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3권에 9900원.
눈을 의심했다. 책 정리 중인 직원에게 물었다. 맞단다. 세 권에 9천9백 원이란다. 분명 생필품 매장인데 언제 여기 책 코너가 생겼는지 여태 모르고 지나다녔다면 나도 참 어지간하구나 싶어 하는 참에 직원이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건 아니라는 듯 친절하게 알려준다.
"엊그제 월요일에 입점했어요. 마음에 드시는 책 있으시면 골라 보세요."
누군가에게 9천9백 원을 주기는 쉽지 않지만 상대의 취향을 안다면 그나마 부담 없이 건넬 수 있는 것이 책이다. 하지만 이제 내 주변에 책 선물을 해서 즐길 사람도 많지 않다. 또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내 취향이 변했듯 지금껏 알고 지내던 상대의 취향도 변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책 세 권이 9천9백 원이라니. 속에서 계속 되뇌면서 책을 살폈다. 책장을 펼치자 출판한 지 시간이 꽤 지난 책도 있고 어쨌든 신간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책을 사서 쟁이던 시기에 비하면 글자 모양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곱고 단정한 데다 지질도 썩 괜찮다. 오래 두어도 다시 나무로 돌아가겠노라고 툭툭 부러질 종이는 아닐 듯하다. 직원이 책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살피며 안내할 준비를 하는 듯했다. 책 살피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은지 직원이 말했다.
"창고에 쌓여 있던 책들이에요. 시간이 아주 오래진 않았지만 요즘 출판한 책들은 아니구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순전히 책이면 되는 책을 고르고 있는 내가 다소 우스꽝스럽긴 했다. 옥수수 한 포대 값에 책 세 권이라니. 책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옥수수 알갱이를 낱낱이 헤아려도 모자랄 만큼 오랜 시간과 생각을 글로 풀어 책으로 엮어냈으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렇게라도 세상과 소통하고자 나온 책이니 나라도 몇 권 집어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책을 사겠다고 서점에 들른 것이 아닌 우연찮게 마주친 마트의 책 매대에서 책을 고른다는 건 지극히 쉬운 일 같았지만 쉽게 생각한 그 이상으로 훨씬 어려웠다. 책이 얼마나 안 팔렸으면 여기까지 왔나 싶은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을지도 대강은 짐작이 갔다.
지나치게 한산한 책 매대 앞에서 오래도록 책을 고르지 못하는 내게 직원이 다가와 책을 들어 보였다.
"이런 책은 서울의 과거와 현대를 한눈에 볼 수 있구요, 또 이 여행기는 동남아부터 유럽까지 사진과 글로 여행하듯 상세하게 기록했더라고요. 저도 여행 다녀와서는 다녀왔구나 하고 말았는데 책을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했어요."
직원이 자신이 어디 어디를 즐겁게 여행했노라고 알려주었다. 직원의 권에 따라 두 책을 펼쳐보기는 했다. 물론 내 취향이 아니어서 감사 표시로 목례를 건넸을 뿐이다.
음식 관련 책들은 물론 저마다의 삶의 철학을 풀어낸 책들에 소설책들까지 종류별로는 다 있는 것 같았다. 매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촘촘히 훑어 세 권의 책을 드디어 골랐다. 내가 좋아하는 식물 관련 책 두 권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다.
식물 관련 책들은 지나치게 작은 책은 사진 효과가 많이 떨어져서 내용은 괜찮아도 집었다가 놓아주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옆에는 '제인 에어', '빨간 머리 앤', '작은 아씨들', '폭풍의 언덕'... 등 같은 출판사 시리즈물인 듯 여러 종류의 소설들이 놓여 있었다. 어린 날 어느 한때를 함께했던 책들을 물리고 그중 내게 고민을 조금 더 주었던 '좁은 문'을 집어 들었다.
식물 관련 책들 내용은 대개는 내가 알고 있는 내용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한 번은 더 들춰볼 것이다. 하지만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아마 읽지 않은 채 책장에 꽂히게 될 것이다. 약해진 시력도 시력이지만 그야말로 세 권을 채우기 위해 집어 든 책일 뿐이다. 누렇게 변색된 납 활자체의 내 오랜 '좁은 문'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꽂아둘 생각이다.
큰딸이 어렸을 때 '좁은 문'을 읽고 쓴 독후감 혹은 나름의 생각을 기록해 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도 그와 비슷한 나이에 '좁은 문'을 읽었고 비슷한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차곡차곡 한 계단 한 계단을 밟아 오르며 지금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내려가기 위한 지혜가 더 필요한 시기이다.
하 많은 사람들이 펴낸 하 많은 책들, 구르다 구르다 이 매장의 책 매대에 놓인 책들처럼이라도 누군가의 손에 안기는 것은 행운이 아닐까 싶어지는 끈적끈적한 날이다.
사람이 어디 가겠는가.