과 내 아들을 지켜보다가 뒤를 돌아 통유리 아래로 보이는 한 노인을 보았다. 호텔 건물 옆 허름한 식당 앞, 파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굽은 허리로 천천히 끌고 가는 노인. 식당 지붕의 파란 기와 중간에 연통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대로 나는 호텔을 나와 거리를 무작정 걸으며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다 일러바쳤다. 옆에 있던 아빠가 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걔가 뭐 갈 데가 없어? 당장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해"라며 성을 냈고 엄마는 나의 말을 다 듣고 한마디 했다. "그만큼 했으면 다 했다. 이혼하고 싶으면 해."
이혼하고 제주도에 내려와 지낸 지 3개월이 지났고 남편과 나는 서류상으로 완전히 남이 되었다. 어느 날 새벽,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집 밖으로 뛰어나가며 점장님에게 연락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2년 만에 시댁 식구들을 보았다. 나는 며느리도 아니고 남도 아니었다. 상주 자리에도, 손님 속에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가족 중에 그나마 나를 조금 이해해 주시던 사촌 아주버님이 나를 부르셨다. 옆자리에 앉아 명 부록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오빠와 이혼했다고, 제주도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다 정리한 지 꼭 삼일 만이었다. 이혼한 사실을 아는 건 친 아주버님과 형님뿐이었다. "둘이 잘 안 맞는 것 같더라니 결국엔 그렇게 됐구나. 이혼하려면 일찍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리고 가끔 낚시하러 제주도에 간다, 취미로 낚시를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물으셨다. "우리 이모가 아주 힘들게 했어?" 나는 바로 대답이 안 나왔다. "음... 제 생각에 우리 셋 다 모두에게 타이밍이 안 맞았던 거 같아요." 어머니와 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닌 사이로 만났더라면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리고 며느리에게 자기 아들의 편을 드시는 어머니, 그분의 그 마음이 종종 나를 외롭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