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두어 번 들르는 은행 맞은편에 몇 달 전 점포 하나가 들어섰다. 말이 점포일 뿐 번듯하게 사방 벽이 둘러져 있는 정식 점포가 아닌 약간 넓은 건물의 통로에 차린 점포다. 그러니까 옆 점포의 외벽 두 개에 의지하여 물건을 진열하고 그 진열한 물건 사이를 사람들은 여전히 통로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노점 반 점포 반이라고 해야 할 듯한데 카드 사용도 가능하다.
냉장이나 냉동 등 시설을 설치할 수 없는 탓에 채소와 과일 외에는 다른 마트에서 볼 수 있는 생필품은 보이지 않는다. 이름도 *** 농산물이다. 그날그날 팔릴 양만큼만 가지고 오는지 물건들은 대체로 싱싱해 보인다. 오늘까지 딱 두 번 이용해 본 바로는 그렇다.
좋은 물건을 싸게 파는지는 자주 이용하지 않아 모르지만 은행 들른 김에 들러봤다. 주변 아파트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애용하는 마트와는 두 블록 떨어져 있으니 그 마트에도 어느 정도는 타격이 아닐까 싶었다. 직원도 결혼 전으로 보이는 청년 둘과 50 전후로 보이는 남자, 계산원 아주머니 한 분이 전부다. 네 사람이서 물건 포장과 진열, 계산과 손님 응대, 확성기 없이 육성으로 손님 끌어들이기 등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활기란 이런 것이라고 해야 옳다.
참외 12개에 만 원이라는데 담다 보니 11개를 넣었다. 하여튼 아무 생각이 없이 산다. 계산하다 말고 참외 한 개를 더 갖다 담았다. 그때 당근 포장하던 청년이 늘어선 계산 줄 앞으로 와 봉지를 들어 보였다.
"당근 하나가 꼬리 쪽이 약간 물렀어요. 세 개 천 원 아니 오백 원."
"저 주세요, 오백 원."
언제 이런 순발력을 길렀나 나도 놀랐다. 사실 천 원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를 포함한 계산대 옆에 서 있던 세 사람의 손이 봉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런데 뒤이어 오백 원이라는 말이 이어졌고 그중 내가 먼저 '저요'라고 손을 든 것이다. 당근 담긴 봉지가 내 손으로 들어왔다. 오백 원. 끝이 약간 물렀다는 한 개를 버리더라도 멀쩡하게 잘 자란 당근 두 개를 오백 원에 살 수는 없다. 농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량으로 당근을 키웠다면 그래도 팔릴 수 있으니 다행이기도 하다.
친정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나는 어디 가서 딱 굶어 죽지 좋은 느림을 가졌다. 말도 느리고 행동은 더더욱 느려 터진 데다 크고 작은 병치레까지 잊을 만하면 이어지는 바람에 친정어머니의 걱정을 달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혼자 하는 일은 생각해가며 천천히 잘 하지만 여럿이 몸과 마음을 합하는 일에는 손이 느려 미안해서 함께할 엄두도 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두 개 처리할 때 하나 가지고도 낑낑거릴 때면 심장에서 땀이 흐를 지경이다. 더구나 누군가 내미는 물건을 내가 사겠다고 불쑥 나서서는 그 물건이 내 손에 들어왔다는 데 나도 내게 깜짝 놀랐다. 어쨌든 청년은 손을 내밂과 동시에 '저요'라고 의사를 밝힌 내게 당근 봉지를 건넸다. 스스로 대견해했음은 물론 남편이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자랑을 해 댔다.
당근을 키웠던 적이 있다. 영양가 풍부한 땅이라면 다른 어떤 작물 못지않게 잘 자라는 식물이 당근이기도 하다. 수확할 때 한 뿌리 정도만 꽃 본 후에 씨앗을 받아 두면 여기저기 당근 씨앗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눔 하고도 충분한 양의 씨앗을 얻을 수도 있다.
집에 와 저녁 준비를 하면서 당근 껍질을 깎았다. 물렀다는 당근 꼬리는 칼로 조금 잘라내자 말짱했다. 채치고 깍둑 썰고 볶아먹고 카레에 넣고...... 누가 언제 이 당근을 다 먹나. 몸에 좋은 당근, 남편과 내가 매일 조금씩 먹으면 되지.
아직까지는 좋은 물건을 싸게 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좋지 않은 물건을 괜찮은 물건인 척 속여 팔지는 않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참외를 한 개 덜 담았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당연히 한 개 더 가져가셔야죠."
다른 청년은 예쁘고 맛나 보이는 걸로 골라 가시라고 권하기도 했다.
꼬리 부분이 조금 상한 당근은 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농부를 생각하면 꼬리 부분 조금 잘라내면 될 당근을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꼬리 부분 상한 당근이니 공짜로 갖다 먹으라 한다면 소비자로부터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러느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농부도 생각하고 소비자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새겨본다. 무엇이 소중한지 아는 젊은이들이다.
지금은 에어컨은커녕 냉장고 한 대 놓을 수 없는 건물의 통로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물건을 팔고 있지만 머지않아 좋은 점포 자리로 이전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것 같다. 농부와 소비자 사이에 좋은 상인이 있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