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사리 빚기
와아, 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아쉬우니 이용할 정도 또한 아니다. 제가 자랄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랐구나 생각한다. 기특하고 고맙다. 메주콩으로 키운 콩나물 이야기다.
작년 가을 이웃에서 나눠준 귀리 한 봉지가 그대로 있다. 귀리를 볶아 귀리 차를 마시면 구수하다는데 사실 먹을 차들이 너무 많다. 해가 지나 버리는 차들이 아제는 아깝지도 않을 정도다. 귀리 싹을 키워볼 생각으로 새싹 재배기를 구입했다. 집에 오는 도중 생각이 바뀌어 새싹 재배기에 콩나물을 키우기로 했다. 귀리 싹은 먹어본 적이 없어 낯설기도 하지만 콩나물은 용도가 다양해 잘 자라주기만 하면 즐겨 식탁에 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콩나물 콩이 없어 요즘 주말이면 냉면에 빠져 줄어들지 않는 메주콩을 콩나물콩 대신 사용하기로 했다. 내 주먹으로 세 줌의 메주콩을 씻고 두어 시간 불려 용기에 담은 다음 흰 천을 덮었다. 그 위에 물을 한 번 더 뿌려 천을 촉촉하게 해 두었다. 용기에 비해 콩의 양이 과하다는 느낌은 들었다.
콩나물은 예전에도 자주 키워 먹던 식품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콩나물시루나 콩나물 재배기 등 특별한 용기가 없어도 얼마든지 수월하게 키워 먹을 수 좋은 먹거리가 콩나물이다. 일단 좋은 콩나물콩이 있으면 오케이다. 다음에는 물 빠짐 좋은 그릇을 준비하고 그 아래 물받침을 받쳐두면 된다. 물받침이 있는 채소 담기용 용기가 최적이다. 맘에 드는 용기가 없다면 버려질 운명의 깔끔한 플라스틱 용기를 이용하면 된다. 송곳으로 용기 바닥에 구멍을 촘촘히 뚫어 물이 잘 빠지도록 만들고 비슷한 크기의 용기를 물받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큰 두부 팩도 콩나물 키우기에는 썩 괜찮게 활용할 수 있는 용기다.
우선 물받침 용기 위에 구멍 뚫은 용기를 포개어 놓는다. 그 위에 물에 불린 콩나물콩을 넣은 다음 콩나물이 쑥쑥 자란 후에도 넉넉하게 덮을 수 있는 천을 깔고 불린 콩나물콩을 올린 다음 천으로 덮는다. 천 위에 물을 한 번 뿌려둔다. 이렇게 해 두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콩을 덮은 천 위에서 물 샤워를 한 번씩 시켜주면 콩은 이내 뿌리를 내기 시작한다.
다있소 매장은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말만 하면 짠 하고 나오는 요술 매장이다. 천 원 가격표를 보고 새싹 재배기를 집어 들기는 했지만 사실 살까 말까 두어 번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물 빠짐 구멍이 아주 작고 촘촘하다. 새싹 재배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내가 얼마든지 만들어 쓸 수 있는 물건이다. 천 원. 벌기 위해서는 땅을 파도 나오지 않을 액수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만든 것보다 깔끔하다는 데 마음이 움직였다. 게다가 이 흰색의 그릇에서 초록초록한 새싹들이 올라오며 자라는 모습은 보는 순간마다 내 마음을 들뜨게 할 것이 틀림없었다.
때로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초록을 좋아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는 때가 있다. 초등학교 때는 초록 옷을 즐겨 입었었다. 초록 스웨터, 초록 바지, 초록 장갑 등등. 결혼 후 첫아이 출산 후 회사 생활을 다시 시작했을 땐 결혼 전에 비해 색에 대해 많이 대담해졌다. 상하의는 물론 스타킹과 구두까지 초록이나 연둣빛으로 휘감기도 했다. 나이 든 지금도 옷을 고를 때면 초록물이 들어간 옷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간다. 그러나 초록은 바라볼 때는 고와도 몸에 걸치기에는 자연스럽지 않을 때가 많은 색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내게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상관없이 초록이 좋다.
초록 새싹을 그리며 산 새싹 재배기에 불린 메주콩을 넣고 노랑머리의 콩나물을 꿈꿨다. 내게 익숙한 콩나물은 하나같이 머리가 노란색들이었기 때문이다.
콩이 에러였을까. 뿌리가 나오고 하루쯤 지났을 때 덮었던 천을 펼쳤다. 초록색을 띤 콩나물 머리들이 눈에 띄었다. 이상하다. 천을 덮어 두면 콩나물의 광합성을 방지하여 노란 콩나물이 되는 걸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늘 노란 콩나물을 키워왔는데 뭐가 잘못됐지? 하지만 콩나물에 대해서는 감자처럼 녹색으로 변하면 솔라닌이라는 독 성분이 생겨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콩잎도 먹는 걸 보면 초록색 콩나물이라고 못 먹을 것도 없겠다 싶었다.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콩나물을 노랗게 키우는 건 광합성을 적게 하여 연하게 키움으로써 식감이 좋게 하기 위함이며 초록 콩나물이라고 먹을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정보가 있었다. 오히려 초록 콩나물에 영양분이 더 많아 초록 콩나물을 선호하는 이들까지 있다고 한다. 뒷걸음질 치다 보물 건진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우연히 만난 초록 콩나물 덕분에 유익한 지식을 또 하나 얻었다.
용기 아래쪽 구멍이 작아 천을 깔지 않고 위쪽에만 덮었더니 구멍마다 콩나물 뿌리들이 길게 자라고 있다. 잔뿌리가 내리면 콩나물은 질겨진다. 잔뿌리 나기 전에 콩나물을 수확하기로 했다. 용기의 크기에 비해 콩의 양이 많다 싶었던 생각이 들어맞았다. 줄기가 곧게 자라지 못하고 구부정한 콩들이 2/3는 된다. 콩 몇 개는 아예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들도 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막간을 이용해서 잘 자란 콩나물들만 뽑아 씻었다. 물기가 빠진 다음 비닐봉지에 넣어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다음엔 용기 바닥에 천을 깔고 시작해야겠다. 용기 구멍이 작다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작은 그릇에 담긴 콩이라고 해서 살아있기 위한 몸부림이 없을 리 없다. 뿌리내릴 구멍을 찾은 콩들은 콩나물 모양으로 길게 잘 자랐으나 구멍을 찾지 못한 콩들은 곱슬 콩나물로 자라기도 했다. 구멍으로 뿌리를 내린 콩나물들로 인해 구멍을 찾지 못한 콩들은 크든 작든 피해를 보았을 수도 있다.
메주콩 콩나물도 먹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콩나물은 콩나물콩으로 키우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콩나물 머리가 콩나물콩 콩나물에 비해 세 배는 더 커 보인다. 초록 콩나물이 노란 콩나물에 비해 영양가가 낫다는 정보에도 불구하고 콩나물은 노란 콩나물이 맞다. 콩나물콩으로 콩나물을 키우던 때는 한 번도 콩나물 머리가 초록색으로 변했던 적도 없었다. 낮 동안엔 주방 등을 켤 일도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메주콩이 콩나물콩에 비해 두 배는 커서 빛을 더 받아들인 것일까? 아니면 얼마 전 교체한 주방 등이 전에 비해 밝기가 세져서일까.
일단은 수확한 메주콩 콩나물을 먹어본 후 결정해도 늦지는 않다. 시간이 더 흐른 어느 날 나는 더 진한 초록색 콩나물을 키워 먹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