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오늘은 오래된 4단짜리 철제 수납장을 정리하는 날이다.
맨 위엔 올망졸망 다육이 화분을 올리고 아래쪽으로는 효소와 라면 등 자질구레한 것들을 정리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네 다리로 떡 버티고 서면 흔들림이 없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럼에도 정리를 하다 보니 오래됨 그 자체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변함없지만 묵은내가 날 것 같은 세월이 앉은 철의 색감 때문이다. 군데군데 안개 색으로 얼룩진 모습에서 세월의 찌든 모습이 보인다. 새것을 들일까 싶어 얼마 전 마트에 갔을 때 비슷한 물건을 살펴보았으나 접기로 했다. 내가 이 수납장을 구입할 때 때의 서너 배는 될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닦고 색을 칠해서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있소 매장에 들렀다. 5천 원짜리 한 통이면 얼추 칠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색 한 가지밖에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음이 아쉽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수성이라 쓰여 있는 이 페인트가 철제에 사용 가능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서 뭘 주워들은 기억이 있는 듯도 하고 학교 때 시험에 나왔을 때는 맞았지만 시험지 제출하면서 잊어버린 아리송한 문제 같기도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려는데 40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옆에 와 물건을 살폈다. 순간 이 사람에게 물어봐도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 말씀 좀 여쭐게요. 철제 수납장에 수성페인트로 칠해도 될까요?"
"수성은 철제용은 아닌 것 같은데요. 철제에 칠하는 페인트가 따로 있을 거예요."
"아, 네. 고맙습니다."
묻고 나서 페인트 용기를 다시 살펴보니 제법 큰 글씨로 벽지 등에 칠한다고 적혀 있다. 용기를 두루두루 살필 생각을 못 하고 깨알 같은 주의사항 등만 눈알 튀어나오도록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일과를 보고하는 저녁, 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이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내가 내일 잘 닦아줄게요."
"저걸 어떻게 닦아요?"
"하여튼 내가 닦아준다니까요."
왠지 내일이 약간은 걱정스럽다. 하지만 함께 한 공간에서 한 가지 일을 할 때 지키기로 한 약속을 잊지 않으면 된다. 다있소 매장에서 다른 남자의 말도 감사히 받아들였으면서 나를 위해서라면 세상 어느 남자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지극정성인 남편이 하는 일을 감사히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니 젊어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들이 꽤 있었지만 그 시기를 지나와 돌아보니 알겠다 함이 옳겠다. 참견하지 말고 지켜보면 될 일이다. 어긋나면 자신이 알아서 수정할 테니 말이다.
오늘은 부부의 날이다. 오래되어 묵은 내가 날 것 같아 보이는 부부일지라도 바로 그것이 부부의 향기다. 사실 일 년 삼백육십오일이 어린이날이요 어버이날이라야 맞는 것처럼 부부의 날도 삼백육십오일 내내 지속되어야 맞다는 생각이다.
부부.
어느 길을 어떻게 돌아왔기에 그때 그 길에서 눈이 딱 맞아 함께 살게 되었는지 아주 작은 일로도 마음 상하여 금세 다른 길로 들어설 것처럼 격렬하게 다투기도 한다. 하지만 한걸음 물러나서 생각하면 상대의 마음도 헤아릴 수밖에 없는 삼백육십오일을 몇십 년 디디며 걷다 보니 지금 여기에 이른 것이다.
부부란 어느 시점부터 서로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유명한 학자의 이론을 빌지 않더라도 살아보니 절로 깨닫게 되는 삶의 진리다. 인간이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공통점 외엔 닮은 데라곤 티끌만큼도 없어 보이던 남녀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철제 수납장처럼 네 다리로 떡 버티고 흔들림 없이 서 있다면 잘 걸어온 것이다.
박수를 받아도 괜찮을 삶을 살아온 것이다. 둘이 하나 된 듯 세 발이 아닌 둘이 둘로서 네 발을 굳건하게 잘 디디고 같은 공간 같은 세대를 잘 아우르며 살아온 것이다, 누가 뭐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