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악화된 부분이 있다면 모든 건 환자의 정기 검진 연기로 인한 것일 터였다.
지난해 이 무렵 받아야 할 정기 검진을 코로나19가 조금 수그러들면 받겠다고 가을로 연기했었다. 코로나는 수그러드는 듯하다가 다시 확산을 반복했다. 가을에서 다음 해 봄으로, 봄에서 다시 오늘로 검진을 미뤘다. '운동 열심히 하셨나요?'라고 물으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배시시 웃고 말 것이다. 대체로 오늘 진료는 낯간지러우면서도 다소 뻔뻔한 환자가 될 수밖에 없게 생겼다. 하지만 나의 어느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책망의 말을 듣는다는 건 마음 편할 일이 아니다.
부디 병원 오가는 동안 예보되어 있던 소나기만이라도 물러가 있기를 바랐다. 병원 앞 200여 미터쯤 다다랐을 때 툭 뭔가 양산을 쳤다. 빗방울이다. 양산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이 제법 두툼하다. 거리엔 햇빛이 내리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비는 몇 방울 떨어지다 쉬곤 했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로 들어서자 플라타너스 잎에 떨어지고 있을 빗방울 소리마저 자동차 소리에 묻혔다. 소나기를 만나지 않고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
미리 작성해 두었던 '스마트폰 방명록'을 안내 데스크에 보여주고 바로 안과로 향했다. 이름과 예약 시간을 대자 눈에 익은 간호사가 예약증을 요구했다. 나는 마치 처음 병원을 방문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호사가 물었다.
"예약증 안 갖고 오셨어요?"
"네."
그제야 병원에 다닐 때면 들고 다니는 가방 생각이 났다.
처음 정기 검진을 연기할 때만 해도 지금처럼 코로나19가 확산일로는 아니었다. 광복절 집회 전후로 확산하기 시작하여 추석을 거치면서 확산했지만 역시 오늘과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 번째로 검진을 다음 해 봄으로 미루었다. 연말에 또 한 번 확진자 수가 확 치솟았다. 하지만 백신이 개발되고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그 후 우리나라도 얼마 안 있어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백신 접종자 수가 늘면 코로나도 별 수 없겠지, 7월이면 코로나19도 어느 정도는 잠잠해지겠지 하는 생각에 3월 검진을 다시 7월로 연기했다.
연기하고 연기하고 또 연기해서 잡은 날짜가 오늘이다. 웬걸, 오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1275명으로 하루 확진자 수가 가장 많단다. 그것도 확산 속도가 빠른 변이 바이러스인 델타 환자가 급속히 늘고 있단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예약증이 들어 있는 가방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구름 낀 하늘이 코앞에 있더라도 갈 길은 가야 한다던 내 나름의 신념은 병원 예약 앞에선 헌신짝 버리듯 몇 번씩 버렸다. 처음부터 미루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안과 환자는 언제나 만원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할 수없이 의자마다 환자들이 앉아 있었다. 간혹 한 자리 떨어져 앉을라치면 금세 누군가 와서 자리를 메웠다. 뿌리 못 내린 나무처럼 서성거렸다. 다리라도 튼튼함에 감사했다. 눈에 익은 간호사는 2년 전에도 친절했던 그 간호사였다. 2년 사이에 통통하던 몸에 살이 조금 더 붙었다. 간호사는 내가 이름을 대자마자 바로 알아봤는데 나는 사실 긴가민가했었으니 조금 미안하다.
시력검사를 했다. 2년 전과 시력에는 변화가 없다. 산동제를 넣고 나오자 한 남자 환자가 자리를 양보했다. 감사를 전했지만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 앉게 되지 않았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중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예전엔 산동제를 넣은 후 간호사가 몇 가지 검사를 따로 한 후에 담당 의사의 진료를 받았는데 간호사의 검사가 생략되었다. 간호사가 하던 일련의 검사를 의사가 하면서 진료를 병행했다. 코로나19 덕분에 절차가 간소화되었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간호사의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환자로 분류되었을 수도 있다.
"작년에 거르셨네요."
"네, 코로나19 무서워서 피하다가 확진자가 가장 많은 날 골라서 온 것 같습니다."
몇 가지 검사 후 의사가 화면을 가리키며 현재 내 눈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지난 2년간 특별히 불편하거나 하신 건 없었나요?"
"네."
"제가 알려드린 운동은 꾸준히 잘하고 계신가요?"
"네."
약간 뜨끔하긴 했다. 열심히 하지는 않고 생각날 때마다 했기 때문이다.
"2년 전에 비해 특별히 나빠진 건 없습니다. 요즘 눈앞이 흐려 보이거나 하진 않나요?"
"약간 그런 날이 있습니다. 컴퓨터 때문은 아니라고 하셔서."
"네, 컴퓨터 때문은 아닙니다. 백내장기가 조금 있습니다. 그리고 안압이 약간 높습니다. 정상 범위이긴 한데 경계 최고치네요."
"저는 1년 후에 뵙도록 하시구요, 안압은 한 번 체크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녹내장이 올 수도 있거든요."
삐걱거려도 아주 고장만 나지 않기를 바라며 병원을 나섰다. 병원 도착 무렵에 비해 해는 더욱 쨍쨍한데 병원 주차장 군데군데가 젖어 있고 물이 고인 데도 눈에 띄었다. 내가 진료를 기다리고 받는 동안 세찬 소나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눈이 부셔서 걸음을 천천히 옮길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소나기가 내릴 확률은 눈 내릴 확률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다른 때에 비해 눈이 너무 부셔 걷기가 힘들었다. 산동제도 한 방울씩밖에 넣지 않았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요즘은 나이 이야기를 더욱 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때는 나이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흰색을 띤 것들이 많은지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아보기도 했다. 내 동공은 해 질 무렵이나 되어야 본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플라타너스 잎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윤곽이 진한 파랑을 띠었다. 하늘이 푸르게 보이는 것은 빛의 산란 때문이라고 배웠던가. 산란의 '산'과 산동의 '산'은 같은 한자를 쓰는가? 그렇다. 산란散亂이나 산동散瞳은 모두 같은 '흩을 산散'를 쓴다.
하품이 나왔다. 흰 마스크를 쓰고 있었음에도 손이 절로 입을 가렸다. 그러자 흰색이 조금 덜해졌다. 흰 마스크의 흰빛이 반사되어 눈앞의 모든 것들을 더 환하게 빛나 보이게 한 것이었다. 내내 손으로 마스크를 가리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싶을 때가 많다. 눈에 이물질을 넣어 동공을 확대하는 일이 눈에 좋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의 또 다른 데에 이상이 생겨 힘들게 되면 가족 중 누군가는 나를 보살피느라 자신의 생활을 어느 정도 아니면 전부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러할 터다. 그러니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기는 하면서 또 갈팡질팡에 빠져든다.
세상이 희고 밝은 만큼 어두운 곳도 상대적으로 눈에 잘 띄는 날이다. 그럼에도 경계가 모호하니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