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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를수록
해결해야 할 일이 늘어날 뿐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주방 정리를 시작으로 작은 가구 배치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역시 한꺼번에 아침부터 밤늦도록 힘을 빼던 시절에 비하면 힘에 부치지 않아 좋다. 코로나 시국이 길어지면서 가뜩이나 찾아오는 이 별로 없는 집에 딸들의 발길까지 뜸해졌으니 정리하다 중단해도 큰 문제는 없다. 얼마 동안 남편과 나 식사하고 잠자리에 불편 없으면 될 일이다.


남편이 그림 걸 자리를 골라 못 하나를 박았다. 못을 치기 전에 벽에서 떨어질 가루를 한 곳으로 모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지 가루가 주변 물건들 위에 흩어져 떨어졌다. 못을 치는 도중에야 알아챈 남편이 일을 멈추고 못 박던 자리 아래 비닐을 두르고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못마땅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눈감아주었다. 닦아서 정리해 둔 물건들을 하나하나 내리고 다시 닦고 정리할 나의 몫이 하나 추가되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남편이 알아서 척척 해주니 고마우면서도 나를 조금만 더 배려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봄비 치고는 꽤 많은 양의 비가 종일 내렸다.


깨진 술병을 대신하여 다시 술이 도착했다. 엊그제 왔던 그 택배회사 직원이다. 비가 많이 오는데도 박스는 젖지 않았다. 술 한 병 보내는데 지나치게 포장에 열을 쏟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박스가 크다. 박스를 열었다. 맨 위에 놓인 자사 홍보용 장바구니를 들어내자 내용물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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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질 위험성이 있는 작은 물건들을 보내기에 딱 알맞은 내부 모습이다. 유리병이나 도자기병이 옆의 물건과 부딪히지 않도록 칸칸이 분리되어 있다. 진작에 이런 포장 박스를 마련해 두고 상품 광고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일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과외의 상품들을 보고는 미안해졌다. 깨져서 온 술 한 병으로 이런 결과를 바랐던 건 아니기 때문이다. 술 좋아하는 남편에게는 반가울 일일 수도 있지만 남편이 술을 조금 더 줄이기를 바라는 내게는 달갑지 않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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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일 중에는 서두른다고 해서 서두른 것만큼 빨리 바람직한 결과를 보기 힘든 것들이 더 많다. 남편은 못을 척척 박아주긴 했지만 못 박을 때 벽에서 떨어지는 가루를 예견하지 못해 내게 처음 정리할 때보다 더 많은 일감을 안겨 주었다. 술 판매점에서는 새로운 상품 전략을 짜면서 함께 준비했어야 할 술 세트 박스를 소홀히 한 결과 병 파손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를 책임져야 했고 택배비도 이중으로 부담했다. 고객에게는 싫은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한 이틀 사이에 서둘러서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그 결과 수고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을 연이어 경험했다. 돌아보면 이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물며 베란다 화초 정리를 할 때조차 처음부터 계획하고 시작한 경우와 일단 시작한 후 경험하게 되는 경우는 과정이 다르다.





오늘은 비가 더 많이 내린다.


"마늘종 뽑아줘야 하지 않나?"

마늘종 뽑으러 가야잖겠느냐는 남편이 어이없어 보이는 아침이다.

'이 빗속에?' 하려다 꿀꺽 삼켰다.

"지난 5일에 보니 우리 마늘엔 마늘종이 생기지도 않았던데?"


텃밭에 가자는 말을 예전에 비하면 자제하고 지낸다. 남편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고 텃밭에 한 번 다녀온 후엔 많이 피곤해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늘종 볶음을 먹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심은 마늘이 마늘종을 올리니 우리 마늘도 마늘종을 올리지 않았을까, 올렸다면 뽑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보양이다.

"풍신 난 우리 텃밭,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지냅시다."

"그럴까?"


잠시 후, 남편이 줄자를 들고 와 내 책상 사이즈를 잰다. 어제 그림 걸 자리에 못질할 때 떨어진 가루를 말없이 닦아 다시 정리하는 나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서두르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무턱대고 손을 대는 경우보다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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