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며칠 잠을 설쳤다.
일찍 해가 뜨는 여름철이면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이번에는 가족들의 코로나19 백신 접종과 관련한 걱정이 극에 달한 데서 비롯된 면도 없지 않다. 현재까지 남편은 안정기에 있고 사위와 안사돈도 더는 이상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소식에 안도하며 감사한다. 잠도 열심히 자고 여름철 건강 챙기기에도 신경을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우체국 택배 노조 파업으로 둘째에게 보내려던 물건을 직접 갖고 가기로 했다.
둘째는 결혼과 함께 세종에 근무하게 되었다. 신혼인 둘째는 직장 근처에 오피스텔을 구해 근무하면서 시댁과 친정을 다녀갔다. 물론 신랑이 세종에 오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주말 부부로 지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내 신혼시절을 돌아보면 남편과 떨어져 지낸다는 건 꿈에도 가능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둘째 내외가 참 대단한 젊은이로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둘째가 세종에 자리 잡은 첫 해 지금까지 내가 한 번 다녀온 게 전부다. 남편도 나도 평일엔 혼자 지낼 둘째를 자주 보러 갈 생각이었지만 바로 코로나19가 터지고 점점 그 기세가 확산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얼음이 되고 말았다. 그 기간 동안 여러 번 우체국 택배를 여러 번 이용했다. 다른 택배들은 적어도 한 번씩은 사고로 여러 날 마음고생을 해 본 탓에 적어도 내가 보내는 물건은 우체국 택배만을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택배 기사들이 목숨을 담보로 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급기야 우체국 택배에도 그 영향이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우체국 택배를 자주 이용한 나도 송구하고 마음이 아프다.
2차 접종이 남아 있긴 하지만 1차 코로나 예방 접종을 받은 남편이 둘째에게 가 보고 싶은 눈치가 역력했다.
"세종엔 한 번도 못 가 봤네."
남편의 말에 내가 기운이 났다.
출발 전 날, 얼마 전 택배비 아끼려고 한 박스에 꽁꽁 싸매 끌고 갔다 택배 노조 파업이라는 말에 부치지 못하고 다시 들고 왔던 큰 박스를 풀었다. 아침 공복에 먹을 주스 병들을 다른 박스로 옮기고 작은 박스에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담아 두 개의 박스로 정리했다. 두 박스에 나누어 담으니 박스들이 내가 들기에도 부담스럽지 않다. 문득 내가 보내는 택배 물건들의 무게가 택배 기사들께 큰 부담이었지 않을까 싶었다. 택배 기사들의 힘겨운 노동보다는 어떻게든 한 박스에 많은 물건을 담으려 했던 나 또한 택배 기사들의 파업에 일조를 했구나 싶었다. 앞으로는 최대치의 무게까지 담을 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도 괜찮을 무게 정도로만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가진 한계치에 대해 나는 왜 내게만 관대했을까.
저녁 무렵 고기를 삶아 썰었다. 엊그제 구입한 살집 좋은 갈치를 구워 등과 배 쪽의 가시를 모두 발랐다. 음식물 쓰레기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먹기 좋게 해 보내기 위함이다. 딸이 둘이니 두 개로 나누어 담아 김치 냉장고에 넣었다. 우리 차에 싣고 갈 터이니 더 갖다 줄 갈 뭐가 없나 두루 살폈다.
냉장고에 넣어둔 엊그제 넣어 둔 수박이 생각났다. 올해 처음 산 수박이다. 둘째는 수박씨 골라내기 귀찮고 힘들어 수박을 먹지 않으려 한다. 수박을 가르고 다시 반을 갈라 당도 높은 안쪽 과육에서 씨앗을 빼 내고 그릇에 담았다. 두 번은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넉넉한 양이다. 첫째에게는 껍질이 붙은 채로 당도 높은 쪽만 잘라 담았다. 딸들에게 갈 수박을 정리하고 나니 껍질 쪽에 붙은 붉은 살들이 제법 많이 남았다. 대강 잘라 나 먹을 그릇에 담아 냉장실에 넣었다. 아침에 먹을 것들만 아이스박스에 담고 출발하면 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등의 말은 주로 아들 키운 엄마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딸을 키운 엄마 역시 아들 못지않은 지극한 정성으로 키운다. 내 자식이니 말이다. 아들 키운 엄마와 딸 키운 엄마 가르기로 하려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한 많은 시어머니께서 당신 아들 못지않게 상대편에서도 지극정성으로 키운 딸을 세상에 내 보냈음을 눈치채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더불어 내가 하늘땅만큼이나 정성 들여 자식을 키우듯 내 엄마 아버지 역시 나를 그렇게 키우셨음을 내 안의 나에게 고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엄마는 생선 가시나 꼬리와 대가리를 맛있어하고 수박씨 골라내는 게 취미인 줄 알 수도 있었을 나를 매번 반성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딸들이 자신이 낳은 아기를 내가 딸들을 아끼고 사랑한 이상으로 잘 살펴 키워 세상에 내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둘째의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하기 위해 아침 8시에 출발했다. 네비는 넉넉잡아 3시간 정도를 알려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세종엔 초행길인 남편은 네비 양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어느 만큼 갔을까, 네비 양은 남편에게 톨게이트는 빠져나가라더니 웬 시골길로 안내했다. 세종까지는 시간 반이 남았다면서 말이다. 뭐지? 다시 서울로 보내려는 네비 양의 음모일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네비 양의 음모론은 우리의 기우였다. 걱정과는 달리 점심시간 전에 도착했다. 11시 20분이었다.
둘째와는 점심시간 맞춰 만나기로 하고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얼마나 바쁘게 출근 시간에 맞춰 나갔는지 안 봐도 뻔하다. 건조기에서 건조되어 나온 옷들이 작은 소파 위에 그대로 놓여 있고 빨래건조기에는 건조기에서 말릴 수 없는 겉옷들이 옷걸이에 빼곡히 걸려 있었다.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 나 또한 결혼 후엔 내가 모든 걸 다 하며 직장 생활을 했었다.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의 병행이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둘째의 오피스텔 내부에 당시의 내가 웅크리고 있는 듯 보였다.
"엄마, 청소하려고 하지 마세요. 주말에 다 정리해요." 둘째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청소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가지고 간 물건들을 대강 정리했다. 우선 딸의 냉장고 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음식물을 넣어야 하기에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냉장실과 냉동실이 우리 집 냉장고와 위아래가 달라 주의를 해야 했다. 속이 쓰려 먹었는다는 약봉지와 아침에 한 잔 마시고 나간다는 차 봉지를 대강 주웠다. 현관 앞에 배달된 순간부터 그대로 있었을 물병을 정리하고 재활용할 플라스틱 용기들을 봉지에 담으니 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헝클어진 신발 몇 켤레 가지런히 놓아주고 딸의 오피스텔을 나왔다. 말없이 내가 부탁한 것들에만 손을 댔던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자주 들러야겠네."
둘째가 예약해 둔 음식점까지는 차를 타고 10여분이 걸렸다. 회사 근처 음식점은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인 데다 엄마 아빠께 맛나고 비싼 것 사드리고 싶어 먼 데로 예약했다는 딸에게 고마웠다. 소갈비 정식. 그릇 아래쪽에 우거지를 깔고 소갈빗살을 발라 올린 후 끓이면서 먹는 음식이다. 밥과 된장국 대신 냉면을 시켰다.
"낮에 이렇게 많이 먹기 힘드는데." 그러면서도 다 먹었다. 딸이 사 주는 딸이 사는 동네의 이 큰 음식점은 이곳 주민들보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고 한다. 맛있다. 더 맛있으려면 우거지에 간이 잘 배어들게 미리 버무려 놓았다가 고기 아래 깔면 좋겠다고 내 입이 알려주었다. 둘째가 말했다.
"나중에 엄마 아빠 모시고 같이 살게요. 더 맛있는 거 많이 사 드리면서요."
둘째를 회사까지 데려다주고 1시경 집으로 출발했다. 아침엔 둘째 시간에 맞춰야 했기에 둘째에게 먼저 들렀으니 첫째에게 들러 먹거리를 전달만 하면 된다. 서울로 진입하기 전부터 차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내내 비어 있던 고속도로가 갑자기 주차장으로 변했다. 3시 반 무렵, 도착하기까지 45분 남았다고 네비 양이 알려주었다. 차들은 꼼짝을 하지 않고 남편은 이 길을 잘 안다며 차가 뜸한 다른 길로 들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이 한가로운 길을 이용하지 않는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한참을 달렸다. 네비 양이 40분 남았다고 알려주었다. 아까의 그 길 꼬리에 가 붙었다. 그냥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신호등 하나는 건넜으려나 싶기는 했다. 한강 북단의 길을 달리면서 다리와 다리 사이가 2km 정도라는 걸 처음 알았다. 네비 양의 친절한 설명 덕분이었다. 얼마나 밀리는지 네비 양은 다시 45분 남았다고 알려준다.
첫째 엄마 아빠 기다리다 외출한다고 알려왔다. 음식물만 냉장고에 넣고 가기로 했다. 첫째의 말이 걸작이다.
"엄마, 냉장고 청소했어요. 열어도 돼요."
그럼 그동안 냉장고 열지 못하게 한 건 순전히 냉장고 청소를 하지 않아서였단 말인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상했다. 길이 온통 젖어 있었다. 살수 청소차가 물을 지나치게 과용하는구나 생각했다. 의자를 젖히고 한숨 자고 나니 내가 사는 동네에 도착했다. 우리 아파트 단지 주차장도 온통 젖어 습한 땅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여기도 다 젖어 있네?"
"그러게?"
"아, 오늘 소나기 지나간다고 했었다."
"아, 그랬지. 그런데 우린 비 한 방울 구경도 못했네."
무사히 운전 잘하고 딸들 잘 만나고 돌아가라고 비가 우리를 피해 와 주었나? 6시. 드디어 내가 사는 집에 도착했다. 잘 다녀왔습니다.
있는 반찬에 저녁을 먹고 자투리 수박을 꺼내 먹고 있는데 둘째가 톡을 보내왔다.
- 엄마 더 맛있는 거 사드렸어야 하는데.
- 엄마 포식했다. 비싼 거 아니라도 돼. 딸 얼굴 봤으니 된 거야. 혹시 수박이 냉동실에 있지 않았니?
- ㅋㅋㅋ 맞아 냉동실.~ 방금 꺼내서 먹는 중이야, 엄마 고마워요.
자리에 누우니 엄마 아빠 모시고 살겠다는 딸들의 말이 떠오른다. 딸들이 엄마보다 생각이 깊어 보여 흐뭇하다. 나는 엄마 아버지 모시고 살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이었다. 언제나 아들 우선인 부모님 앞에서 나는 출가외인이었기 때문이다. 딸 둘이 서로 부자도 아닌 엄마 아빠를 모시고 살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행복한 고민이겠다. 고맙다. 하지만 우리 부부 오래도록 건강하게 함께 하는 이것이 더 오래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